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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May 02. 2018

내적 친분 장려 캠페인 “어색해도 또 만나요, 우리”

어색하면 좀 어때. 모든 친구가 허물없이 편할 필요는 없잖아.


연예인 덕질하듯 주변 사람들을 좋아한다. 예로부터 나는 모두가 신화나 빅뱅에 열광할 때 홀로 과학 선생님 싸이월드를 뒤지던 아이였다.


덕질의 기본은 대상의 SNS를 정주행하는 것. 몇 년 전 업로드 된 게시물까지 뒤적이다 보면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사소한 공통점을 발견하기 마련인데(‘어머 이 작가 좋아하는구나’ ‘우리 같은 곳으로 여행 다녀왔네!’), 거기에 의미 부여를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직접 만나 소통하지 않아도 왠지 친밀해진 기분. 그런 과정을 요즘 말로 ‘내적 친분을 쌓는다’라고 표현하더라.


ㄱ 언니와 나는 전형적으로 내적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우리는 제주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는데, 오래 이야기해보진 않았지만, 취향이 비슷하고 감성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더 친해지고 싶었으나 일정이 어긋나서 급하게 헤어진 게 못내 아쉬웠다.


언니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내가 일 년 전 올린 사진에 굳이 댓글을 달았다. “혜원, 피드 천천히 다 봤어. 사진이랑 글 너무 좋다.” 그 후 SNS를 통해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더 친해지지 못해 아쉬운 관계로 남을 줄 알았는데… 별안간 우리는 여행을 함께하게 된다. 작년 여름 한 달간 제주에 내려가 있었는데, 마침 제주로 여행 올 계획이 있었던 언니가 내가 머무는 숙소에서 이틀쯤 자고 갈 수 있냐고 물은 것이다. 


처음엔 큰 고민 없이 승낙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실제로 만나는 건 오랜만이라 약간 걱정스러웠다. 단둘이? 여행을? 이박 삼일씩이나? 어색하면 어쩌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디데이를 기다렸다. 그사이 언니의 SNS를 여러 번 다시 봤다. 역시나 내 스타일. 왠지 잘 맞을 것 같다는 기대에 부풀었던 여행 전날 밤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동시에 재회하던 찰나의 어색함도 또렷하다. “오랜만이야, 혜원! 잘 지냈어?” “언니, 너무 반가워요. 그대로네요!” 진심을 담아 인사를 나누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잃어버린 솔메이트와 상봉한 듯 깊은 이야기가 오갈 줄 알았는데. 대화는 세 마디를 넘기지 못하고 뚝뚝 끊겼다. 잊고 있었다. 나는 말주변이 없는 데다 낯을 몹시 가리는 사람이라는 걸.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좋아하는 연예인과 전화 통화를 시켜달라고 조르다가 막상 연결되면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상황이 클리셰처럼 연출되곤 하던데, 딱 그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가 어색해하는 걸 알면 언니가 서운해할까 봐 부러 목소리 톤을 올려 신나는 척했다. “언니 오니까 너무 좋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허접한 연기가 통할 리 없었지만. 


짐 정리를 대강 마치고 숙소 근처 바닷가에 노을을 보러 갔다. 나를 위해 여기까지 와준 손님에게 멋진 풍경을 대접하고 싶었다. 술기운이라도 돌면 덜 어색할까 싶어 맥주도 한 캔 챙겼다. 


눈으론 노을을 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언니가 여기 온 거 후회하면 어쩌지.’ ‘저녁엔 무슨 얘기 하지?’ 그때 언니가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은 듯,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혜원, 혹시 내가 좀 어색해? 괜찮아! 어색하면 어때.” 순간 멍해져서 뭐라고 답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사이 그녀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근데 여기 노을 정말 예쁘다. 멋진 곳 알려줘서 고마워. 나 지금 행복해.”


언니와의 이박 삼일은 어색했지만 좋았다. 그녀는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예쁜 걸 보면 나누고 싶어 하고, 매사에 배려하며, 무엇도 과시하는 법이 없었다. 막역한 사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동행을 거절했다면 언니의 이런 멋진 면을 보지 못할 뻔했다. 그게 벌써 일 년 전 일이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는 (역시나) 사는 게 바빠 만나지 못하고 있지만, 내적 친분만은 여전히 착실하게 쌓고 있다.


사실 내게는 ㄱ 언니 말고도 내적 친분‘만’ 두터운 친구들이 잔뜩 있다. 함께 작업한 지 3년이 넘었지만 아직 서로 존댓말을 쓰는 동갑내기 동료, 할 말이라고는 “잘 지내요?” “힘내요”밖에 없는 후배. 제 3자가 보면 남이나 다름없는 관계겠지만, 우리는 안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고 있음을. 그래서 나는 그들을 ‘친구’라고 부른다.


가끔 솟구치는 내적 친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데이트 신청을 하기도 한다. 막상 만나면 분명히 어색하겠지만. ㄱ 언니 말대로 어색하면 좀 어때. 모든 친구가 허물없이 편할 필요는 없잖아. 그런 의미에서… “친구들아! 우리 날도 좋은데 맥주나 한잔할까…요?”


마음을 홀가분하게 해주는 주문

모든 친구가 허물없이 편할 필요는 없다.




ILLUSTRATOR l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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