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율의 의미

단호한 약속이 필요한 때

by 웅환

나는 현재 가치 단절 상태에 있다.


내 인생에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생각만 하고 실천으로 옮기지 않으면서 그 가치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상태가 가치 단절 상태이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 삶의 어느 부분에서 나의 가치를 가장 잘 실현했던가?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 삶의 구간은 군대였다. 그래서 기억의 태엽을 감아 나의 군 복무 시절을 재생해 보았다.


미국 영주권 소유자인 나에게 군 복무는 선택이었고, 여러 이유에서 나는 자진 입대를 선택했다. 훈련소에 입소하던 7월의 뜨겁던 논산부터 전역을 명 받고 위병소를 지나쳐 걸어 나가는 1월의 차디찬 새벽을 맞이하기까지 단 한순간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 어떤 것 하나도 나의 의지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 곳이었고, 내가 살아오며 겪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정신적 고통을 이곳에서 경험했다. 그럼에도 군대에서 보낸 시간이 내 인생에서 보낸 가장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분명한 수면 및 기상시간과 규칙적인 식사 습관은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꾸는 데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준비물이다. 마크 저커버크는 매일 색과 디자인이 똑같은 옷을 입고 일정을 소화하는데, 이는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하며 소모되는 에너지와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군대는 이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장애물들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버린다. 모든 군인들은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고, 씻고, 밥을 먹는다. 그들은 똑같은 머리와 똑같은 옷, (거의) 똑같은 얼굴을 한 수십 명의 동나이대의 남성들에게 둘러싸인 채 똑같이 주어지는 일과를 수행한다. 부족하거나 없는 의류, 물품들은 알아서 보급되고, 유흥과 음주의 자유가 완벽하게 차단되어 한 눈을 팔 겨를이 생기지 않는다.


자잘한 일상의 고민들이 사라진다. 복무일수가 늘어갈수록 반복되는 일상은 하던 일을 더욱 쉽게 만든다. 흔히 말하는 "짬"이 찰 수록 하는 일들이 쉬워지고 익숙해지면서 여유를 갖게 된다. 그러면서 정신적 잉여 에너지가 생긴다. 매일 하는 삽질과 장비 손질, 막사 청소 외에 더 중요한 것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내게 주어진 이 "자유"를 토대로 나는 내 인생을 180도 바꾸었다. 추구할 목표들을 세우고 달성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관과 가치들을 전부 갈아치우고 새롭게 스스로를 고쳐 쓰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를 살아가게 할 가치들을 정한 그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실패도 많았지만, 성공적으로 계획을 이행하는 일수가 점차 쌓여갈수록 나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실패는 두렵지 않았다. 계획을 이행하지 않는 게 실패였다. 잃을 것도 없었기에 도전하기 위한 용기가 따로 필요 없었다. 심기를 건드리는 이가 있을 때는 전역 후에는 볼일 없을 사람이라며 측은함 한 조각을 툭 던지고서는 우직하게 나의 갈 길을 닦아나갔다.


그렇게 나를 끊임없이 움직였던 힘의 원천은 "규율"이었다. 타인이 짜놓은 일상의 틀 안에 나를 억지로 욱여넣고 꾸역꾸역 살다 보니 규칙이 생겼고, 반복을 통해 습득한 요령을 토대로 나에게 더 의미 있는 무언가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틈이 생겼다. 민간인이 되어 다시 미국에서 공부를 이어나가고 있는 현재의 나는 규율이 없다. 눈이 감기는 시간이 취침시간이고, 배가 고플 때가 식사시간이다. 옷장의 옷들은 제각각 다른 색깔과 형태이며,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인터넷의 유혹에 때때로 속아 넘어간다. 언제 무엇을 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약속해 보아도 며칠을 못 간 채로 흐지부지 되기 일쑤다. 단순히 군 복무를 하고 있지 않아서, 옷장 안의 옷들이 다 같은 색과 디자인이 아니어서일까?


미국에서의 표현의 자유, 한국에서의 존댓말처럼 군의 규율은 당연히 어겨서는 안 되는 하나의 진리다. 즉, 기상시간에 제때 일어나지 않고, 취침시간에 수면 상태가 아닌 군인들은 규율을 어기는 것이 된다. 이런 단호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조직은 군대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기본 중에 기본인 부분이다. 하지만 내 삶에는 규율이 존재하지 않는다. 계획했던 시간보다 30분 늦게 기상한다고 해서 곤경에 처하지 않는다. 자기 전에 휴대폰을 사용한다고 심각한 면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슨 옷을 입든, 어떤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든, 아무도 내게 간섭할 권리가 없고, 그렇게 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무슨 행동이든 나에게 정당화만 된다면 이행될 수 있다. 군대의 엄격한 규율들은 내게 의미 있는 목표들을 추구할 자유를 부여했고, 미국에서 주어진 엄격한 자유는 목표를 이룰 수 없게 막는 삶의 족쇄가 되어 나를 옭아맨다.


모순이다. 혹은, 부정할 수 없는 비극이다.


삶은 목표만 좇는 경주가 아니다. 그렇기에 군 복무 시절 경험한 발전이 내게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와 이런 뜻을 함께 하지도 않는 후임들을 끊임없이 지시하고 부추겼던 것 같다. 타인과 나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고, 내 갈길을 막거나 발전을 늦추는 사람들을 전부 적으로 돌리고 배척했다. 내 기준에서 생산적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 이들을 딱하게 여기고 나 자신과 비교하며 계획을 성실히 이행하는 스스로를 드높이기 바빴다. 그렇다고 목표가 주는 압박감을 회피하고 자유를 부르짖으며 세상을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하다. 지금 내가 그렇다. 하릴없이 삶을 표류하며 들이닥치는 과제와 반드시 넘어야만 하는 일상의 파도를 겨우 넘기며 살아가는 중이다. 규율이 존재하지 않는 하늘 아래서 질서를 세우려 하고 있다.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 내가 찾을 수 있는 해법은 나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엄격한 규율을 세우는 것이다. 마음가짐부터 달리 해야 한다. 내가 세운 규율을 지키지 못한다면 나 조차도 존재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 자유를 빌미로 규율 위반을 정당화하는 것은 곧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라는 생각. 또렷하게 상기시키고 다짐해야 할 것이다. 아마 그것이 내 삶을 의미 있게 가꿀 수 있는 길이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타의로 제어받는 삶은 비참하지만, 나의 선택으로 스스로를 제어하는 삶은 아름답다. 꾸준히 브런치에 기고를 하며 자의적 규율이 어떤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지 기록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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