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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Sep 16. 2023

동양을 앞서는 서양

서양의 과학기술과 경제성장

왜 어떤 나라는 부유하고, 어떤 나라는 가난한가?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었나? 어린아이나 할 법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는 역사학과 경제학의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었다. 많은 학자가 답을 내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를 구분해야 한다. 이건 별로 어렵지 않다. 부유한 나라는 대부분 서양에, 가난한 나라는 주로 동양에 분포한다. 서양이 더 부유한 이유도 이미 알고 있다. 현대 인류문명의 토대인 과학기술을 서양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삶에 필요한 생산력과 고품질의 생활양식 구현에 과학기술은 필수다. 당장 지금 쓰고 있는 의복, 집, 먹거리, 조명, 자동차, 스마트폰, 인터넷, TV 등을 생각해보라. 이 문명의 이기들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멀리 잡으면 16세기 과학혁명에서부터 축적되어 온 혁신의 집약체다.


그런데 서양이 늘 우세했던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동양의 과학기술이 서양보다 뛰어났다. 중국 4대 발명품이라는 종이, 화약, 인쇄술, 나침반이 대표적이다. 이것들은 고대 인류문명이 성립하는 기반기술과도 같았다. 천문학도 중국이 서양에 비교 불가로 앞서 있었다. 중국에서 천문학은 제왕의 학문으로서, 통치의 정당성은 하늘의 움직임과 직결되었다. 그래서 국가가 선발한 우수 인재들이 역법 개발과 기구 제작에 대거 투입되었다. 천문 관측이 국책사업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그 결과 상당한 관측자료가 축적되었다. 적어도 근대 이전의 일식과 월식, 혜성, 초신성 등에 대한 관측 기록은 서양보다 중국이 훨씬 신뢰할만하다. 이뿐만 아니다. 의학, 기상학, 수학, 농학 등에서도 중국은 동시대의 서양보다 높은 수준에 있었다. 특히 11세기의 송나라는 국방에는 취약했으나 문화적으로는 번영을 누렸다. 이때 새로운 벼 품종이 도입되어 농업생산력이 크게 늘었고, 천문학을 필두로 한 과학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16세기라는 분기점

     

그럼 서양은 언제 동양을 추월한 것인가? 이에 대해 경제학자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은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그는 기원후 1년부터 2000년까지 전 세계 국가들의 1인당 GDP를 계산했다. 이 기간 세계의 1인당 GDP는 총 14배 증가하는데, 이전까지는 큰 변화가 없다가 11세기를 기점으로 급증한다. 매디슨은 이것이 유럽이 세계의 성장을 주도한 결과라고 본다. 특히 16세기 유럽이 대항해시대에 돌입하고, 산업혁명을 거친 영국이 패권국가가 되면서 세계의 실질 소득이 크게 늘어난다는 설명이다. 지역별 분석 결과를 보면 실제로 1500년경부터 유럽의 1인당 GDP가 중국을 앞지르는 것이 확인된다. 1820년에 이 차이는 2배 이상으로 벌어진다. 동양은 이걸 다시는 만회하지 못했다. 물론 매디슨의 작업이 워낙 넓은 범위를 포괄하다 보니, 추정치의 정확성 논란은 있다. 그러나 세계경제사 연구에서 여전히 가장 많이 인용되는 데이터임은 분명하다. 매디슨의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중세까지 뒤처졌던 서양이 16세기에 동양을 앞지르고, 19세기가 되면 동양의 역전이 불가능해진다는 것.

앵거스 매디슨의 세계경제 통계는 이미 16세기부터 서양과 동양의 소득 수준 차이가 꽤 벌어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서양이 동양을 추월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다. 그 초점은 동양에 없었던 서양만의 역사적 발전 요소가 무엇이었는가로 집중된다. 여기서는 매디슨이 규명한 16세기라는 분기점을 기준으로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근대과학이고, 둘째는 자유사상이다. 이 두 가지야말로 서양 고유의 특징이면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원천이었다.


16세기 서양에서 중요한 사건은 역시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다. 이 개념은 1949년 영국의 허버트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가 제기해서 유명해졌다. 그에 의하면 과학혁명은 고대에서 중세까지 이어진 자연관을 전복했기 때문에 혁명이다. 서양은 과학혁명을 통해 비로소 세계사를 주도하게 되었다. 버터필드의 설명이다.

     

그것(과학혁명)은 형이상학에서도 인간의 사고 습성을 바꾼 동시에, 물리적 우주의 전체 도식과 인간 삶 자체의 질감을 바꾸어 놓았다. 이 혁명이 근대 세계와 정신의 실제적 기원으로 드러남으로써 유럽사의 관습적 시대구분을 시대착오적으로 만들었다.

     

이전까지 서양인들의 자연 이해는 철학적 사유에 기초했다. 이러한 자연철학은 인간의 관념 속에 거대한 자연의 체계를 추상화하여 그 본질과 운동을 밝히려 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운동이 뚜렷한 목적을 갖는다고 했는데, 이로써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신학과도 연결되었다. 중세까지 자연의 탐구는 곧 성서나 고전을 읽고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었다. 진리의 정당성은 신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선지자들이 담보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공자왈, 맹자왈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천문학, 물리학, 의학 등이 모두 그러한 방식으로 연구되었고, 과학자는 철학자나 신학자와 구분되지 않았다.

중세에서 자연에 대한 탐구는 조선 시대 양반들이 공자왈 맹자왈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실용적 자연관과 경험주의

     

과학혁명은 이러한 자연관을 무너뜨리고 자연과학이라는 새로운 지식체계를 세웠다. 그것은 목적론보다는 기계론, 즉 자연을 유용한 기계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했다. 기계론에 따르면 자연은 그저 물질들의 객관적 조합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에 가져야 할 질문은 “왜(why)?”가 아닌 “어떻게(how)?”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지만, 거리에 따른 힘의 크기를 계산만 했을 뿐, 그 원인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메커니즘이다. 자연의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인간에게 유용하도록 조작할 수 있다. 베이컨은 이러한 적극적, 실용적인 자연관을 설파했다. 그에게 지식의 가치는 자연에 개입해 인간 삶을 나아지게 하는 것에 있었다. 과학이 담지하는 진보의 지향은 이러한 베이컨의 자연관에서 기인한다.


과학혁명의 선구자들은 자연철학의 사변성을 배격하고 실험과 관찰의 방법론을 내세웠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고 뭐고 내 알 바 아니고, 직접 모든 걸 확인하겠다는 경험주의를 견지했다. 이는 비단 과학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항해시대, 신대륙 발견, 문명 교류의 본격화로 기존에 없던 지식이 쏟아지는 사회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과학 연구의 주체도 다양해졌다. 과학의 민주화, 대중화가 일어난 것이다. 본래 자연철학은 귀족과 식자층의 학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전들이 죄다 라틴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코페르니쿠스조차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를 라틴어로 썼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에서는 경전보다 실험이 더 각광받았다. 망원경을 만드는 뉴턴, 시체를 해부하는 하비, 별을 관측하는 케플러 등이 새로운 과학자의 전형을 보였다. 이때 쓰인 기구들은 과학의 수단으로만 종속되지 않고, 실험 방법론 확립의 주역이 되었다. 이로써 불과 몇십 년 내에 실험이 과학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근대의 과학자들은 중세의 식자층과 달리 장인과 기술자를 천히 여기지 않았으며, 기꺼이 그들로부터 배우고자 했다. 학자들이 탄광에 들어가 흙먼지를 뒤집어쓰거나 손에 화학약품과 피를 묻히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라는 다 빈치도 과학자와 예술가의 협업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마찬가지로 코페르니쿠스와 함께 과학혁명의 포문을 연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는 화가 반 칼카르의 정교한 해부도가 없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과학의 이론은 장인, 기술자, 예술가, 외과의 등의 숙련 기술과 결합하며 눈부시게 발전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과학자와 예술가의 협업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화가로서 그가 그린 인체해부도는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에 중대한 아이디어를 주었다.



     

과학과 기술의 연결

     

요컨대 과학혁명은 과학 자체의 위상과 성격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기존의 과학이 철학에 가까웠다면, 근대부터는 기술에 훨씬 가까워졌다. 오늘날 과학기술이라는 말은 당연하게 들린다. 그런데 연원을 따져보면 별로 당연하지 않다. 과학과 기술은 별개의 전통을 갖기 때문이다. 두 전통이 합쳐지는 것은 과학혁명이 초래한 자연관과 방법론의 변화 때문이었다. 이것이 18세기 산업혁명의 지적 기반이 되었다. 다만 이 과정이 흔히 생각하듯 과학적 발견을 기술이 응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의외로 과학의 이론적 발전이 산업혁명에 직접적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이 한층 가까워진 것은 분명하나, 그 연결의 형태는 간접적이고 모호했다. 그것은 과학적 방법의 공유과 인적 연결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우선 기술자들이 과학의 방법을 수용했다. 즉 기술자들이 과학적 연구 방법, 실험적인 분석 태도를 통해 기존 기술을 혁신할 수 있게 되었다. 와트의 증기기관 개량도 이런 경우였다. 와트가 의뢰받은 뉴커먼 증기기관을 그저 수리만 했다면 혁신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기계의 구조와 시스템을 분석하고, 열효율 문제의 원인을 파악함으로써, 분리형 응축기라는 기술적 대안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여기에 고도의 수학이나 과학 이론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기존 데이터를 귀납적으로 분석하여 더 효율적인 조합으로 재구축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기에는 이 정도만으로도 상당한 기술혁신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과학 지식을 매개로 과학자, 기술자, 기업가 등이 활발히 교류했다. 근대 과학의 꽃을 피운 뉴턴주의자들은 과학과 기술을 그렇게 딱 떨어지게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식으로 현실의 개선을 이뤄야 한다는 베이컨의 과학관에 따라, 이론적 탐구는 물론 기술의 개발과 혁신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산업혁명의 동력이 되었던 계몽주의는 바로 이러한 실용적 배경을 두고 있었다. 흔히 산업혁명의 지적 기원으로 꼽히는 루나 소사이어티가 그 전형이었다.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과학자, 사업가, 교수, 의사, 수리기사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가졌지만, 과학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매개로 교류했다. 그리고 여기서 근대를 만든 다양한 발명과 사상들이 나올 수 있었다. 와트의 증기기관만 해도, 그가 이 모임에서 윌킨슨을 통해 알게 된 배럴 기계가 아니었다면, 개발이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루나 소사이어티는 18세기 영국의 지식인 모임이다. 구성원들의 직업은 다양했지만, 과학 애호가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이들의 공동연구로 근대의 기반이 된 지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자유사상의 폭발력

     

이렇게 성숙한 과학기술 역량과 산업 조건은 자유사상과 공명하며 경제성장으로 폭발했다. 자유사상은 정치적으로는 자치, 경제적으로는 자립을 지향한다. 이미 많은 학자가 서양이 동양보다 앞선 결정적 이유로 자유사상을 꼽는다. 이러한 논의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꽤 오래전부터 서양에 자유의 전통이 있었다는 점이다. 즉 근대 시민혁명 훨씬 이전, 고대 그리스·로마의 화폐경제와 무역에서도 그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중세에 암흑기를 맞았던 자유사상은 10~11세기 이탈리아에서 부활했다.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아 등의 도시국가들은 지중해 무역의 거점으로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공화정으로 운영된 이 국가들의 시민들은 상당한 자유를 누렸고, 영리기업, 장인조합, 병원 등의 자치단체들이 발달했다. 이 자치단체들이야말로 근대 자유사상을 확산시킨 동력이었다. 이들의 활동으로 상업과 무역은 물론, 관련 제도도 크게 발전했다. 재산권 보호와 계약의 의무를 명시한 상법, 영속적 기업 활동을 보장하는 법인, 자본조달과 위험분산에 적합한 주식회사 등이 그 예다. 자치단체 간 경쟁이 심화하면서 회원들의 안전과 권리를 보호해줄 정치적 기구도 필요로 하게 되었다. 7개 자치주가 연합한 네덜란드 공화국이 그렇게 결성되었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분산된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추월해 유럽 경제를 주도했다. 뒤이어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국민국가 체제를 완성한 영국이 패권을 잡았다. 이렇듯 자유사상에 기초한 중세 말, 근대 초의 자치단체들은 현대 자본주의로 발전해나가는 원형이 되었다.


지식사회로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자치단체의 역할은 중요했다. 이 시대의 자본 축적은 단순히 물적 자본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성장은 르네상스와 인쇄술 혁명이라는 지적, 문화적 배경도 함께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역으로 돈을 번 부자들은 인쇄술이 찍어내는 엄청난 양의 책들을 사들였다. 자연히 새로운 사상에 개방적인 문화가 형성되고 토론도 활성화되었다. 그러자 지식인들도 몰려들었다. 코페르니쿠스와 하비는 파도바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갈릴레이는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으며 수석 과학자로 연구했다. 그즈음 유럽에 형성된 편지공화국은 지식인들의 유대와 교류를 더욱 긴밀히 했다. 이 또한 계급과 신분보다는 공통의 관심사로 이어지는 자유사상의 전통에 있는 것이었다.

근대 실험과학의 대부인 갈릴레이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든든한 재정 지원을 받으며 전업 과학자로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특히 장인조합은 과학혁명에서 산업혁명을 잇는 지식의 거점이었다. 이곳에서 숙련된 기술자들이 축적한 노하우는 과학자와의 협업을 통해 기술혁신으로 증폭되었다. 12세기말부터 출현한 대학도 장인조합에서 비롯되었고, 여기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기술자들이 사회로 퍼져나갔다. 또한 과학혁명 이후에는 분야별로 전문화된 지식인들이 과학단체를 결성했다. 이러한 단체의 목적은 새로운 사상의 발견과 공유였고, 이는 오늘날에도 과학 발전을 주도하는 학회로서 기능하고 있다. 요컨대 이 시대의 유럽에서는 물적 자본뿐만 아니라 인적 자본과 사회 자본도 함께 축적되었고, 이것이 산업혁명과 경제성장을 촉발하는 트리거가 되었다.



     

서양과 동양의 운명이 갈린 1776년

     

과학혁명, 산업혁명, 경제성장은 매디슨의 통계에서 보듯 16세기 이후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가른 핵심 사건들이었다. 이는 아주 긴 시간대를 거치며 진행되어 단기간에 극적인 변화가 포착되지 않는다. 그만큼 특정 시점, 또는 계기가 결정적이었다고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어떤 기준에서 봐도 1776년이 상징적인 해였음은 분명하다. 이 해 『국부론』이 출간되었고, 개량된 증기기관이 시장에 등장했으며, 미국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 세 가지는 서양과 동양의 가장 큰 차이였던 과학기술과 자유사상의 결정판과도 같은 사건들이었다. 이로써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불이 댕겨지고, 근대라는 새 시대가 열릴 수 있었다. 그 선구자인 세 사람, 스미스, 와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루나 소사이어티의 회원이었다는 것. 세 사람은 과학자, 기술자, 기업가들의 연대를 상징한 이 모임에서 활동하며 역사를 바꿀 성과들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것은 이 모임이 지향한, 새로운 지식에 대한 적극적 수용이라는 기조 덕분이었다. 공통의 관심사로 묶인 이 개인들에게 전공 분야나 국적은 별로 중요한 기준이 아니었다. 심지어 식민지 출신이었던 프랭클린은 이 모임에서 모국인 영국에 비수를 꽂을 지식체계를 갖추기까지 한다.

 

둘째는 과학자가 아님에도 과학에 조예가 깊었다는 것. 스미스는 재무장관 찰스 타운센드의 부탁을 받고 그 아들의 견문을 넓혀주고자 함께 프랑스를 여행했다. 이때 중농주의 경제학자 프랑수아 케네(François Quesnay)를 만났다. 중농주의(physiocracy)는 영어 이름에서 보듯 생리학(physiology)에 기초한 경제학 사조였다. 의사 출신 케네는 체액이 원활히 순환하면 인체가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듯, 정부 통제를 줄이고 자연법 체계에 경제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감명을 받은 스미스는 과거 『도덕감정론』에서 정립한 이기심 개념과 중농주의의 자유방임 논리를 결합해서 『국부론』을 저술했다. 수리기사였던 와트도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증기기관 개량의 단서를 얻었고, 프랭클린은 일찍부터 전기에 관심을 가져 번개 실험도 해보았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쓸 때는 『프린키피아』의 논리 구조를 적용하여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절대적 진리로부터 도출되는 것으로 보이도록 구성했다.

스미스는『국부론』에서 자유방임원리와 인간의 이기심을 결합했다. 이것이 곧 경제학의 시작이며, 자본주의의 근간이다.

서양이 혁명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동양은 큰 변화 없이 체제를 유지했다. 한때 앞서 있었던 중국의 과학기술은 지식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자유사상의 전통 또한 없었다. 반면 전제군주제와 농업이 정치경제체제로서 오래 지속되었다. 도시는 자치권을 가질 수 없었고 경제적 자유보다는 행정적 필요에 따라 운영되었다. 그리고 모든 산업을 정부가 통제했다. 장인은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기술혁신의 동기가 부족했고, 장인조합 같은 자치단체도 만들지 못해서 기술이 제대로 이전되거나 교육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맞은 1776년은 마침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져 온 청나라의 전성기가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이 시점에서 서양은 동양을 확실히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 뒤,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중국에 승리를 거두고 인도를 식민지화함으로써, 서양의 우위는 역전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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