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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Sep 30. 2023

석유, 전기, 자동차가 만든 세상

2차 산업혁명과 대중의 시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1851년 소설 『모비 딕』은 당시의 미국 포경업계를 반영한 작품이다. 1853년 일본을 개항시킨 매튜 페리(Matthew Perry) 제독의 요구 중 하나는 미국 포경선의 기항 허용이었다. 그만큼 고래잡이가 성행한 때였다. 그 많은 고래를 잡아서 어디다 썼냐고? 고래의 기름은 등불을 밝히는 주원료였다. 그때 기준 1갤런에 2.5달러나 할 정도로 상당한 고가였다. 대체재가 마땅찮았기에 비쌀 수밖에 없었다. 송진 기름, 식물성 유지 등은 품질이 떨어졌고, 석탄은 가격이 더 비쌌다.


1859년 등유가 대량 생산되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온 미국이 등불을 밝힐 정도의 생산량이 쏟아졌다. 등유(燈油)는 등불에 쓰이는 석유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세 명의 선구자가 있었다. 1855년 석유 사업에 관심이 있던 변호사 조지 비셀(George Bissell)은 예일대학교의 화학 교수 벤저민 실리먼(Benjamin Silliman)에게 타당성 분석을 의뢰했다. 실리먼의 결론은 석유가 ‘값싼 비용으로 귀중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원료’라는 것이었다. 경영 컨설팅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분석이었을 것이다. 비셀은 이 보고서를 근거로 투자자를 모집했다. 그때만 해도 석유는 고위험 벤처사업이었다. 비셀과 실리먼은 세네카 석유회사를 설립하고, 에드윈 드레이크(Edwin Drake)라는 채굴 전문가를 영입했다. 드레이크의 시추팀은 1년여의 시행착오 끝에 펜실베이니아 타이터스빌에서 석유를 대량으로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최초의 수직 굴착식 시추방식을 적용한 결과였다. 이는 미국 석유 산업의 태동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사업가와 기술자들이 타이터스빌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석유가 다양한 성질을 가진 혼합물이며, 이미 알려진 증류 기법을 이용하면 쉽게 분리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인구 200여 명의 타이터스빌은 10년도 안 돼 1만 명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펜실베이니아의 석유 열풍은 인디애나, 오하이오를 거쳐 텍사스까지 퍼져 나갔다. 골드러시에 이은 오일러시(Oil Rush)였다.

펜실베이니아의 타이터스빌은 미국의 석유산업이 태동한 곳이다. 1859년 첫 시추에 성공한 이후 오일러시의 중심지가 되었다.



      

2차 산업혁명의 도래

     

석유의 대량생산으로 미국인들은 밤에 일찍 잠들 필요가 없어졌다. 싼값에 밤늦도록 불을 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늦게까지 일하거나, 사람들과 교류하거나, 책을 읽거나 했다. 이는 산업에서 촉발된 생활양식의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본래 산업혁명은 증기기관과 석탄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인간의 노동을 최초로 기계가 대체한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그 특징은 자동화, 연결성, 유동성으로 요약되었다. 인간은 증기기관을 조작하는 정도의 노동만 투입하면, 나머지는 기계가 알아서 했다. 거기서 나오는 생산량은 인간의 노동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었다. 증기기관은 일종의 플랫폼 기술로서 다양한 산업을 대형화하고 서로 연계했다. 동력원으로 쓰인 석탄은 가볍고 이동이 쉬워서 언제 어디서나 동력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석유와 전기라는 새로운 동력원이 등장하면서 더욱 급진전했다. 자동화, 연결성, 유동성에서 석유와 전기는 이제껏 도입된 모든 에너지를 압도했다. 그만큼 엄청난 대량생산의 가능성을 내포했다. 특히 20세기 등장한 자동차와 비행기라는 새로운 운송수단에 쓰이면서 시너지가 대폭발했다. 이 시대를 2차 산업혁명으로 구분할 수 있다. 1차가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 영국이 주도했다면, 2차는 19세기 중반~20세기 초반으로 미국이 중심이 되었다. 2차 산업혁명은 각 기술이 내적, 외적으로 연계되면서 거대한 기술시스템을 이룬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기술시스템에는 기술, 발명품, 원료, 엔지니어 등의 고유 요소뿐만 아니라, 고용, 노동, 인프라, 정책 등의 사회 제도도 포함되었다. 그 결과 인간의 기술 의존도는 심화되고, 농촌에서 도시로 삶의 기반이 이동하며, 공장제 대공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경제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모든 혁명은 석유에서 비롯되었다. 석유(petroleum)는 그리스어 petro(암석)와 라틴어 oleum(기름)의 합성어에서 기인한다. 과학적으로는 자연에 존재하는 탄화수소의 혼합물을 의미한다. 즉 탄소(C)와 수소(H)가 결합된 여러 탄화수소 분자들이 섞여 있는 상태다. 분자 크기가 비슷하면 물리적 성질도 유사하다. 그래서 끓는점 차이를 이용해 분자량이 비슷한 구성 성분들 – 액화석유가스(LPG), 휘발유, 등유, 경유, 중유, 윤활유, 아스팔트 등 – 을 분리해낸다. 이것이 석유 정제 기술이다.



     

석유산업의 독점화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석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고대 중동과 그리스에서는 건축물의 방수를 막고자 역청(아스팔트)이 쓰이기도 했다. 성경에도 노아의 방주를 만들 때 역청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세 이슬람에서는 정제 기술이 발달해서 그때부터 등불에 등유를 썼다. 석유 정제 기술은 다른 지식들이 그렇듯 르네상스 때 이슬람에서 유럽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핵심 에너지로 부상하는 것은 19세기부터다. 바로 이때부터 시추와 정제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 시발점은 앞서 살펴보았듯 미국이다. 1860년대부터 등유가 미국인들의 밤을 밝히는 에너지원이 되면서, 석유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막대한 자본과 사업가들이 석유산업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오하이오의 석유 사업가 록펠러는 일찍부터 시추보다는 유통과 정유에 집중했다. 이건 대단한 선견지명이었다. 우선 철도왕이었던 코닐리어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에게 운송 독점권을 주면서 석유 유통량을 크게 늘렸다. 그리고 등유를 만들고 남은 타르로 석유젤리, 파라핀 왁스, 아스팔트 등의 부산물도 생산했다. 당시 오하이오는 고무를 비롯한 고분자공업이 발달하고 있었다. 록펠러는 그 원료를 공급하며 막대한 수익을 냈다. 이렇게 사업 규모를 키운 록펠러는 1870년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하여 순식간에 경쟁사들을 무너뜨리고 시장을 장악했다. 그러자 동업자 밴더빌트도 방해가 되었다.


록펠러는 밴더빌트를 내치고자 회사의 명운을 건 승부수를 던졌다. 무려 640㎞에 이르는 송유관을 건설하여 철도의 석유 유통을 대체해버린 것이다. 물론 록펠러는 라이벌을 무너뜨리려고 한 일이지만, 이걸로 미국인들이 본 혜택은 엄청났다. 거대한 송유관 네트워크 덕분에 원거리의 시골에서도 석유를 싸고 빠르게 공급받게 된 것이다. 액체 자원으로서 유동성이 뛰어난 석유의 장점을 극대화시킨, 말 그대로 신의 한 수였다. 이로써 철도 수송의 40%를 차지하던 록펠러의 물량이 빠져 버렸다. 수많은 철도 회사들이 파산했고, 밴더빌트도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1881년 스탠더드 오일의 미국 석유 시장 점유율은 95%를 기록했다.

록펠러는 동업자인 밴더빌트를 엿먹이고자 대규모 송유관을 건설해 철도의 석유 유통을 대체했다. 덕분에 석유는 싸고, 빠르고, 더 멀리 수송될 수 있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전국적 공룡기업다운 관리기법을 사용했다. 미국은 주에 따라 기업 운영에 대한 법률과 규제가 다르다. 이에 스탠더드 오일은 주마다 개별 법인을 두되, 뉴욕의 이사회가 주주들의 권리를 위임받아 전체 체계를 관리하게 했다. 이것이 록펠러의 시그니쳐인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다. 록펠러가 선보인 이 독특한 조직 유형은 금세 다른 산업으로도 번져 미국 경제의 독점화를 부추겼다. 이는 의회가 1890년 반독점법을 의결하는 계기가 된다. 이 법으로 스탠더드 오일은 수십 개로 쪼개져야 했지만, 그 후손은 액손모빌, 셰브론, 아모코 등으로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록펠러는 미국인들의 생활은 물론, 정치와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친 기업인이었던 셈이다.



     

전기산업과 에디슨-테슬라의 경쟁

     

그런데 무소불위의 록펠러에게 도전한 이가 있었다. 바로 에디슨이다. 밴더빌트가 철도왕, 록펠러가 석유왕이었다면, 그는 전기왕이었다. 에디슨은 1879년 여러 시행착오 끝에 백열전구 개발에 성공했다. 필라멘트를 핵심으로 하는 에디슨 전구는 뛰어난 가성비, 실용성, 안전성을 갖고 있어서 기존 전구들을 압도했다. 이렇게 백열전구라는 와해성 기술의 등장으로 석유 업체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에디슨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거액을 투자하는 인물이 J.P. 모건이다. 그는 전기산업에서 얻은 막대한 수익을 발판으로 미국 최대의 금융재벌로 성장했다.


전기산업의 기원은 패러데이가 개척하고 맥스웰이 완성한 전자기학이다. 에디슨은 패러데이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실제로 패러데이의 저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노라고 밝힌 바 있다. 전자기학은 전기력과 자기력이라는 힘의 변환을 다룬다. 에디슨의 대다수 발명품 – 이중전신기, 전화기, 축음기, 백열전구, 전차 – 도 이렇게 에너지를 교묘하게 변형하는 것들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에디슨은 사업가 이전에 전자기학의 탁월한 응용자였다. 흔히 과학기술이라고 하는, 과학적 발견이 기술적 응용개발로 이어져 삶의 질을 높이는 행위에, 전자기학만큼 잘 어울리는 사례도 없다.


에디슨은 전기 시스템의 설계자이기도 했다. 이 점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 에디슨은 전구뿐만 아니라 시스템을 구성하는 장치들을 설계하고 관련 회사들을 설립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투여했다. 가장 먼저 설립한 에디슨 전등회사는 조명 개발을 위한 재정지원을 맡았다. 이어 1880년 설립된 뉴욕 에디슨 조명회사는 전기 서비스를 제공할 중앙발전소를 건설·유지하는 일을 했다. 이 밖에도 발전기(에디슨 기계회사), 송전 케이블(에디슨 전기튜브회사), 백열등(에디슨 전구회사)의 생산 회사를 만들었다. 전기의 사용량 측정과 요금 책정 역시 에디슨이 발명한 계량기가 했다. 요컨대 에디슨은 전기를 생산, 배송, 사용, 계량하는 시스템 자체를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기 시스템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1882년 미국에 1개만 있던 발전소는 1920년 4,000개에 육박했고, 가정의 3분의 1 이상에 전기가 공급되었다. 그 용도 역시 조명뿐만 아니라 선풍기, 다리미, 청소기 등으로 확대되었다. 1887년 조선에 최초의 백열등 시스템을 공급한 것도 에디슨의 회사였다.

1878년 파리 엑스포에 출품해 엄청난 관심을 받은 에디슨의 전기 시스템(왼쪽)과 에디슨 기계회사(오른쪽). 에디슨은 단순한 발명가를 넘어 전기 시스템 자체를 창조했다.


그러나 잘 나가던 에디슨에게도 경쟁자는 나타났다. 파리지사의 엔지니어였던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 물리학자는 오늘날 전기자동차 회사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둘은 전기를 인류 생활 전반으로 상용화시킨 천재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차이점이 더 많다.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 않은 에디슨과 달리, 테슬라는 수학과 과학에 뛰어나서 대학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또 에디슨이 시간이 걸리더라도 시행착오를 겪으며 연구의 해법을 도출했다면, 테슬라는 이론에 기초한 엄밀한 실험 계획을 세워 시간 손실을 최소화했다.


이렇게 상반된 두 천재가 전기의 공급방식을 두고 정면충돌했다. 원래 에디슨은 110V 직류를 채택했다. 그런데 이렇게 낮은 전압으로는 에너지 손실이 커서 원거리에 전력을 보내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발전소를 소비지역과 가깝게, 촘촘히 지어야 했다. 물론 교류를 쓰면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다만 교류에서 작동하는 쓸만한 전동기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걸 해결한 이가 테슬라였다. 그는 교류 유도전동기를 개발하고, 경영진에게 틈날 때마다 교류의 우수성을 설파했다. 그러나 이미 직류 설비에 많은 투자를 한 에디슨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1886년 테슬라는 조지 웨스팅하우스(George Westinghouse)의 회사로 이직했다. 웨스팅하우스의 220V 교류 방식은 손실이 적어 원거리로도 전기를 보낼 수 있었고, 변압기도 다루기 간단했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후발주자였음에도 빠르게 영향력을 키웠다.


위기를 느낀 에디슨은 견제에 나섰다. 그 방법이 참으로 치사했다. 요즘 말로 하면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것이었다. 에디슨은 동물들을 교류 전기로 감전사시켜 위험성을 강조했다. 또 뉴욕주에 로비하여 웨스팅하우스 발전기를 사형집행에 쓰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공작에도 교류의 우수성을 끝내 극복할 수는 없었다. 결정타는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였다. 여기서 웨스팅하우스가 전기사업권을 따내며 전세는 역전됐다. 이 대회는 미국인들에게 교류의 안전성과 경제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화가 난 투자자 J.P. 모건은 경쟁사였던 톰슨 휴스턴과 합병하면서 에디슨을 축출해버렸다. 이 합병한 회사가 제너럴 일렉트릭이다. 이후 교류 전기는 대세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우위는 변하지 않고 있다.

도시 송전 방식으로서 직류(왼쪽)와 교류(오른쪽)를 비교한 사진. 에디슨과 테슬라의 전류전쟁에서 테슬라는 교류의 기술적 우수성을 앞세워 승리를 거뒀다.



      

포드주의와 자동차 혁명

     

에디슨의 휘하에는 테슬라 말고 인재가 더 있었다. 자동차왕으로 불리는 헨리 포드(Henry Ford)다. 1903년 포드는 에디슨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차렸다. 그러자 조선 왕실에서 곧바로 포드의 자동차를 구매했다. 16년 전 에디슨과 백열등 계약을 맺은 데 이은 얼리 어답터 행보였다. 서양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은 축음기의 애호가이기도 했다.


초창기 자동차의 동력원은 전기가 대세였다. 전기 자동차의 등장은 18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1년 독일의 기계공학자 페르디난트 포르셰(Ferdinand Porsche)는 전기 자동차의 배터리가 무겁다는 단점을 개선해 최초의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러나 몇 년 안 돼 휘발유 자동차가 역전해버렸다. 1908년 포드가 모델 T라는 미국의 역사를 바꾼 자동차를 내놓은 것이다. 결국 포르셰도 대세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벤츠의 엔지니어였던 그는 1931년 독립하여 포르쉐를 창업했다. 그리고 1934년에는 “대중(Volks)을 위한 자동차(Wagen)를 만들어 달라”는 히틀러의 부탁에 따라 폭스바겐(Volkswagen)의 비틀을 설계했다. 요컨대 포르셰는 포르쉐, 벤츠, 폭스바겐에 모두 관여한 엔지니어였다.

포드의 모델 T는 자동차의 대량생산, 대중화 시대를 열어서 미국의 역사까지 바꿨다.


포드의 모델 T는 기술보다는 생산 방식에서 혁신적이었다. 그것은 판매가격을 크게 낮춰 자동차의 대량생산,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출시 당시 850달러였던 가격은 1915년 440달러로, 1920년대에는 290달러까지 낮아졌다. 그 비결은 사장님이 미쳤어요가 아니라 3S에 있었다. 즉 설계와 디자인의 단순화(simplification), 부품과 작업의 표준화(standardization), 기계와 공구의 전문화(specialization)다. 이러한 3S 원칙은 거대한 이동 조립 라인을 통해 구현되었다. 포드는 도축장의 고기 해체 라인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자동차 생산에 적용했다. 이 라인에서 작업자는 굳이 이동할 필요가 없다. 컨베이어 벨트가 자동으로 작업물을 전달해준다. 그래서 작업 당 소요시간이 균등해진다. 이러면 전체 작업 과정에서 낭비되는 시간을 죄다 없앨 수 있다. 최소한의 시간으로 최대한의 생산량을 뽑아낼 수 있게 된다.

포드는 생산 공정을 단순화, 표준화, 전문화함으로써 낭비되는 작업 시간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였다.


포드의 혁신은 생산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914년에는 2.3달러의 일당을 (할당량 충족을 전제로) 5달러로 올려버렸다. 뒤이어 주 5일 근무도 시행했다. 노동자의 생활에도 관여했다. 포드는 사회부서(Sociological Department)를 설치해 노동자의 재무설계, 결혼, 교육 등도 지원했다. 이 역시 노동생산성 향상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가격 인하와 시너지를 이루며 자동차의 대량소비를 가능케 했다. 이전까지 자동차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포드의 노동자들은 자기가 만든 자동차를 사서 드라이브와 피크닉을 다니며 저녁이 있는 삶을 즐겼다. 이러한 ‘생산성 향상 -> 대량생산 -> 가격하락 -> 대량소비-> 생산성 더 향상’의 선순환이 포드 경영철학의 핵심이었다. 이는 심지어 사회주의자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포드의 경영 방식을 포드주의(Fordism)로 개념화하며, 근대성의 정수로서 유럽도 적극 수입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포드주의는 자동차 산업, 나아가 제조업의 보편적 모델로 확산되었다. 이는 20세기의 민주주의 확산과도 조응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보통선거가 확립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미국의 남성은 1868년, 여성은 1920년에 투표권을 가졌다(물론 유색인종은 배제되었다). 민주주의, 포드주의, 노동자 지위 상승은 서로를 촉진했다. 바야흐로 대중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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