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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Sep 26. 2023

전기문명의 장대한 서막

전자기학과 전기에너지의 일상화

자고로 전기와 자기는 신비한 현상이었다. 원거리의 두 물체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니, 옛사람들에게는 마법처럼 보였을 것이다. 최초로 전기에 대한 학문적 기록을 남긴 것은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Thales)다. 탈레스는 호박(먹는 거 말고 보석)을 양털로 닦으면 먼지가 달라붙는 현상에 의문을 품었다. 당시 과학으로 이러한 마찰전기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탈레스는 호박과 같은 무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해석했다. 이렇듯 인류는 전기라는 현상을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자기 역시 마찬가지다. 고대 중국의 발명품인 나침반이 바로 자기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침반을 쓰면서도 막상 그 원리는 몰랐다.


17세기가 되어서야 전기와 자기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시도되었다. 1600년 영국의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는 지구가 거대한 자석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침반의 철이 늘 북극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천문학자들도 이 주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걸로 달이 지구를 도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길버트는 전기를 자기와는 다른 유형의 현상으로 보았다. 호박을 문지르면 먼지는 끌어당기지만, 자석처럼 철을 끌어당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길버트는 이 끌어당김 현상을 electricus라고 했다. 그리스어 호박(elektron)을 라틴어로 쓴 것이다. 이것이 영어로 electricity, 즉 전기가 되었다. 이렇게 어원에서 보듯 전기는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1800년 알레산드로 볼타(Alessandro Volta)가 전지를 개발해 지속적인 전류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볼타 전지의 등장으로 전기가 과학의 실험 영역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윌리엄 길버트는 최초의 근대적 전자기학 연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지구가 커다란 자석이라는 획기적인 생각을 했다.



      

서로 연관되는 힘

     

그 무렵 과학자들은 어떤 힘을 다른 종류의 힘으로 바꾸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도에는 두 가지 배경이 존재했다. 첫째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독일의 자연철학자들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자연에 존재하는 힘들이 서로 연관되어 변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저 멀리 칸트에서 시작하여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로 이어진 이 사상은 자연을 거대한 유기체로 바라보는 낭만적 성향을 띠었다. 둘째는 증기기관이 주도한 산업혁명이었다. 따지고 보면 증기기관도 열을 에너지로 바꾸는 변환 장치나 마찬가지였다. 이 변환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 당대의 중요한 문제였다.


때마침 등장한 볼타 전지가 힘의 변환에 대한 탐구를 더욱 부추겼다. 전지에 전류가 흐르자 물질이 화학적으로 분해되는, 전기 분해 현상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기가 물리를 넘어 화학과도 연관이 있음을 시사했다. 그리고 1820년, 덴마크의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Hans Christian Ørsted)가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다. 전류가 흐르는 전선 주위에 있던 나침반의 바늘이 움직인 것이다. 전류가 자기 작용을 한다는 것을 최초로 보인 연구결과다. 이에 감명받은 토마스 요한 제베크(Thomas Johann Seebeck)는 열로 자기 현상을 만들어 내려 했으나, 엉뚱하게도 전기를 만들어 냈다. 이른바 열전 효과를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전기력과 자기력의 상호 연관성은 분명해졌다. 여기서 전자기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탄생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문학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낭만주의적 자연사상은 과학연구에서도 배경에 깔려 있었다.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는 전자기학의 최선두에 있었던 개척자다. 그는 직관력이 뛰어난 실험물리학자로서 화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 역시 독일 자연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전자기학의 또 다른 기수인 앙드레 마리 앙페르(André-Marie Ampère)의 동료이기도 했다. 앙페르는 두 개의 전선 사이에 작용하는, 자석처럼 서로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는 힘의 존재를 알아냈다. 이때 작용하는 힘에는 만유인력과 마찬가지로 역제곱 법칙이 성립했다. 즉 힘이 거리의 제곱이 반비례하고, 각각의 전류의 세기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앙페르는 이 중요한 발견을 수식으로 정리하여 패러데이에게 보냈다. 그러나 수학을 못 했던 패러데이는 대부분 이해할 수 없었다.


패러데이는 계산보다는 실험에 집중하였다. 그 결과 1821년 전기를 기계적 에너지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무명의 패러데이가 이런 일을 해내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다. 많은 학자가 전기로 새로운 동력 장치를 만들고자 했으나 별 진전이 없었다. 당시의 뉴턴주의적 사고에 의하면, 모든 자연현상은 구성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과 척력의 수학적 합으로 계산되어야 했다. 그런데 실제 실험에는 이 이론이 잘 들어맞지 않았다. 패러데이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두 힘의 작용을 인력이나 척력이 아닌, 원형으로 회전시키는 형태로 상정하여 실험한 것이다. 자석 주변에 철가루를 뿌리면, 둥근 모양을 이루는 것을 떠올려 보면 된다. 당시의 과학적 세계관에서 이런 원형의 힘 작용이라는 것은 매우 기묘한 것이었다. 그러나 패러데이는 이 발상을 전자기 회전 장치로 구현했고, 이것이 전기 모터의 원형이 되었다. 전기를 일상생활의 동력원으로 쓸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런 대담한 가정이 가능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패러데이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해서였다. 그는 요즘 말로 흙수저 출신이었다.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를 못 다녔다. 14살부터는 인쇄소의 제본공으로 일했다. 그러나 지식에 대한 의지만큼은 엄청났다. 제본할 책을 읽으며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러다 스무 살에 후일 왕립학회장이 되는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의 실험 조수로 채용되었다. 전기화학의 선구자 데이비는 모든 화학 결합의 본질이 전기력에 있을 거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패러데이는 데이비를 도우며 화학 실험에 대한 노하우를 익혔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패러데이에게 화학은 잘 어울리는 학문이었다. 수학보다는 실험과 직관력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데이비는 외르스테드의 실험에서 새로운 동력 장치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꿰뚫어 본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진작에 모터 개발에 나섰는데, 이걸 제자인 패러데이가 덜컥 먼저 성공해버렸다. 자존심이 상한 데이비는 패러데이가 자신의 연구를 훔쳤다고 단정했다. 패러데이는 데이비가 사망하는 1829년이 되어서야 전자기 연구를 재개할 수 있었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흙수저 제본공이었지만, 당대 최고 석학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뛰어난 과학커뮤니케이터이기도 했기에, 왕립연구소에서 크리스마스마다 어린이를 위한 대중 강의를 했다.



    

패러데이와 전자기 유도의 발견

     

1831년 패러데이는 자신은 물론 인류에게도 가장 중요한 업적을 냈다. 전자기 유도, 말 그대로 자기로부터 전기를 유도해내는 현상이다. 그 기원은 1820년의 외르스테드 실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실험의 중요한 함의는 전기가 자기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역으로 자기로 전기를 만들어 낼 수는 없나? 많은 학자의 관심사가 이것이었다. 물리학자란 기본적으로 세상을 대칭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라서 그렇다. 하지만 이 시도는 죄다 실패했다. 실패의 이유는 뉴턴역학의 원거리 작용 개념과 맞닿았다. 원거리 작용은 접촉하지 않은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거나 밀쳐내는 직접적 힘을 의미한다. 만유인력이 대표적이다. 뉴턴역학이 풍미한 당시에 이것은 자연계의 가장 보편적인 힘 형태로 인식되었다. 뉴턴주의자들은 이걸로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라플라스 프로그램)하려고 까지 들었다. 그런데 전기와 자기의 상호작용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론과 현실의 아귀가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러데이의 위대함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는 실험을 설계하며 원거리 작용을 과감히 폐기하고 파동 개념을 도입했다. 즉 전기와 자기는 뉴턴이 정식화했듯 빈 공간에서 힘을 서로 직접 주고받지 않는다. 중간에 매질을 진동시켜 힘을 전달한다. 그럼 무엇이 매질 역할을 하는가? 패러데이는 ‘장(場)’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제시했다. 흔히 전기장, 자기장 할 때의 그 장이다. 장은 힘이 전달되는 공간적 매개다. 패러데이는 장을 따라 역선, 즉 힘의 선이 존재해서 물체들을 서로 연결한다고 생각했다. 장을 매개로 자기가 전기가 되고, 전기는 자기가 되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핵심 개념이기도 한 장은 이렇게 패러데이로부터 모태가 형성되었다.


패러데이는 이를 증명하는 실험을 고안했다. 고리 모양의 철심에 두 개의 코일을 각각 감는다. 한쪽 코일에는 검류계(전류가 흐르는지 보는 장치)를 연결하여 닫힌 회로를 만들고, 다른 쪽 코일에는 전지를 연결하여 정상 회로를 만든다. 이때 전지를 연결한 코일에 전류가 흐르는 동안 반대쪽 회로에 검류계 바늘이 움직였다. 패러데이는 이를 회로에 흐르는 전류가 주위에 자기장을 발생시켜서 옆 회로에도 전류를 흐르게 한다고 해석했다. 만약 그렇다면 자석만으로도 전류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나? 패러데이는 막대 철심에 코일을 감아서 검류계에 연결하고, 철심 끝에 자석을 갖다 대면서 전류가 흐르는지 확인했다. 그러자 자석을 갖다 대거나 떼는 순간마다 검류계 바늘이 흔들렸다. 다음에는 아예 원통형 코일을 만들어 안쪽에 자석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해보았다. 역시 검류계의 바늘이 움직였다.

마이클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실험 세팅은 대략 이러했다.

 

실험 과정이 복잡해 보이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패러데이가 발전기의 원리를 확립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화력, 수력, 풍력 등을 이용해 전기를 일으키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패러데이 덕분에 인류는 전기를 값싸게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자석의 문명사적 의의가 바뀌는 일이기도 했다. 원래 자석은 나침반 외에는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패러데이 이후로 전기를 일으키는 근원으로서 인류에게 매우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맥스웰과 전자기학의 완성

     

패러데이의 실험은 완벽했다. 그래서 기존 주류 이론들이 보인 결함을 뚫고 나가 전자기학이라는 신기원을 세울 수 있었다. 패러데이가 “실험은 수학 앞에 기죽을 필요 없다”라고 일갈한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패러데이조차 수학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었다. 예컨대 이런 것이었다. 패러데이의 주장대로 역선을 따라 힘이 전달된다면, 그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원거리 작용에서는 힘이 동시 전달되는데, 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럼 걸리는 시간은 얼마인가? 역선이 물리적 실재라면, 그것이 퍼진 공간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크기는 얼마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실험만으로는 부족했다. 체계적인 이론이 있어야 했다. 유명한 베스트셀러의 제목처럼, 정말 ‘수학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이것은 맥스웰이라는 후배의 몫이었다. 맥스웰은 우연찮게도 패러데이가 전자기 유도를 발견한 1831년에 태어났다. 그런데 패러데이와는 차이점이 더 많았다. 제본공이자 실험 조수였던 패러데이와 달리 뉴턴이 졸업한 케임브리지대학교 출신으로 수학의 천재였다. 그리고 패러데이가 평생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다면, 맥스웰은 종이와 펜으로 계산을 했다.


맥스웰이 주목한 것은 전기와 자기가 힘을 전달하면서 발생하는 시간차였다. 이것은 패러데이가 원거리 작용을 기각하고 파동 개념을 채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전기와 자기는 뉴턴의 정식화와는 달리 동시에 힘을 전달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일정한 속도로 퍼져나갔다. 맥스웰은 바로 그 속도를 계산하려 했다. 그런데 막상 계산을 해보니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그 속도가 빛의 속도와 일치했기 때문이다(아니... 빛이 거기서 왜 나와...?). 그러니까 전기와 자기는 빛의 속도로 힘을 전달한다는 의미가 된다.


1861년 맥스웰은 연구결과를 종합해 20개의 방정식으로 체계화했다. 바로 이것이 현재까지도 수많은 물리학도와 공학도를 괴롭히는 맥스웰 방정식이다. 1884년 올리버 헤비사이드(Oliver Heaviside) 등이 이를 재정리해 현재는 4개다. 맥스웰 방정식은 전자기학의 완결판이자 최종 보스다. 그때까지 개별적으로 탐구되었던 전기, 자기, 빛 등의 현상을 하나로 통합했다. 예컨대 맥스웰 방정식을 풀면 전자파를 표현하는 파동방정식을 얻는다. 이때 파동의 진행 속도는 역시 빛의 속도와 같다. 따라서 맥스웰은 빛이 전기장과 자기장의 파동, 즉 전자기파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근대과학 최대의 난제였던 빛의 본질에 대한 논쟁이 일단락되었다. 기존 주류였던 뉴턴의 입자설은 기각되었다. 물론 맥스웰의 파동설도 완전한 진리는 아니었다. 44년 뒤, 아인슈타인이라는 후배가 광전효과라는 또 다른 안티테제를 들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맥스웰 방정식 하나만으로도 인류사에 영원히 이름을 새길 과학자다. 아마 이걸 배우는 물리학도와 공학도는 진절머리를 치겠지만.



    

전기가 이끈 인류의 진보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전자기학은 인류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전자기학의 완성으로 전기라는 새로운 동력을 대량으로,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기의 상용화는 이미 진행 중이던 산업혁명을 크게 자극했다. 그래서 증기기관이 주도한 18세기의 1차 산업혁명과 구분하여, 전기가 주도하는 19~20세기를 2차 산업혁명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이 시기에 증기기관의 시대 못지않은 발명품들이 쏟아졌다. 1837년 새뮤얼 모스(Samuel Morse)는 인류 최초의 원거리 통신인 전신기를 발명했다. 모스는 송신기 스위치를 눌렀다 떼는 차이를 조절해 부호를 만들었는데, 이게 모스부호다. 그리고 에른스트 베르너 폰 지멘스(Ernst Werner von Siemens)는 1879년 최초의 노면전차를 개발해 도시교통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전기문명 시대의 총아는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이다. 1879년의 전구를 시작으로 전축, 전화, 전기냉장고 등 그가 쏟아낸 발명품은 현대인의 생활양식, 현대 과학기술문명의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에른스트 베르너 폰 지멘스가 개발한 노면전차. 도시교통의 패러다임을 바꾼 발명품으로, 현대에도 여전히 쓰인다.

1차 산업혁명이 기술자와 사업가의 혁신으로 이루어졌다면, 2차 산업혁명은 과학의 난제 해결이 산업적 파급력으로 이어졌다는 차이가 있다. 이때부터 과학은 인류 삶의 획기적 진보를 이끄는 학문으로 위상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초창기만 해도 전자기학 연구가 그렇게 엄청난 가능성을 갖고 있음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순수하게 궁금했던 질문, 예컨대 전기와 자기는 다른 종류의 힘인지, 서로 변환될 수 있을지를 탐구했을 뿐이다. 이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패러데이의 실험실로 정부 관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패러데이의 전자기 실험을 보고 물었다. "이런 걸 어디다 씁니까? 이거 돈이 됩니까?" 패러데이의 답이 걸작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훗날 이것에 세금을 매길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이런 연구가 돈이 되냐는 현대과학에서도 꾸준히 반복되는 질문이다. 하지만 전자기학의 발전 과정에서 보듯, 과학연구는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과학자 본인도 대부분 알 수 없다. 그저 시대가 당면한 난제의 해결에 최선을 다하면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인류의 삶이 진보하기도 하는 것이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전자기학은 이 점에서도 인류에게 중요한 의미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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