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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말의 습격
by 김혜원 Apr 11. 2018

하루를 관장하는 신, 작은 친절과 작은 불친절

방어력이 낮은 인간이라 외부의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는 편이다


아는 언니의 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문을 열자 솜뭉치 같은 개가 발치로 달려들었다. 꼬리를 흔들고 다가오는 것으로 보아 나를 반기나 싶었는데, 자꾸 언니 뒤로 숨는 것을 보면 낯선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도 같았다. 몸을 부볐다가 갑자기 왕 짖기도 하고. 오락가락하는 솜뭉치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더니 언니가 말했다. “사람을 엄청 좋아하는데 겁이 좀 많아” 아, 나 같은 거구나. 단박에 걔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가끔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두렵기도 하다. 방어력이 낮은 인간이라 그런가. 외부의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는 편이다. 좋은 점은 작은 호의에도 쉽게 행복해진다는 거. 다정한 마음에 닿으면 그 크기에 상관없이 기분이 들뜬다. 상대가 웃으며 인사를 받아줬다거나, 누가 빈 잔에 물을 채워줬다거나.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운이 좋은 날의 이야기일 뿐. 반대로 말하면 작은 불친절을 만났을 때 쉽게 무너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택시를 잡다가 승차 거부를 당하는 동시에 욕까지 먹었던 날엔 하루 종일 그 일을 곱씹으며 가라앉았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치고 넘어갈 수도 있을 텐데. 엄마는 이런 날 두고 “세상 참 피곤하게 사는 년”이라고 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예쁘게 말하려고 노력한다. 착해서가 아니라, 엄마 말대로 ‘세상 피곤하게 사는 년’이라서. 말 한마디, 사소한 제스처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망칠 수도 있다는 걸 잘 아니까 그렇게 한다. 버스에 탈 때는 기사님에게 소리 내서 인사하고, 밥 먹고 나오면서 “잘 먹었습니다” 한마디씩 덧붙인다. 딱히 어렵지는 않은데 하는 나도 듣는 상대방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라, 괜히 뿌듯하다. 


언젠가는 카페에 갔는데, 주문이 밀려 2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저희 점심시간이 곧 끝나서. 다음에 다시 올게요~” 하고 돌아서는 내게 같이 있던 E가 말했다. “보통 주문이 밀렸다고 하면 그냥 나오고 마는데. 일일이 친절하게 답해주시네요. 혜원님은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런가? 아닌데. 왠지 부끄러워 말이 길어졌다. “아, 그게 제가 좋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솔직히 말하면 내 인성에 자신이 없다. 그래서 좋은 사람 혹은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혼자 찔린다. 평소엔 친절하지만 나에게 해가 될 것 같은 일 앞에선 순식간에 인색해지는 사람이 나다. 그나마 유지하던 친절함도 컨디션이 안 좋으면 파업 선언을 하고 놓아버린다. 내가 편할 때만 베푸는 조건부 친절이 무슨 의미일까. 그러면서 ‘나는 친절한 사람이다’ 뿌듯해하는 건 일종의 기만이 아닐까. 갑자기 앞으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한동안 ‘친절함’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매일 고민했다. 하루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애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서 천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너한테 나쁘게 해도 웃어주고? 컨디션이 안 좋아도 억지로 상대방에 맞춰주고?”

“아니. 호구가 되고 싶은 건 아닌데.”

“그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데?”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

“그냥 지금처럼 하면 되겠네. 너무 무리하지마.” 


대화를 마치고, 잊어버렸던 비밀번호 마지막 한 자리를 맞춘 듯 머릿속이 명쾌해졌다.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지, 호구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니 무리하지 말고 지금처럼. 할 수 있는 만큼 친절하게. 간혹 친절함을 유지하지 못하더라도 크게 마음 쓰지 말기. 천사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내가 정말 좋아하는 웹툰 <어쿠스틱 라이프>에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우연히 후배에게 ‘천사 같다’는 말을 들은 난다(주인공)는 왠지 들떠서 혼자 먹으려고 준비한 간식을 모두에게 하나씩 나눠준다. 그리곤 텅 빈 상자를 보며 자책한다. “역시 착한 일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렇지만 사실 난다에게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다.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는 자신 있게 착한 사람이라는 것. 그녀는 가방 문이 열린 사람을 보면 쫓아가서 말해주고, 아주머니의 빠른 퇴근을 위해 불필요한 전단지도 받는 착한 사람이다. 그래, 어쩌면 다들 딱 이만큼씩만 착하게 살아도 세상은 좀 더 살 만한 곳이 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내 목표는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자신 있게 친절한 사람’으로 해야지.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드는 주문

목표는,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자신 있게 친절한 사람




ILLUSTRATOR l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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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대학내일 직업에디터
주간지 대학내일에서 글을 씁니다. https://univ20.com/author/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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