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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Sep 05. 2023

기계가 인간을 자유케 하리라

루나 소사이어티와 산업혁명의 기원

인간의 삶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기반을 이룬다. 그중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꼽을 수 있을까? 인류의 긴 역사만큼이나 특정 사건을 뽑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산업혁명은 꼭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인류가 영위하는 삶, 생활양식의 원형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산업혁명은 수 세기에 걸쳐 일어난 장기적 변화다. 몇몇 개념과 명제들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문명사적 의의가 한 가지 있다. ‘인간의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기 시작했다’라는 점이다. 오늘날 기계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다. 우리는 별의별 첨단 기술이 탑재된 기계를 한 몸처럼 여기며 삶을 꾸려가고 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의 원초적 형태를 산업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부터 인류는 엄청난 자유를 얻고, 거기서 생긴 여유를 다른 활동에 투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산업혁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다양한 방법으로 이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다.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가 설명하듯 산업혁명은 산업과 기술은 물론 경제, 사회, 교육, 정치 등의 변화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지식인들의 역할이다. 산업혁명이 혁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전에는 듣도 보도 못했던 혁신적 지식 때문이었다. 이것이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발명품을 만들어냄으로써 혁명을 발화시켰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지식의 생산자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중세 말 유럽에는 이미 편지공화국이라는 지식 공유 네트워크가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산업혁명을 촉발한 지식들도 이를 매개로 퍼지고 또 응용되었다. 이러한 연결과 증폭의 과정을 통해 토인비가 말한 총체적인 사회 변화로 확대될 수 있었다.



     

루나 소사이어티에 모인 지식인들

     

그 중심에 영국의 도시 버밍엄이 있었다. 버밍엄에는 일찍부터 철강 산업이 자리 잡았고, 현대에는 자동차와 기계 공업이 발달했다. 문화예술의 전통도 깊다. 레드 제플린(Led Zeppelin)과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를 배출한 헤비메탈의 본고장이며,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톨킨도 이곳에서 성장했다. 즉 버밍엄은 영국의 소프트 파워를 대표하는 도시다. 이 도시가 오래전부터 분야를 막론하고 지식과 인재가 모이는 거점 역할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8세기 중반 매튜 볼턴(Matthew Boulton)은 이곳에서 철물 사업을 하면서 소호 제작소를 운영했다.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공장이었다. 원자재 창고부터 설계실, 주물작업장, 조립작업장, 완제품 창고, 전시실 등을 하나의 공간으로 집약했다. 역사학자들은 소호 제작소를 근거로 버밍엄을 최초의 산업 도시로 보기도 한다. 현대의 복잡한 산업 공정이 이를 모델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이런 형태의 작업을 구상했다는 것에서 볼턴의 비범함을 엿볼 수 있다.

루나 소사이어티 모임이 열린 소호 하우스는 오늘날 버밍엄을 대표하는 관광지 중 하나다.


실제로 볼턴은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라 과학자이자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당대의 지식인들을 초대하여 교류하기를 즐겼다. 볼턴의 집인 소호 하우스가 만남의 장소였다. 그런데 그저 친목 모임이라고 하기에는 참석자들의 면면이 엄청났다. 산소를 발견한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제철업의 혁신을 이끈 기계공학자 존 윌킨슨(John Wilkinson),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이자 의사 이래즈머스 다윈(Erasmus Darwin), 영국 최대의 도자기 사업가 조사이어 웨지우드(Josiah Wedgwood) 등이었다. 


이들이 18세기 버밍엄에 모인 데에는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당시 영국은 주철 기술이 한창 발달하고 있었다. 주철 공정의 핵심은 1,500℃가 넘는 고온의 유지다. 볼턴의 집에 모인 이들은 고온을 다루는 이 고도의 기술과 관련이 있었다. 프리스틀리는 연소 실험을 했고, 윌킨슨은 제철 관련 다수의 특허를 보유했으며, 웨지우드는 서양에서는 최초로 도자기를 자체 생산했다. 그리고 이들은 과학을 진지하게 탐구함으로써 사회의 진보를 꿈꾸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따라서 모임의 주제는 주로 과학에 대한 것이었고, 밤늦게까지 계속되기 일쑤였다. 가로등이 없던 시대라서 모임 후 귀갓길이 너무 어두웠다. 그래서 보름달이 뜨는 날에 모임이 열렸다. 이런 이유로 이 모임에는 루나 소사이어티(Lunar Society)라는 낭만적인 이름이 붙었다. 우리말로는 달빛 친목회, 만월회 등으로 번역된다.


1774년 볼턴은 몇 해 전 알게 된 동업자를 모임에 참석시켰다. 동업자는 글래스고에서 살았으나 볼턴과 일하면서 버밍엄에 왔고, 루나 소사이어티에도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가 바로 제임스 와트(James Watt)이다. 흔히 와트는 증기기관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증기기관에는 와트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와트는 기존 증기기관의 효율을 크게 높여서 산업에 널리 쓰이도록 기여한 인물이다.



     

와트와 증기기관의 혁신

     

원래 와트는 글래스고대학교의 공업사에서 일하던 수리기사였다. 18세기쯤 되면 과학의 실험도구들도 전문화되어 관리인력이 필요했다. 와트도 컴퍼스, 눈금자, 사분의 등을 만들고 수리하는 업무를 했다. 1763년 자연철학 교수 존 앤더슨(John Anderson)은 수업 때 사용하던 뉴커먼 증기기관의 수리를 와트에게 의뢰했다. 18세기 초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이 만든 증기기관은 기존의 어떤 모델보다도 성능이 뛰어났다. 사람 25명과 말 10마리가 일주일 동안 하던 일을 단 하루 만에 해냈다. 그러나 열 냉각 시 에너지를 많이 잃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석탄으로 물을 데워 증기를 발생시키고, 다시 차가운 물로 증기를 식혀 피스톤을 운동하게 만드는 방식 때문이었다. 이렇게 굳이 데운 물을 다시 식히는 과정에서 열이 낭비될 수밖에 없었다.


와트도 곧바로 이 열효율 문제를 파악했다. 와트는 기계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탄탄한, 과학자의 면모가 강한 기술자였다. 당시 대학의 수리기사는 1년짜리 계약직이었다. 급여도 적고 교수가 그려준 도면에 따라 제작과 수리를 했다. 그러나 와트는 단순 작업만 반복하는 수리기사가 아니었다. 그는 독학으로 상당한 과학 지식을 갖췄고, 같은 대학의 교수이자 석학이었던 조지프 블랙(Joseph Black)과도 교류했다. 이런 능력을 인정받아 와트는 교수들의 기술 컨설턴트 역할도 했다. 


와트는 여러 실험을 거쳐 뉴커먼 증기기관의 개선 방안을 찾아냈다. 요지는 피스톤 실린더를 교대로 가열 및 냉각하는 비효율적인 과정을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증기를 실린더 안이 아니라 외부의 응축기에 모아서 압축시키고, 피스톤을 대기압이 아닌 증기압으로 움직이는 방식을 고안했다. 이렇게 하자 응축기만 냉각되고 실린더의 열은 보존되어 열효율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증기압을 이용해 작은 기계로도 큰 힘을 내게 되었다. 이는 블랙의 조언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와트는 100℃의 물이 증기로 변하면서 강한 열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블랙을 찾아갔다. 그러자 블랙은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이 발견한, 물질의 상태가 변화할 때 발생하는 열의 이동 현상을 설명해주었다. 이렇듯 와트의 혁신은 수리 경험은 물론 평소 알던 과학적 지식에 의해 가능했다. 때마침 캐런 제철소의 존 로벅(John Roebuck)도 와트의 연구에 투자를 결정했다. 로벅의 지원에 힘입어 와트는 1769년 1월 새로운 증기기관의 첫 특허를 낼 수 있었다.

와트는 같은 학교 동료 교수인 블랙으로부터 "온도가 일정할 때 기체의 압력은 부피에 반비례한다"는 보일의 법칙을 전해 듣고, 이를 증기기관에 응용했다.


다만 실용화는 쉽지 않았다. 와트의 새 기관은 당시 쓰이던 어떤 것보다 훨씬 큰 압력의 증기를 이용했다. 따라서 피스톤과 실린더 사이에서 증기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패킹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캐런 제철소의 공작 기술로는 이게 불가능했다. 실린더, 피스톤, 나사, 기어 등의 규격을 서로 정밀하게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던 로벅은 1773년 파산하고 말았다. 와트에게는 심각한 타격이었다.


볼턴이 와트와 만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볼턴은 급증하는 철물 주문량을 감당할 수 없어서 생산 방식의 혁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와트의 증기기관에 주목했고, 채무를 처분해주는 대가로 지분을 받았다. 역사에 길이 남을 동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와트는 스타트업, 볼턴은 엔젤투자자였던 셈이다. 둘은 연계 플레이로 서로를 보완해주는, 손흥민과 해리 케인(Harry Kane)을 방불케 하는 영혼의 콤비였다. 동업 시작 후 볼턴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증기기관의 특허 연장이었다. 원래 영국의 특허 보호 기간은 14년이었고, 와트를 만났을 때는 이미 6년이 지나 있었다. 볼턴은 의회에 로비하여 이를 무려 1800년까지 연장했다. 경쟁업체들이 모두 반발한 엄청난 특혜였다. 이후 와트는 수직운동뿐만 아니라 회전운동까지 가능한 증기기관을 만들어냈고, 1785년까지 다섯 개의 특허를 더 냈다.

증기기관을 개발한 와트-볼턴의 콤비네이션은 손케 듀오의 환상적인 연계 플레이와 닮았다.


와트는 볼턴과 협업하여 기술적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볼턴의 소개로 나간 루나 소사이어티에서 윌킨슨이 발명한 배럴 보링 기계를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 이것이 오랫동안 막혀 있던 패킹 문제에 돌파구를 열어주었다. 윌킨슨은 원래 대포를 정밀하게 깎기 위해 이 기계를 만들었으나, 와트는 실린더 블록의 가공에 사용했다. 이로써 와트가 오랫동안 구상해온 새로운 증기기관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마케팅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볼턴은 갓 출시된 증기기관에 찰떡같은 카피를 붙였다. "온 세상이 갖고자 하는 힘, 저는 그걸 팝니다(I sell here, sir, what all the world desires to have―POWER). "



      

증기기관이 일으킨 연쇄 효과

     

1776년 마침내 와트의 증기기관이 시장에 등장했다. 같은 양의 석탄을 썼을 때 와트의 증기기관은 뉴커먼의 것보다 무려 3배 더 오래갔다. 소형 제작이 가능하다는 점도 큰 장점이었다. 뉴커먼 증기기관은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주로 탄광에서 쓰였다. 그러나 소형화한 와트의 증기기관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제분기와 직조기 등의 기계는 물론, 수레나 배의 동력원으로도 쓸 수 있었다. 연료인 석탄도 마찬가지로 이동이 쉬웠다. 그러니까 증기기관과 석탄만 갖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쉽게 동력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이 의미는 대단히 중요했다. 인간의 생활 영역에서 이루어지던 크고 작은 노동을 기계가 대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와트 증기기관은 불티나게 팔렸다. 그뿐 아니라 이를 흉내 낸 짝퉁들(와트 특허를 피해 만든 유사품들)도 덩달아 판매량이 올랐다. 요즘 말로 하면 기존 시장 질서를 재편한 와해성 기술이면서, 다양한 응용을 가능케 한 기반 기술이었던 셈이다.

런던의 Science Museum에는 와트의 실험실과 그가 만든 증기기관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영국이 와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박물관이 잘 보여준다.


증기기관의 진정한 혁신은 산업 전반에 일으킨 연쇄 효과에 있다. 당시 영국의 주력산업이었던 면공업이 가장 먼저 혜택을 보았다. 본래 면공업의 핵심기술은 수력 직조기였다. 그래서 공장이 강가에 많이 있었고, 물의 수급 상황에 따라 때로 공장이 멈추기도 했다. 그러나 증기기관의 도입으로 공장의 입지가 자유로워지면서 이런 문제가 없어졌다. 면공업은 증기기관을 기반으로 자동화, 대형화했다. 이것이 근대적 공장의 효시가 되었다.


제철업의 발전도 촉진했다. 이미 16세기에 영국은 해군의 대포를 청동에서 주철(무쇠)로 업그레이드해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이어 에이브러햄 다비(Abraham Darby)가 코크스 제조법을 개발해 세계적 주철 강국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탄소 함량이 높은 주철은 외부 충격에 쉽게 부러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18세기 후반 철에서 불순물과 탄소를 제거하는 기술들이 등장했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제철 용광로에 바람을 불어넣는 데 압도적 위력을 발휘했다. 새로운 제철기술과 증기기관의 결합은 영국의 철 생산량을 급격하게 증가시켰다. ‘산업의 쌀’이라는 철은 그렇게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보는 소재가 되었다.


이는 교통의 일대 혁신으로도 이어졌다. 증기선과 증기기관차가 등장한 것이다. 강력한 철과 소형화된 동력원은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는 탈 것에 적합했다. 물론 이전에도 원양 항해는 있었으나, 계절풍이라는 기후 여건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증기선은 자연의 도움 없이도 빠르고 안전하게 사람과 자원을 세계 곳곳으로 실어 날랐다. 때마침 건설업도 발전하면서 내륙 깊숙이 배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기차와 철도가 전 세계의 육지를 연결했다. 생산 자원은 물론, 문화와 지식의 교류도 크게 늘었다. 흔히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는 대항해시대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서로 존재조차 몰랐던 각 문명이 항로로 연결되어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게 되었다는 이유에서다. 철도는 그 세계사의 속도를 높이고 실체를 더욱 분명히 했다. 하지만 교통의 혁신으로 인류가 받은 가장 큰 혜택은 무엇보다 ‘시간’이었다. 나라 간 이동 시간이 몇 주와 몇 달에서 몇 시간과 며칠로 줄었다. 인류는 그렇게 번 시간을 다른 생산과 지식 활동에 투여함으로써 더 많은 문명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다.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와트를 두고 ‘시간의 발명자’라고 칭송한 이유이기도 하다.

와트와 볼턴은 2020년까지 영국 50파운드 지폐에 그려졌었다. 왼쪽 아래에 유명한 증기기관 홍보 문구 - 온 세상이 갖고자 하는 힘, 저는 그걸 팝니다 - 가 보인다.



     

근대를 만든 자유의 의미

     

근대 세계를 창조한 핵심 원리는 개인의 자유다. 왕정과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진 개인들의 자율과 창의가 근대 문명을 꽃피우는 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자유라고 하면 보통 정치적 자유를 떠올린다. 신분 또는 계급에 구속되지 않고, 내 삶을 내 마음대로 꾸릴 수 있는 자유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서 싹터서 시민혁명으로 완성된 이 자유 개념은 철학자와 사상가들, 그러니까 문과생들이 체계화해왔다. 그러나 근대의 형성에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물리적 자유다. 즉 자연 제약과 노동 시간에서 해방되어, 보다 생산적이고 고차원의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자유 개념이다. 이는 문과생보다는 이과생들이 만들어왔다. 와트는 그 대열의 선두에 놓일만한 이과생일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물리적 자유는 와트 혼자서 간단히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주입식 역사교육에서는 흔히 와트, 증기기관, 산업혁명, 근대의 시작을 한 세트의 키워드로 가르친다. 하지만 이런 단편적 암기로는 저변에 존재하는 다양한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것은 증기기관 탄생의 과학적, 집단적 배경이다. 물론 증기기관 개발에 과학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았다. 산업혁명의 주역은 과학자들보다는 와트와 볼턴 같은 기술자와 사업가들이었다. 그러나 와트와 볼턴의 본업이 과학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과학자의 면모를 갖춘 이들이었다. 이들이 모인 루나 소사이어티의 성격도 그러했다. 본업은 따로 있지만 과학을 사랑하고 탐구한 애호가들이 모여서 지식을 나누었다. 당시 영국에는 이와 비슷한 지식인 모임이 많았고, 이러한 아마추어 과학의 전통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 있었다. 만약 와트가 이 모임에서 아이디어를 얻지 못했다면, 그리고 앤더슨이나 블랙 같은 과학자들과 교류하지 않았다면, 증기기관의 혁신은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1785년 와트와 볼턴은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본업이 무엇이든 그들이 뉴턴, 다윈, 맥스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과학자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과학은 (뉴턴이나 다윈이 그랬듯) 대단한 발견을 통해 인류의 진보를 직접 이끌기도 하지만, 다양한 문명이 꽃피울 수 있는 지적 토양을 만든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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