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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Nov 21. 2020

곧 태어날 딸에게 갖는 바람

두 달 뒤 딸이 태어난다. 또래에 비해 늦게 첫 아이를 얻은 편이다. 아내의 임신을 알았을 때도 기뻤지만, 사실은 몇 주 뒤 딸이라는 걸 알았을 때 훨씬 기뻤다. 나처럼 무뚝뚝한 아들보다야 감성 풍부하고 생기 넘치는 딸이 더 낫지 않겠는가. 나도 아들이지만 아들은 정말 키워봐야 쓸모가 없다. 회사 우리 팀에는 여직원이 훨씬 많은데, 어쩌면 그렇게 바르고 똑똑하게 자랐는지 감탄할 때가 있다. 그러면서 내 딸도 저러면 참 대견하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다만 딸이라서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다. 아이도 나와 같은 LG 트윈스 팬으로 키워서 유니폼 맞춰 입고 야구장 다니고 캐치볼도 하는 것이 로망이었다. 그런데 딸과 그게 될지 모르겠다. 아마 야구보다는 bts나 엑소 같은 아이돌을 훨씬 더 좋아할 것 같다. 


아이와 만날 시간이 가까워 오면서 현실적인 걱정도 늘어간다. 내가 아이를 잘 돌볼 수 있을지, 아기 용품들은 뭘 얼마나 구입해야 하는 건지, 육아와 직장이 병행이 될지, 아이가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등등. 남들은 진작 끝낸 숙제를 기초부터 익혀야 할 판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렵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어떤 철학으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가? 이 질문에 뭐라 답할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다. 개인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는 부모와 자식이라도 서로의 삶은 다르고, 나의 가치관을 자식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딸의 가장 가까이에 있을 조언자로서, 딸에게 갖는 몇 가지 바람을 이야기해주고자 한다.


먼저 인생에서 행복의 기준은 철저히 주관적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길만큼이나 많고 다양하다. 그중 자신한테 맞는 길을 스스로 고르면 된다. 인생에서 행복은 다른 가치를 위해 포기하거나 유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목적이다. 그런데 행복하려면 전제 조건이 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당연한 소리인가? 그런데 의외로 자신에 대해 잘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다. 주위에서 만든 행복의 기준에 맞춰서 사는 사람, 그에 대해 아무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은 절대 행복할 수 없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떨 때 행복한지, 어떤 것이 나다운 것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이것은 그냥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대상을 이해하려 할 때 공들여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처럼, 자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해야 한다. 경험도 많이 필요하고 책도 꽤 읽어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격언은 자신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나의 아빠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딸이 스스로 행복을 찾도록 돕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진 모든 경험과 지식을 이용해 도울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딸보다는 몇십 년을 더 살았으니 경험의 범위가 더 넓지 않겠는가. 딸이 내가 모르는 분야에서 무언가를 하기 원한다면, 내가 더 공부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조언이라는 것이다. 딸이 어떤 길을 가려한다면, 그 길은 어떻게 전개될 것이고 어떤 기회 요인과 위험 요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즉 딸이 원하는 길에 맞는 지도를 만들어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딸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면서 세상에도 기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두 번째로 독립적 사고의 주체이기를 바란다. 세상이 정해놓은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또한 타인이 만든 비교 기준에 갇혀 자신을 불행히 여기지도 않아야 한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그러나 아무리 정보 많도, 사유의 힘과 결합되어 적절한 처리과정을 거쳐 올바른 판단에 이르지 못한다면 무의미하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되 속절없이 휘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것을 남의 말만 듣고 결론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 뚜렷한 입장과 판단 기준을 가지기 바란다. 


다만 이것이 고집불통이 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사고와 판단의 전제는 합리성이다. 편견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논리적 근거로 뒷받침되지 않는 편견이 나쁜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수많은 정보를 접한다. 그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잘 받아들이고, 아닌 것은 과감히 버리기를 바란다. 이 과정이 독립적 사고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인생의 최종 의사결정권자는 나 자신이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본인이 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하든 지식의 힘을 믿기를 바란다. 늘 공부하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 이것은 학교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업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다(그건 아빠인 나도 못한 일이다). 물론 학교 공부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중요도는 대학 입학에 필요한 점수에 있지 않다. 학교는 대학 입시라는 절대적 목표에 맞춰 돌아가는 곳이라, 거기에 맞지 않는 지식을 쓸데없어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의외로 학교에서 인생을 사는 데 중요한 지식을 많이 얻는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역사였다. 그때 공부한 것들이 지금도 사회와 인간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반대로 나는 (문과생이 대부분 그렇듯) 수포자였다. 대학 입시에 필수니까 억지로 공부하긴 했는데, 그때는 도대체 이걸 왜 공부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유도 모르는데 어려운 내용을 공부하려니 더 짜증이 났었다. 그러다 한참 뒤에 어떤 수학자가 쓴, 수학이 일상에서 유용한 이유를 소개한 글을 읽었다. 수포자였던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 그때 그래서 미적분을 그렇게 중요하다고 배웠구나. 만약 학창 시절 그 많았던 수학 선생님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학도 괴로운 의무가 아닌 유용한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딸에게 그런 지식의 쓸모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어떤 분야든 그것을 뒷받침하는 지식 체계가 있다. 지식은 인간이 오랫동안 현실과 씨름하면서 쌓아 올린 경험과 탐구의 총체이다. 딸이 꼭 학문을 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자기 분야 일을 잘하기 위해 지식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뭔가가 궁금하면 책을 찾아 읽고, 어딘가 있을 더 많은 레퍼런스를 알아보는 습관을 가지기 바란다. 물론 지식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복잡한 세상살이에 최소한의 나침반은 돼 줄 수 있다. 딸이 자기 일에서 만큼은 ‘지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자식에게 가장 좋은 교육은 부모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딸에게 바라기 전에 나부터 실천에 옮겨야 하겠다. 아무리 딸이 예뻐도 내가 그 아이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본다. 가장 가까이에서 누구보다 설득력 있는 조언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든든한 조력자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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