부치지 않을 편지

by 성게알

그 사람이 그립다기 보단, 그때가 그립다기 보단.
지금, 여기서, 정말 잘 살고 있어요.
전처럼 문득 떠올라 사무치게 하는 일은 이제 없어요. 첫사랑은 평생 간단 말 덕분에 이 먹먹함은 평생 가는 걸로 각오하고 살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괜찮아졌네요.
사람의 손길이 그립진 않습니다. 애정이 고프지도 않아요. 더 이상 어떤 노래를 듣고 눈물이 나지도, 옛 생각에 젖어 멈춰 서지도 않지요.
잘 산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행복하단 얘기더군요.
자신의 능력을 오래 의심하며 살아온 사람인데 이제는 조금 안정된 것 같아 축하합니다.
당신의 옆에 제가 없는 게 참 다행이에요.
우리가 평생 가지 않아 다행이에요. 가는 길이 달라서, 바라보는 곳이 달라서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아니었으면 괴로웠을 뻔했습니다. 우리 참 많이 다른 사람들이었잖아요.
헤어지고 나서 오래, 많이 담아두었습니다. 일어서기 힘들었는데요. 홀로 서는 법을 배웠습니다.
당신이 가르쳐준 노래, 영화, 취향. 이제는 제 취향이 되었지만 그리워서는 아닙니다. 그냥 보석 같은 것들의 진가를 알려주어서 감사할 뿐입니다.
전엔 당신이 알려준 모든 것들에 휩쓸려 당신 취향이 내 취향이고, 모든 것을 따라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내 취향의 것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당신을 떠나온 덕분입니다.
그때의 이별이 아니었다면 난 영영 아이인 채로 살았을 거예요.
그냥. 오랜만에 당신 얘기를 하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은. 값진 이별이 되어주어 감사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오늘의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