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특함이 찾아올 때

by 성게알

스스로가 기특해지는 순간이 명확하게 있다. 그건 착실히 돈을 모았을 때도, 실수 없이 일을 해냈을 때도, 열심히 준비한 시험들에 합격한 때도 아니었다. 오히려 기쁨보다 담담할 때 찾아오는 법이었다.


사람들은 인생의 굴곡을 몇 번 지나오다 보면 이제는 작은 슬픔에도 무뎌지는 힘겨운 어른이 된다고 한다. 그건 곧 순수함을 잃은 것과 다를 바 없이 해석되기도 했다. 더 큰 고난에 작은 고난은 이제 손톱 주위의 거스름 같이 느껴지는 삶의 법칙들은 인생의 쓴맛을 톡톡히 알아가는 자들의 비애인데 어째 나는 순수함을 잃어가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살아가면서 힘겨움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 더는 시시때때로 반응하지 않는 내 때 묻은 순수력이 시간의 선물이라 여긴다.

내게 오는 질문 하나에 얼마나 많은 저의가 숨겨져 있을까를 걱정한 여린 마음과, 관계의 우위를 선점하고 짓누르려는 사람들에게 보기 좋게 당하기만 하던 소심한 성격과, 뭔가 특별할 거라고 기대해 더욱 상처받았던 관계들. 모든 사람과 상황 사이에서 반응을 하던 눈물샘과, 눈치, 걱정거리.

덕분에 이상한 줄 몰랐던 피해의식, 자기 연민은 날로 늘어 정당하게 미워하고, 나만이 이런 슬픔을 가지고 있는 거라는 폐단을 저질렀다.


시간이 더 흘러 내 맘을 몰라준다고 여겼던 자들에게 받은 말들은 강력한 고언이 되어 전과 반대의 생각도 할 줄 알게 되는 사람이 되어간다.

전에는 정답이었던 게 틀렸다는 것을 알고,

틀렸다고 생각한 게 틀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아마 시간이 더 흐르면 그다음으로 얻어지는 생각의 변화가 있을 텐데 그때의 생각들이 항상 궁금하다.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법을 알아서 그 사람의 의도야 어찌 됐든 내겐 별 타격이 없음을 발견할 때, 연인과의 관계에서 나를 지우지 않고 서로를 다져갈 때, 자기 연민임을 알아챌 때, 슬픔에 빠질 시간을 주고 곧잘 빠져나올 때, 나를 알아가고 챙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 때, 짜증을 냈기 때문에 짜증이 나는 거라는 걸 알 때, 내가 분노에 잠식됐음을 알 때.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덤덤해진 내 마음과, 생각과, 반응들이 잘 살아가고 있구나 싶게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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