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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11. 2019

어떻게 매일 일기를 쓰냐고?

-10년 차 ‘일기인’이 전하는 일기 쓰기의 기술

가끔 내가 존재감 없는 반찬 같다고 생각한다. 멸치볶음 미역무침 진미채처럼. 메인 반찬으로 주목 받기엔 다소 시시한 사람. 다행히 그런 내게도 딱 하나 비범한 면이 있긴 하다. 바로 매일 일기를 쓰는 사람이라는 거. 스무 살 때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일기를 쓴지 딱 십년이 됐다. 많은 이들이 새해 목표로 일기 쓰기를 꼽고 대부분 실패하곤 하니까. 이정도면 특기가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M: 언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 매일 써? 나도 한 번 써 보고 싶다.
나: 그냥 쓰는 건데. 별거 없어. 한 번 해 봐. 너도 좋아할 거야.
M: 아냐. 난 못 할 거야.
나: (…) 그래? 그럼 안 해도 되지 뭐.


얼마 전 친한 동생과 만나 일기 이야기를 하다가 좀 찜찜하게 마무리됐다. 뭐라도 더 대꾸해 줄 걸 왜 그렇게 무뚝뚝하게 말했을까. 혹시 조언을 구하는 신호는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건 내가 매일 운동을 하는 친구에게 “어떻게 그렇게 꾸준히 운동을 해?”라고 묻는 일과 비슷한 것이었을 텐데. 친구가 나처럼 답했다면 왠지 서운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려 글로 못 다한 말을 대신한다. 잘 생각해보니 일기 쓰기에 대단한 비결은 없지만, 10년 간 쌓인 요령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을 듯싶다.


1. 우선 마음에 드는 일기장을 찾자

실력 있는 목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지가 않다. 별 생각 없다가도 나에게 꼭 맞는 톱이 생기면 장작이라도 잘라 보고 싶은 법. 일기 쓰기도 마찬가지다. 일기장이 예쁘면 딱히 쓸 게 없어도 괜히 한 번 펼쳐보고, 스티커라도 붙여 보고, 카페에도 들고 나가고 싶어 진다.


나의 경우 오랫동안 일기장 유목민으로 살았다. 학교 로고가 박힌 것부터 카페 다이어리, 만년 다이어리, 수제 노트까지 정말 안 써본 게 없다. 그러다 3년 전 운명의 친구를 만났다. 이 노트는 ‘미도리’라는 일본 브랜드의 것으로, ‘여행자의 노트(트레블러스 노트)’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가죽 커버를 사서 속지를 바꿔 끼는 형식이다. 한 해 쓰고 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를수록 손때가 묻어 근사해진다. 쓰면 쓸수록 정이 붙어 요샌 어딜 가든 들고 다닌다. 미도리가 망하지만 않는 다면 평생 쓸 계획이다.



자꾸 펼쳐봐서 귀퉁이가 낡아버린 나의 갈색 일기장을 보니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백퍼센트의 일기장만 찾는다면 모두가 의외로 쉽게 일기 쓰는 습관을 갖기 되지 않을까? 늘 1월 첫째 주만 잠깐 깔짝이다 일기 쓰기를 포기해 왔다면 그건 일기장이 그대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들 (한 달 쓰고 말지언정) 새로운 일기장을 꾸준히 사보길.


2. 동그라미라도 그린다는 생각으로

이경미 감독의 에세이집 <잘 되가? 무엇이든>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쓰레기 쓰겠어! 라고 결심하니 써지긴 써진다. 매일 다짐해야겠다. 쓰레기를 쓰겠어!”


일기를 쓸 때 나의 마음가짐도 딱 그렇다. 이 글의 독자는 오직 나 한명 뿐이므로. 재미도 의미도 없는 아무 말을 쓴다.


2017.11.29
세계는 귀찮음을 무릅써야 넓어진다. 나의 세계가 넓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귀찮음을 무릅쓰고 교보문고에 갔다. 피곤과 추위에도 씩씩했던 나, 칭찬한다.

2018.12.5  
현재 시각 pm 10:04. 일이 너무 많이 쌓여 있어서 평정심을 잃었다. 도저히 못 참겠어서 뛰쳐나가 세븐일레븐에서 맥주를 한 캔을 사 마셨다. 취기가 도니 좀 낫네. 이제 다시 일 해야지.


365일 중 300일은 이런 식이다. 에세이로 발전시킬 만한 통찰이나 인생의 한 장으로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에피소드도 가끔 있지만 드물다. 삶이 여행이라고 한다면 이 시시한 문장들은 하루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품쯤 될 테다. 해변에서 주운 소라 껍데기처럼. 딱히 쓸모가 있진 않지만 나중에 보면 추억이 되는 조각들.


비문이라도 상관없고 그냥 동그라미 하나만 그려 놓아도 좋다. 점심에 뭘 먹었는지, 편의점에서 뭘 샀는지 같은 건조한 기록이라도 좋다. 뭐든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나으니까. 오늘의 기념품을 남긴다는 생각으로 일기장을 채워 보시기를.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먼 훗날 그대가 돌연 인생의 의미를 잃고 헤맬 때 이 기념품들이 확실한 도움이 될 것이다.   


3. 일기가 어렵다면 주기부터

사는 게 바빠 일기 쓸 여유가 없다는 말. 이해한다. 피곤해서 화장도 못 지우고 자는데 하루의 끝에서 펜을 잡기란, 당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일기를 쓰고 싶은 생각이 있는 사람에겐 ‘주기’ 를 추천한다. 주기란 단어 그대로 일주일 단위의 기록을 남기는 방법이다.



나 또한 주중엔 맥주 마실 틈도 없이 바쁜(!) 주간지 노동자 이므로, 너무 바쁜 시즌엔 일기 대신 주기를 쓴다. 매일 쓸 수 있는 만큼만 쓰고 나머지는 일단 빈칸으로 둔다. 그리고 비교적 여유로운 주말에 일기장을 펼쳐서 밀린 일기를 쓴다. 그날 뭐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면 메신저나 휴대폰 사진첩의 도움을 받는다.  


평정심을 잃고 터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일 때는 가끔 2주 넘게 아무것도 쓰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땐 ‘365칸이나 있는데 14칸쯤은 빈칸으로 두어도 괜찮잖아.’ 하는 마음으로 넘어간다. 무리하지 않아야 지속할 수 있으므로 죄책감을 갖는 일은 금지다.   


마지막으로 일기 쓰기에 성공한 사람을 위해 일기 활용법을 공유하자면, 한 해를 마무리하며 연말정산을 하듯 그동안 쓴 일기를 다시 읽어 보시라.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구나. 이런 노래를 듣고 이런 책을 읽었구나. 계절 마다 여행을 떠나기도 했구나. 손바닥 만한 일기장에 차곡차곡 모아둔 기록을 읽으면 별볼일 없는 일상이 괜히 좋아질 것이다.



일기를 쓰면서 내 인생은 예전보다 더 단정해졌다. 해야 하는 일에 끌려 되는 대로 살다 보면 함정에 빠진 것처럼 막막해질 때가 있는데, 일기를 쓰고 있으면 왠지 잘 살고 있는 기분이 들어 안심이 됐다.
그래서 나는 일기를 쓴다. 여기까지 읽고 ‘나도 한 번 해볼까?’ 싶었다면 그대도 하루 빨리 일기 라이프에 동참하시길. 우리 같이 단정하고 의미 있게 살아 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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