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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Oct 02. 2023

작아지는 소자, 변화하는 기업

트랜지스터와 실리콘밸리의 기원

1946년 개발된 초창기 컴퓨터 에니악(ENIAC)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높이 5.5m, 길이 24.5m에 달했으며, 무게는 30톤이었다. 원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군의 의뢰로 만든 탄도학 계산 기계로 성능은 좋았다. 인간이 20시간 걸렸던 포탄의 궤적 계산을 30초 만에 끝냈다. 하지만 크기가 커도 너무 컸다. 스쿼시 코트만 한 방을 혼자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고장도 잦고 전기도 많이 먹었다. 에니악을 가동하면 펜실베이니아 도시들의 전력 공급에 차질을 빚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오늘날 손바닥에 들어가는 스마트폰이 그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음을 생각해보면, 컴퓨터라고 부르기 민망한 기계였다.


에니악이 이렇게 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무려 18,000개가 넘는 진공관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진공관은 요즘 쓰이는 반도체의 조상님쯤 되는, 20세기 전자혁명의 신호탄이 된 장치다. 1904년 존 앰브로즈 플레밍(John Ambrose Fleming)이 정류용 2극 진공관, 1907년 리 디 포리스트(Lee de Forest)가 증폭용 3극 진공관을 연달아 개발했다. 이것들은 전기 신호의 송수신을 결정(스위칭)하고, 전파 신호를 교류에서 직류로 변환(정류)하며, 입력 신호의 작은 변화를 출력 신호의 큰 변화로 유도(증폭)했다. 이로써 전자기기, 무선 통신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송수신기, 레이더, 전화 교환기 등이 그 산물이다.


그런데 진공관은 전자기기 부품으로 쓰기에는 확실히 컸다. 진공관은 유리관 안에 설치된 필라멘트를 가열해서 전자를 외부로 방출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이 유리관의 부피 때문에 크기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유리라서 충격에도 약했다. 필라멘트를 뜨겁게 달궈야 해서 전력이 많이 필요했고, 필라멘트의 수명도 짧았다. 이런 문제 때문에 작고 견고한 전자소자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에니악의 크고 아름다운 위엄. 가동하면 펜실베이니아 도시들의 전력 공급에 차질을 줄 만큼 엄청난 전력을 먹었다고 한다.



     

작고, 단단하고, 오래가는 트랜지스터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얼마 안 돼 진공관을 대체할 장치가 개발되었다. 1947년 미국 벨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William Shockley), 월터 브래튼(Walter Brattain), 존 바딘(John Bardeen)이 트랜지스터(transistor)를 개발한 것이다. 벨연구소(Bell Labs)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의 이름을 딴 것에서 보듯, 원래 전화와 관련된 연구소다. 그런데 이 연구소는 전화보다 대단한 기술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태양전지, 컴퓨터 음악, 디지털카메라용 고체촬상소자(CCD) 등이다. 심지어 빅뱅이론의 증거가 되는 우주배경복사까지 발견했다. 이 연구소가 주제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연구를 장려해서 그렇다. 트랜지스터 개발도 전쟁 중의 레이더 수신기 연구에서 파생한 것이었다.


트랜지스터는 반도체 결정을 사용하는 전자소자다. 반도체(半導體, semi-conductor)는 말 그대로 전기가 흐르지 않는 부도체(절연체)와 전기가 흐르는 도체의 중간적 성질을 갖는 물질이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전기를 흐르게 할 수도 있고, 흐르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전자기기의 정보를 전달, 저장, 처리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 트랜지스터라는 이름도 이런 기능을 반영한 조어다. 즉 전달(transfer)과 저항기(resistor)를 합친 것이다. 전기전도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저항의 역할도 한다는 의미다.


트랜지스터에는 3개의 다리(단자)가 있다. 각각 이미터, 베이스, 컬렉터라고 한다. 트랜지스터는 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전류를 스위칭하거나 증폭한다. 즉 세 개 중 두 개 사이에 전기를 통하게 할지 말지, 어느 정도로 통하게 할지를 나머지 하나의 단자로 조절할 수 있다. 이를 흔히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의 양을 밸브의 열린 정도로 조절하는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트랜지스터를 구성하는 3개의 반도체가 전류를 스위칭하거나 증폭하는 원리


우선 스위칭은 이름 그대로 전등의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는 것과 비슷하다. 스위치가 열려 있으면 베이스에 전류가 흐르지 않으므로 모든 전류계에 전류가 흐르지 않는다. 반대로 스위치를 닫아 베이스에 전류가 흐르면 모든 전류계에 전류가 흐른다. 이러한 스위칭 기능을 디지털 기기에서는 이진법 신호(0, 1)의 구분에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전자회로를 설계할 때 AND, OR, NOR(Not OR), NAND(Not And), XOR(Exclusive OR) 등의 논리 게이트도 만들 수 있다. 이것들을 조합하면 컴퓨터에서 흔히 쓰는 CPU, GPU, RAM, 플래시 메모리 등의 연산기나 기억장치 등이 된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Bill Gates)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1947년의 벨연구소로 가겠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증폭은 약한 전류를 강한 전류로 키우는 작용이다. 트랜지스터의 베이스는 매우 얇아서 약한 전류가 흐른다. 반면 컬렉터에는 베이스보다 훨씬 강한 전류가 흐른다. 베이스의 작은 전류 변화가 컬렉터에는 큰 변화로 나타나는 것을 증폭 작용이라고 한다. 이를 이용하면 100배의 전류도 쉽게 유도할 수 있다. 앰프는 증폭 작용을 이용해 만든 대표적인 기기다.

 

트랜지스터가 없었다면 노트북, 스마트폰 등등 소형 디지털 기기들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기기들에 넣기에는 진공관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라멘트의 가열 과정에서 전력을 많이 쓰기 때문에 작은 전지로 전력을 공급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마저도 필라멘트가 오래 못 간다. 반면 트랜지스터는 아주 작고, 전력을 덜 쓰고, 반영구적이다. 일례로 1954년 벨연구소는 최초의 트랜지스터 컴퓨터 트래딕(TRADIC)을 개발했다. 진공관 컴퓨터와 성능이 거의 같으면서도 크기는 300분의 1, 소비전력은 1,500분의 1에 불과했다. 이러한 압도적 성능 우위 때문에 트랜지스터는 진공관을 빠르게 대체했다. 물론 그렇다고 진공관이 소멸한 것은 아니다. 진공관을 오디오 앰프의 증폭용 소자로 사용하면, 디지털과는 다른 음질을 갖게 된다. 오디오 마니아들은 이를 진공관 특유의 따뜻한 음색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여전히 수요가 있다. 고급 진공관 오디오 앰프는 상당한 고가에 팔리기도 한다.



     

실리콘밸리의 태동

     

재미있는 사실은 트랜지스터의 발명이 트랜지스터‘만’의 발명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트랜지스터의 상용화 과정에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혁신 클러스터인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도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는 지역적으로 샌프란시스코만의 남서쪽 해안가 도시들을 지칭한다. 반도체 재료로 주로 쓰이는 규소(silicon)와 샌프란시스코만 동남쪽에 있는 산타클라라 계곡(valley)을 합쳐서 만든 명칭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지명보다, 세계 최고의 IT와 반도체 산업을 이끄는 기업, 대학, 연구소 등의 집합체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실리콘밸리는 지리적으로 샌프란시스코만 남서쪽 연안의 도시들을 의미하지만, 지명보다는 경영학적, 문화적 의미가 더 크다.

그 기원은 트랜지스터의 발명자 중 하나인 쇼클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쇼클리는 트랜지스터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동시에 실리콘밸리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다만 그 과정이 결코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원래 벨연구소의 트랜지스터는 이론물리학자인 바딘과 실험물리학자인 브래튼이 협업해서 만든 점 접촉형 트랜지스터(point-contact transistor)가 최초의 성과였다. 이 발명의 특허를 내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팀장인 쇼클리는 배제되었다. 쇼클리가 워낙 괴팍하고 독단적인 성격이었던 탓에 바딘과 브래튼이 작정하고 왕따시킨 것이다. 격분한 쇼클리는 독자 개발에 나서 접합형 트랜지스터(junction transistor)를 고안했다. 사실 점 접촉형 트랜지스터가 작동에는 성공했지만, 제품으로 상용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쇼클리가 안정적이고 제품화에도 용이한 샌드위치 구조의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것이다. 쇼클리는 이 새 제품을 뒷받침하는 이론까지 확립했다. 이 때문에 벨연구소 내에서도 트랜지스터의 최초 발명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란이 생겼다. 그러나 노벨재단은 1956년 노벨물리학상을 세 사람에게 수여함으로써 트랜지스터 개발 공로를 공평하게 인정했다.


트랜지스터 개발을 계기로 셋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바딘은 사직했고, 브래튼은 쇼클리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했다. 쇼클리도 벨연구소를 떠나 고향인 서부로 돌아가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쇼클리의 접합형 트랜지스터를 응용한 휴대용 라디오가 출시되어 타이밍도 좋았다. 이 계획을 전해 들은 스탠퍼드대학교 교수 프레데릭 터먼(Frederick Terman)은 쇼클리에게 팔로알토로 오라고 제안했다. 터먼도 실리콘밸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39년 그의 제자들인 윌리엄 휴렛(William Hewlett)과 데이비드 팩커드(David Packard)가 실리콘밸리 1호 기업 휴렛팩커드를 창업했기 때문이다. 이어 1951년에는 대학과 기업의 협력 플랫폼으로서 스탠퍼드 산업단지(Stanford Industrial Park)까지 창설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쇼클리에게 함께 일하자고 권고한 것이다.


터먼의 제안을 받아들인 쇼클리는 1956년 아널드 벡맨(Arnold Beckman)의 지원을 받아 쇼클리반도체연구소(Shockly Semiconductor Laboratory)를 팔로알토에 설립했다. 사업 목표는 실리콘으로 트랜지스터를 생산하는 것. 이러한 시도 때문에 후일 쇼클리는 '실리콘밸리에 실리콘을 가져온 사람'으로 불렸다. 쇼클리는 벨연구소의 동료들을 데려오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에 대한 나쁜 소문이 이미 파다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직접 리크루트에 나섰다. 그래도 쇼클리의 명성과 트랜지스터라는 첨단 기술의 매력 덕분에 뛰어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 유진 클라이너(Eugene Kleiner), 제이 래스트(Jay Last), 고든 무어(Gordon Moore) 등이다. 세계적 석학 쇼클리를 필두로 전도유망한 인재들이 뭉친 연구소의 앞날은 밝아 보였다.



    

역사가 바뀐 날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람 쉽게 안 변한다고, 역시 쇼클리의 독단성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연구원들을 자신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 수직적 관계로만 대했다. 특히 우생학을 신봉했기 때문에 연구원들의 서열을 나누고 차별했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직원을 해고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참다못한 연구원들은 사장인 벡맨을 찾아가 연구소장을 교체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벡맨이 노벨상 수상자 쇼클리를 포기하는 일은 없었다.


결국 1957년 9월 18일, 연구원 8명이 사직서를 냈다. 쇼클리는 이들을 8명의 배신자(Traitorous 8)라고 불렀다. 그런데 뉴욕타임스의 평가는 좀 다르다. 역사를 바꾼 10일(10 Days That Changed History) 중 하루로 이날을 꼽았다. 오늘날 실리콘밸리에서 자기 회사를 차리고자 퇴사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 장려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원래 이들은 다른 회사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벤처투자가 아서 락(Arthur Rock)의 조언을 받아들여 창업으로 선회했다. 그렇게 차린 회사가 바로 페어차일드 반도체다. 1959년부터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은 이 신생 회사에게는 엄청난 호재였다. 미사일과 위성에 쓰일 안정적인 반도체를 NASA에 대거 납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쇼클리의 '8명의 배신자'. 당시에는 부정적으로 묘사되었지만, 나중에는 실리콘밸리의 창업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들이 된다.


하지만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대표적인 성과는 역시 집적회로다. 트랜지스터는 전하를 저장하는 커패시터, 전류를 조절하는 저항기, 정류 작용을 하는 다이오드 등 여러 부품과 연결되어 작동했다. 기술적으로 만만치 않은 과정이었다. 각 부품을 전선으로 길거나 짧게 연결하여야 했고, 이때 연결선과 연결점들에서 크고 작은 전기적 부작용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부품의 부피, 소비전력, 누설전류, 잡음 등의 문제점들을 다시 드러났다.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연구에 매진했다. 그 결과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 IC)가 돌파구로 등장했다. 말 그대로 모아서(集) 쌓은(積) 회로다. 개별 부품들을 하나의 반도체 기판 위에서 전기적으로 연결하여 일체화시켰다. 1959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의 잭 킬비(Jack Kilby)와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노이스가 공동으로 개발했다. 킬비는 이 성과로 2000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페어칠드런과 스타트업의 정신

     

회사는 잘 나갔으나 경영에는 문제가 있었다. 팔로알토의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뉴욕에 있는 페어차일드 카메라 & 인스트루먼트의 자회사였다. 그래서 주요 의사결정은 뉴욕에서 이루어졌고, 때로 뉴욕과 팔로알토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게다가 페어차일드 카메라 & 인스트루먼트의 간부들은 반도체 산업에 무지했다. 그런 간부들이 사사건건 반도체 업무에 간섭했으니 갈등의 소지가 늘 있었다. 그러던 1967년, 회사가 적자로 전환하자 갈등이 폭발했다. 비수익 사업을 정리하라는 이사회 결정에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간부들이 반발했다.

 

결국 이듬해부터 8명의 배신자는 다시 회사를 떠났다. 그중 1968년 퇴사한 노이스와 무어는 새로 회사를 창업했다. 이 회사가 인텔이다. 또 1969년 퇴사한 제리 샌더스(Jerry Sanders)는 7명의 이사와 함께 Advanced Micro Devices(AMD)를 만들었다. 클라이너는 1972년 벤처캐피털 회사 클라이너 퍼킨스를 설립해 수많은 벤처기업에 투자했다. 여기에는 아마존, 구글, 트위터 등 오늘날 IT 산업을 선도하는 세계적 기업들이 포함되었다.

일렉트로닉 뉴스의 1971년 1월 11일 특집 기사. 8인의 배신자들의 활발한 창업을 다뤘다. 이때부터 실리콘밸리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기존 회사에서 뛰쳐나가 다른 회사를 창업하는 것을 두고 페어칠드런(Fairchildren)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그리고 이는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1971년 1월 11일 일렉트로닉 뉴스의 돈 호플러(Don Hoefler)는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에서 급성장하는 반도체 산업에 대해 1면 특집 기사로 썼다. 그 제목이 ‘미국의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 U.S.A.)'다. 실리콘밸리라는 용어는 이때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페어차일드 반도체로부터 여러 회사가 스핀오프하고, 역동적으로 새로운 사업을 개척하던 바로 그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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