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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Oct 29. 2023

아이스크림 플러팅

원래 아이스크림은 쉽게 변하는구나. 왜 하필 그런 나약한 걸 사랑해서


운동이라는 것을 전혀 하지 않던 시절. 나에게 아이스크림이란 그저 플러팅의 수단이었다. 술자리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은밀히 불러낼 때 쓰는 치트키랄까. 술 마시고 아이스크림 먹는 게 습관이 되어서, 이젠 술에 취하면 실제로 아이스크림이 당기긴 한다. 딱히 플러팅을 하고 싶은 사람이 없어도 아이스크림은 먹고 싶다.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별다른 목적 없이 자리를 지키다가, 집 방향이 같은 사람 아무나에게 미지근하게 권한다. “아이스크림 먹고 갈래?”


사실 아이스크림이 미친 듯이 먹고 싶은 순간은 따로 있는데. 달리고 난 직후다. 땀에 절어 먹는 아이스크림은 단순한 디저트가 아니다. 무언가를 해낸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승리의 맛이다. 수영 한 뒤 먹는 라면, 금요일 퇴근 후 마시는 맥주, 밤샘 마감 후 먹는 맥모닝 같은 것.


한 가지 음식에 꽂히면 그것만 질릴 때까지 먹는 습관이 있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도 한 종류만 팬다(!). 오월의 아이스크림은 폴라포였다. 한 달에 100km를 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매일 뛰었다. 달리고 나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는 느낌으로 폴라포를 하나씩 사 먹었다. 100km나 뛴다는 것이 달리기 초보에겐 무리한 미션이라 힘들고 괴로웠지만 기어코 해냈다. 그걸 해내야만 했던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그러기로 했으니까. 나는 나 자신과 한 약속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아직도 다리가 아파...)


목표를 달성하고 먹은 폴라포를 마지막으로 아직 단 한 번도 폴라포를 먹지 않았다. 늘 그런 식이다. 아껴 좋아하는 법을 모른다. 좋아하는 노래가 생기면 한 곡 반복으로 500번쯤 듣고 질려한다. 그렇게 무절제하게 모든 마음을 쏟아버린 뒤 온도가 변했음을 아쉬워한다. 미지근한 마음. 그런 시시한 것에 머물다 보면 사람이 쓸쓸해진다.



가끔 커다란 통에 든 아이스크림을 사고 싶을 때도 있다. 분명 혼자서 다 먹지 못할 것이 뻔하지만, 작은 것으로 타협하고 싶지 않은 날. (구구콘으로 안 돼. 구구 크러스터여야만 해. 숟가락으로 푹푹 퍼먹고 싶다구)

굳이 통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가서 몇 숟가락 못 먹고는 그대로 냉동실에 넣는다. 냉동실 음식들이 으레 그렇듯 한참을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나서 보면... 그새 딱딱하게 굳어 있다. 아이스크림을 푸려고 했을 뿐인데 아끼는 스푼이 휘어버렸을 때. 그런 순간이 나는 괜히 외롭고 서럽다. 어떻게 아이스크림이 변하니. 아, 원래 아이스크림은 쉽게 변하는구나. 쉽게 녹고, 쉽게 얼지. 나는 왜 그런 나약한 걸 좋아해서는.


이 이야기를 누구누구한테 했었더라. 아마 술 취해서 아무 말이나 하던 중이었겠지. 언젠가 술을 함께 마셨던 이중 하나가 뜬금없이 블로그 링크를 보냈다. ‘생활 정보: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 보관하는 법’


✔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을 냉동실에 보관할 때 지퍼백에 넣어 공기를 차단하면 나중에 다시 꺼냈을 때 새 것처럼 부드러운 상태로 먹을 수 있다.
✔ 이미 딱딱해져 버린 아이스크림은 따뜻한 물로 데운 숟가락으로 퍼 먹으면 된다.


따뜻하게 데운 스푼으로 딱딱하게 굳은 아이스크림을 퍼먹을 때마다 걔 생각을 한다. ‘이런 시답잖은 술주정을 기억하다니. 참 다정한 사람이네.’ 언젠가 아이스크림 한번 사줘야지 싶었는데. 별일 없이 멀어져 아직 못 사줬다...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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