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자. 여러 맥락에서 답변할 수 있다. 그저 이름 세 글자만 말할 수 있다. 혈연·지연 관계를 내세울 수도 있다. 사회성을 고려한다면 소속된 조직과 하는 일에 대해서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이 당신의 철학적 자아를 묻는 것이라면? 즉 ‘당신은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며, 어떤 인식의 틀에 근거해 사유하는가?’를 의미한다면? 답하기가 쉽지는 않다. 나라는 복잡한 존재를 사상적으로 정형화해서 설명하기가 어렵다. 살면서 아직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은 없다. 그래도 상상해 본다. 나의 철학적 자아에 대해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할 것인가?
나는 우선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다. 사회의 기본은 개인이며, 국가도 개인과의 계약 관계에 따라 탄생했다는 고전적 자유주의에 동의한다. 따라서 국가 운영의 목적은 개인의 자유 실현과 권리 보호가 되어야 한다.
다만 고전적 자유주의는 16~17세기 절대왕정에 맞서 시민들의 재산과 권력을 지키려는 배경에서 형성되었다. 그래서 그 논지를 액면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 또한 현대사회에서 자유주의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치다. 그만큼해석의 스펙트럼이 넓다. 자유총연맹, 전경련, 참여연대, 최장집 학파가 말하는 자유주의가 다 다른 것이 그 예다. 그러므로 본인이 자유주의자라고 할 때는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그러한지를 설명해야 한다.
내가 받아들이는 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를 진보적으로 재구성한 사회자유주의다. 즉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 토머스 힐 그린, 레너드 홉하우스 등에서 시작하는 현대복지국가의 사상을 지지한다. 원래 고전적 자유주의는 사회를 원자화된 개인들의 산발적 계약으로 본다. 그러나 사회자유주의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개인과 사회를 유기체적 관계로 규정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개인과 사회는 분리되지 않는다. 개인의 자아실현도 개인만의 문제로 귀속되지 않는다. 국가가 그에 적합한 제도와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 또한 물리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개인의 가치관을 사회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적극적인 형태에 이르러야 한다. 이는 자유주의가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근거가 된다.
미국의 존 롤스가 제시한 정치적 자유주의도 중요한 참고가 된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토대인 공리주의는 ‘좋음’에만 주목했지 ‘옳음’에는 무관심했다. 롤스는 이러한 ‘옳음’의 우선성을 복원한다. 그럼으로써 사회적 취약집단의 기대편익 최대화를 정당화했다. 개인의 자유를 전제로 삼으면서도 평등과 공정의 가치도 구현하는 기획이다. 이로써 부의 재분배가 자유주의에 부합하면서도 윤리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롤스의 이러한 기획은 현대자유주의의 가장 진화된 형태라는 평가를 받는다. 나는 이렇게 사회자유주의와 롤스로 대표되는 현대적 영미 자유주의를 지지한다.
물론 자유주의에 한계는 있다. 자유주의가 현대화되어도, 자본주의에서 개인들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른바 수저계급론에 자유주의가 제시할 수 있는 해법은 별로 없다. 그저 금수저들에게 세금 더 걷어서 흙수저들에게 복지를 지급한다는 정도다.
그럼에도 내가 자유주의자인 이유는 그것이 담지하는 정치적 다원주의 때문이다. 절대 권력이 절대 부패한다는 사실은 철의 법칙이다. 권력은 모일 때보다 나뉠 때 적절히 작동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다원주의가 필수다. 오직 자유주의만이 이를 구현할 수 있다. 현대민주주의는 간접민주주의, 의회정치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의회에는 다양한 사회계급의 입장이 반영되어야 한다. 이는 자유주의가 보장하는 정치적 다원주의의 틀에서만 가능하다.
이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모델이 독일의 정당체제다. 우선 좌파(사회민주주의)와 우파(사회자유주의)가 중앙의 60~70%를 점유한다. 그리고 양 끝에 급진·신좌파(마르크스주의, 생태주의 등)와 기타 보수정당(자유지상주의, 국가주의 등)이 포진하는 구조이다. 이러한 정치를 가능케 하는 전제로서 정치적 다원주의와 자유주의를 지지한다.
또한 나는 경제적으로 사회주의자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갈등과 불평등을 야기하며, 적절한 통제 없이는 파국에 이를 수도 있다. 따라서 시장 원리가 본래 영역을 벗어나 과도하게 팽창하는 것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1원 1표의 자본주의 논리를 1인 1표의 민주주의 논리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민주국가들은 대부분 시장개입을 통해 국민경제를 운용한다. 그중 내가 경제적으로 사회주의자라고 하는 바의 예증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이다. 이 국가들에서는 노동자 정당이 주요 수권세력으로 정치에 참여한다. 그리고 정부 및 자본과의 주고 받기를 통해 사회주의 정책들을 구현한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할 때 마주하는 가장 난감한 문제가 마르크스주의다. 사회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조류가 마르크스주의이기 때문이다. 대중들도 사회주의라고 하면 마르크스주의를 통치 이념으로 채택한 소련, 중국 등을 떠올린다. 그러나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공감하기도 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폭력혁명론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실천적 결론이다. 현대민주주의에서 이를 성공적으로 이행할 수 있을까? 혹여 성공한다 해도 문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필연적으로 일당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 폐해는 역사가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나는 마르크스주의를 혁명의 교리가 아닌 사회과학 이론의 하나로 인식한다. 모든 사회과학 이론은 진실과 오류를 일정 부분씩 갖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를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이해에 여전히 독특한 영감을 제공한다. 자본주의를 우연이 아닌 역사과학으로 이론화하고, 사회를 갈등관계의 집합으로 설명하며, 자본주의에 공황과 실업이 필연적이라는 분석 등이 그렇다. 이런 문제설정은 자유주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우호적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까지는 아닌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자로서 내가 참고하는 역사 속 인물들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장 조레스, 올로프 팔메다. 이들은 사회주의 신념을 가졌지만 의회를 부정하지 않았다. 즉 독재가 아닌 다원주의 틀 내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하려 했다는 것, 폭력혁명이 아닌 장기 개혁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를 표방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이상향이 아니라 현실 문제 해결의 실용적 방법이다. 그렇게 볼 때 사회주의 사상체계에서 오직 사회민주주의만이 국가운영체제로서 원활히 작동했다. 물론 여기에도 비판의 여지는 많다.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 경기 순환과 연동해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다거나,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유주의적 부의 재분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맞는 지적이고 유럽 사회주의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 유사한 시도를 해본 적조차 없는 나라다. 따라서 가능성을 미리부터 제한할 필요도 없다. 유럽 사회주의의 경험에서 피할 것보다는 아직 배울 것이 더 많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는 좌우를 막론하고 이데올로기 과잉의 형태로 받아들여져 왔다. 좌파에게 사회주의는 종교적 피안이었다.반면 우파에게는 절대 손대서는 안 될 극약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차분한 정책적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이념의 성전(聖戰)으로 비화되었다.
나는 사회주의도 현대국가 운영에 유용한 정책옵션이라고 받아들인다. 따라서 내가 사회주의자라는 것의 의미는 유럽식으로 말하면 사회민주주의자이고, 미국식으로 말한다면 버니 샌더스 류의 민주사회주의자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문화적으로 개인주의자다. 나는 내 사유와 취향을 어떤 당위적 이유로 제약받고 싶지 않다. 나의 개성 그대로 즐기고 표현하고, 타인의 지지와 공감도 받고 싶다. 반대로 나 또한 남이 그러할 수 있도록 존중한다. 아니 존중 이전에, 솔직히 말해 남에게 별 관심이 없다.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만큼 나도 피해받고 싶지 않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살다 보면 당연하지 않은 경우가 꽤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저런 조직에 소속되어 살아간다는 게 특히 그렇다. 내 취향이 아님에도 조직과 관습 등을 명분으로 참고 받아들여야 하는 일들이 있다. “모월 모일 회식인데 갈 거지?” 또는 “000님(업무상 1년에 얼굴 한 두 번 볼까 말까 한) 아드님 결혼한다는데 가봐야지?” 같은 질문들이 대표적 예다. 이 질문은 형식상 나의 의사를 묻고 있다. 그러나 실제 의도는 ‘yes’를 전제한다는 것쯤은, 웬만한 사회인이라면 알 것이다.
그래도 사회인의 ‘짬’이 좀 찬 지금은 낫다.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때는 별일이 다 있었다. 그중 최악은 단지 막내라는 이유로 회사 워크숍 부서별 장기자랑에 강제 투입되었던 일이다. 잘하지도 못하는 춤과 노래를 억지로 해야만 했다(41년 평생 가장 쪽팔렸던 기억이다). 이런 집단적 요구에 맞서 개인의 의사를 내세우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저런 귀찮은 일들도 감수해야 한다. 나는 불의에 맞설 용기도 없고 성격 상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다. 그래서 대부분 집단의 요구에 순응한다. 그나마 회사에서 팀이라는 조직의 수장이 되고부터는 개인주의 성향을 드러낼 수 있어서 좋다. 적어도 우리 팀은 개인주의 팀임을 강조한다. 팀원이 부속품이 되는 게 아니라, 팀원의 역량과 개성이 모여 팀이 작동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의어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하지만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동등하게 요구한다. 이 점에서 이기주의와 다르다. 이기주의는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도덕적 태도이다. 당연히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회에 대한 책임이 없다. 제대로 된 개인주의자라면 자신의 권리 못지않게 사회에 대한 책임도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사회가 올바로 기능해야 나의 개인으로서의 권리도 잘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두 가지 정체성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도 개인주의를 토대로 작동한다. 자유주의는 사회의 기본으로서 개인을 해방시키려 한 데서 시작되었다. 사회주의에서도 개인은 중요한 존재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을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결사체’로 정의했다. 이는 개인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자유의지에 따른 노동과 연대를 통해 사회를 구성함을 의미한다. 나는 자유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로서, 그 이념들이 나와 같은 개인들의 자발적 연대를 통해 실현되기를 바란다.
한껏 멋 부리며 글을 써보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 어떤 주의자를 자처할 만큼 사상적 밑천이 두텁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써놓고 보니 좀 민망하다. 이 글은 자아 찾기의 결론이 아닌 서론이라는 변명을 해본다.
세 가지 정체성의 방향을 잡은 것이 인생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원하는 공부를 시작했다. 여기에 사회인으로서 일한 10여 년의 시간을 더했다. 이제야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대충 알 것 같다. 남은 것은 그 내용을 더 풍부하게 하는 일이다. 다음에 같은 주제로 글을 쓸 때는 지금보다 더 완성된 형태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