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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ul 22. 2018

나에게만 의미 있는 예쁜 쓰레기 같은 얼룩들

누군가 나를 자세히 봐주고, 시답잖은 얼룩들을 발견해 주길 마냥 기다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는 내 말버릇이다. 말이 안 통하는 상황을 만나면 농담반 진담반으로 외친다. "뭐라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실제로 나는 많은 폭력이 몰이해, 모름에서 온다고 믿는다. 뜻하지 않게 뭔가를 해쳤거나, 망가뜨렸다면 내가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나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주 나를 해친다. 이 사실도 오랫동안 모르고 있다가 몇 년 새에 겨우 알게 됐다. 그래서 덜 다치기 위해 시간이 남을 때마다 나에게 관심을 준다. 지난 일기도 다시 읽고, 사진첩도 뒤져 보고, 플레이 리스트도 점검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운동이나 영어 공부를 하면서 자기 관리를 한다면, 내 방식의 자기 관리는 섬으로 도망 와서 맥주를 마시며 나를 관찰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한심해 보이려나...)


약속 시간이 5분 남았을 때 쓸데없이 초조해 하는 군. 맑은 하늘보다 구름 낀 하늘을 더 좋아하는 군. 이런 사소한 조각들은 시간을 들여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예전엔 마냥 기다렸다. 누군가 나를 자세히 봐주고, 시답잖은 얼룩들을 발견해 주길. 근데 요런 종류의 얼룩은 너무 작고 희미해서 오직 자기 눈에만 보이는 거더라고.



오늘은 제비상회라는 이름의 귀여운 술집에서 아보카도와 새우 그리고 칭따오를 먹다가 두 가지 얼룩을 발견했다.

하나는, 좋아하는 맥주가 바뀌었다는 사실. 예전에 자기 비하가 유독 심했던 시절에, 어떤 오빠가 "혜원이는 마음이 새까매서 맥주도 흑맥만 마시는 구나"라고 장난을 쳤었는데, 별거 아닌 말이 마음에 얹혀서 이후로 시위하듯 흑맥주만 마셨다. (아직도 의문이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별로 친한 사람도 아니었는데) 물론 발단이 그랬다는 것이고, 워낙 오래 된 일이라 지금까지 흑맥주를 고집한 데에 특별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다 최근에 갑자기 '왜 내가 흑맥주에 얽매여 있지?'라는 생각이 들어 이것저것 다양하게 마시다 보니 기네스보다 빅웨이브를 더 즐기게 됐다. 그리고 맥주 마니아답게 좋아하는 맥주의 빛깔을 따라서 마음도 조금 맑아졌다.


나머지는 작은 습관에 대한 발견인데, 나는 맥주잔에 빈 공간이 생기는 걸 못 참더라. 한 모금 마시고 채워 넣고 또 한 모금 마시고 쪼륵 붓고. 언제나 그득 찬 상태를 선호한다. 그리고 (역시나) 맥주 마니아답게 마음도 언제나 그득 차 있기를 원한다. 그래서 남들보다 금방 바닥이 보인다.



나에게만 의미 있는 예쁜 쓰레기 같은 얼룩들을 기억해 두고 싶어 부지런히 적는다는 게 이렇게 길어졌다. 누가 그러던데. 인간은 결국 누군가 나를 헤아리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 법이라고. 내가 쓰고 싶은 글도 결국 나를 위로하는 글이었을까.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글 쓰는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말,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도 내게는 이렇게 읽힌다. "제 행성에서 이런 얼룩이 발견됐는데요, 같이 봐 주세요. 꽤 재밌게 생겼어요. 혹시 여러분의 별에도 비슷한 게 있진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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