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 다 했다는 건

by 성게알

나뿐만은 아니지만.

지난 인연을 붙잡고 싶었던 경우가 더러 있어서 더 이상 몇 밤 자고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도 몇 년이 훌쩍 지난 순간부터 운명이란 말을 달고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범위는 점차 넓어져 나에게 일어난 일들은 다 운명이라고 여겼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버스를 놓쳐 지각을 해도, 모르는 사람과 어쩌다 인사를 나누게 돼도 다 이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짜증이 나지도, 슬프지도 않고 기쁘면서 참 위로가 됐었는데. 이상하게 관계가 끝이날 때면 완전한 위로가 되진 못했다.

하루는 책을 잃다가 '저 사람과의 끝은 인연이 다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문장을 잃고선 큰 가치관 하나를 얻은 기분이었다. 인연은 때가 있다는 말과 그 인연은 거기까지가 끝인 거라는 말 등. 소진을 다해버린 인연에 대한 말들은 여러 번 들어왔지만 이번엔 마치 처음 듣는 것 같은 깊은 감동을 느꼈다. '모든 관계는 인연이 아니라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 그 관계의 정해진 기한이 있기 때문이구나' 하며.

물건에도 음식에도 사용하고 섭취할 수 있는 기한이 있는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도 기한이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명쾌하고 쉬울 수가.


모든 것은 운명이기도 인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말들이 모든 관계에 기한이 있다는 명제 아래에 있다는 자각은 잘하지 않는다.

물건을 소중히 다루면 사용기한보다 오래가듯, 아무렇게 보관해서 섭취기간보다 빨리 상하듯. 누구와는 2개월 누구는 3년, 누구는 30년인데 하나하나 그 관계에 맞춰 다뤄주고, 아껴주면 평생 가기도, 금방 헤어지기도 하는 거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저 사람들과도 기한이 있는 거니 더 열심히 사랑하고, 더 열심히 표현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물며 앞으로 누군가와 멀어져도 이 관계의 기한이 다됐다고 생각하면 인연이 아니었다는 말보다 덜 슬프고 씩씩할 것 같다.


당신과 나는 기한이 있는 관계이지만 그래서 주어진 시간동안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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