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으로 혁명적인 당은 가장 적극적이고 가장 실질적인 개혁의 당이다. 모든 개혁이 진보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다.” - 장 조레스(1859~1914)
사회민주주의의 의미와 역사적 맥락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유럽의 사회민주당, 사회당, 노동당 등이 주도한 자본주의적 성장과 사회주의적 분배를 결합시킨 정치경제체제를 말한다.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표현되는 현대 복지국가가 사회민주주의 이념의 구체적 실현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모든 복지국가가 곧 사회민주주의 체제인 것은 아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복지정책을 추구하지만, 이 정책 범주 안에서도 국가별 수준 차이는 꽤 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복지국가 스펙트럼의 맨 왼쪽에 스웨덴이 있다면, 맨 오른쪽에는 미국이 있을 것이다. 스웨덴은 한 때 기업 이윤의 일정 비율을 노동자 기금에 적립해나가 노동자들의 기업 소유를 실현하겠다는 계획까지 세웠었다. 반면 미국은 전 국민 대상 의료보험체계조차 온전히 갖추지 못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스웨덴처럼 복지국가 실험을 사회주의적 이상에 따라 적극적으로 시도한 국가군을 일컫는다. 즉 복지국가 스펙트럼의 왼쪽에 모여 있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영국, 프랑스 등 북·서유럽 국가들이 해당한다. 이 국가들에서는 복지정책이 시장실패의 보완책이 아닌,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교정하려 했다는 특징이 있다. 즉 정책의 실용성 못지않게 이념적 목적도 강했다. 사회민주당, 사회당, 노동당 같은 정당들이 집권당 또는 연정 파트너로 국정에 참여함으로써 이 과정을 주도했다. 이들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독특한 제3의 체제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1990년대 유럽에서 ‘제3의 길(The Third Way)’이라는 정치노선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혼합 패러다임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 노선 훨씬 이전에,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존재했던 ‘원조 제3의 길’이었던 셈이다. 굳이 사회민주주의가 ‘원조’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근대의 양대 프로젝트를 뛰어넘는 실험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때 잠깐 유행하고 말았던 제3의 길은 그 비교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복지국가체제의 한 짤 요약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은 사회주의에 있다. 사회주의 사상체계의 방대한 계보 안에서도 자유주의적, 실용주의적, 윤리주의적 흐름이 그 이념적 기초를 이룬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 사상사와 떼어 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20세기 말에 이미 실패한 시대착오적 사상, 자본주의의 폭력적 전복을 외치는 위험천만한 사상으로 인식한다(국내 한정으로 북한 김씨 왕조의 부정적 이미지까지 곁들여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회주의를 진지한 담론의 대상으로 다루기가 쉽지 않다. 물론 대중들의 이러한 부정적 인식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현실에 존재한 많은 사회주의 체제가 보인 심각한 결함과 모순에서 기인한다. 아마 대표적 사례가 소련의 스탈린주의 및 그 변종들(마오주의, 주체사상 등)에서 나타난 1인 독재 숭배 사상일 것이다. 이들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사회주의의 근본 정신을 무시하고,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독재를 합리화하는 체제에 불과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어쨌든 이 또한 사회주의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다만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도 사회주의 사상체계의 한 분파일 뿐이며, 이와 전혀 다른 전통과 노선에 있는 (같은 사상조류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분파들도 많다는 것도 사회주의의 중요한 특징이다. 즉 사상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우리의 일반적 이해 범위보다 더 방대하고 다양한 조류들을 포괄하며, 현대 민주주의 국가 운영에 미치는 영향력도 여전히 적지 않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본격적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이러한 역사적 계보부터 살펴볼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회민주주의가 사회주의 사상사의 다른 분파들과 어떤 연계점과 단절점이 있는지를 맥락화해보고자 한다.
사회주의의 역사적 전통과 재건
보통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안티테제로 정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기원은 그보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 지성사에서 자본주의 등장 훨씬 이전부터 사회주의 담론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때 자주 인용되는 사례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르네상스기 토머스 모어의 사상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사유재산 없이 공동 생산과 소유를 기반으로 공동체적 삶을 영위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도 유사한 묘사가 나온다. 모어는 영국 사회의 악습을 야기하는 사유재산제도를 비판하면서, 이상국가의 모습으로 하루 6시간 노동으로 운영되는 평화적 농업공동체를 제시한다.
이런 이상주의적 삶의 모습들은 후일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생활양식과 닮았다. 20세기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칼 카우츠키는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이러한 역사 속 담론들을 근대 사회주의의 시원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요컨대 사회구성원들의 호혜적 협력을 통해 공동선을 높여나가는 원리로서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무관하게 인류사에서 꾸준히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는 근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대안사회운동으로 조직된다. 대략 18세기 중‧후반에 해당한다. 초창기 자본주의는 폭력과 착취를 당연시하는 날 것 그대로의 양아치 정치경제체제였다.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인신매매, 아동노동, 대량살상, 빈부격차 등은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유럽 본토는 물론,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식민지에서도 폭력과 수탈이 자행되던 범세계적으로 무지막지한 체제였다. 여기에 근본적 문제제기를 한 지식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역사적 전통에서 사회주의를 재건하여, 자본주의 안티테제로서의 근대적 사회주의를 정립한 최초의 사상가들이었다.
당시 유럽은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명명한 ‘이중혁명(dual revolution)’의 시대였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화려하게 꽃 피우는 중이었고, 프랑스에서는 시민혁명의 피바람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최초의 근대적 사회주의자들은 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등장한다. 로버트 오언, 생 시몽, 샤를 푸리에,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가 대표적 인사들이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윤리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으며, 휴머니즘과 계몽사상을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즉 문명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수탈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자본가든 노동자든 동등하게 공동선을 위해 협력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특기할만한 두 명의 인물이 있다. 영국의 로버트 오언과 프랑스의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이다.
역사 속 사회주의 전통을 재건한 최초의 근대적 사회주의자들. 왼쪽부터 로버트 오언, 생 시몽, 샤를 푸리에,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우선 오언은 본인의 사상을 머릿속에서 끝내지 않고, 직접 대안사회를 만들려 했다는 점에서 특이한 인물이다. 그가 대안사회의 핵심 이념으로 내세웠던 것은 ‘협동’이다. 오언이 생각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이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였다. 따라서 교육을 통해 협동의 원리를 발현한다면, 자본주의보다 도덕적인 데다 효율적으로도 뛰어난 사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사업가였던 오언은 노동과 인간의 권리가 존중받는 신개념 휴머니즘 사업장을 만들었다. 이윤극대화가 아닌 협동조합 원리를 바탕으로, 체계적 교육과 충분한 보상을 통해 노동자들의 협력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실천으로써 자기 이론을 입증하려고 한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뉴래너크가 바로 그 산업공동체였다.
로버트 오언이 구축한 산업공동체 뉴래너크.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반자본주의적, 협동주의적 운영원리를 도입해 성공을 거뒀다.오언은 이러한 발상과 실천을 자본주의와 대항을 이루는 '사회주의(Socialism)'라고 명명했다. 이 실험은 영국의 한 기업체에서만 이루어졌지만, 그 사상적 정수는 오늘날에도 협동조합 사회주의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회주의를 윤리로서 받아들이는 이러한 관점은 후일 사회민주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는 당대의 혁명가들이 총집결한 혁명기 프랑스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민중혁명으로 전화시키고자 노력했다. 특히 불평등의 근원을 사유재산에서 찾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불리기도 한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발표됐지만, 당시 프랑스 민중들의 생활고는 별로 나아진 바가 없었다. 바뵈프는 프랑스 혁명이 주창하는 평등은 이름뿐인 평등이라며, 부르주아 혁명으로 기울어가는 혁명기의 세태를 통렬히 비판했다. 「호민관」이라는 잡지를 발행해서인지 그에게는 ‘그라쿠스’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별명답게 토지개혁에 큰 관심이 있었다. 그가 생각한 개혁의 방향은 토지 공동소유 및 집단농장이었고, 나중에는 토지 사유제 폐지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결국 바뵈프는 또 다른 혁명으로 부르주아 혁명 정부를 전복하고자 했으나, 체포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때 남긴 최후 변론이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명문으로 평가받는다. 오죽하면 보수논객 전원책도 바뵈프의 최후 변론에 대해 “가슴이 찡해서 눈물이 흐를 정도이고, 그거 읽고 나서 좌파가 됐다가 아침밥 먹고 나서 다시 우파가 된다.”고 할 정도다. 공동 생산 및 균등 분배의 이념과 혁명적 독재의 전략은 후일 마르크스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오언과 바뵈프는 윤리주의와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근대화하고 운동에도 직접 참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사회변화를 추동할 총체적 이론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결함은 곧 운동의 조직적 힘을 키워나가는 데 한계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둘의 공통점일 것이다.
마르크스와 과학적 사회주의
그 무렵 자본주의의 변방 독일에서는 한 불세출의 천재 사상가가 출현했다. 바로 칼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스 역시 자본주의 극복 및 사회주의 건설을 필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러나 초창기 사회주의자들과는 사회주의에 접근하는 방법이 완전히 달랐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인간적 연민의 차원이 아닌, 역사적 운동법칙을 내장한 '과학'으로서 이론화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이 갑자기 발명해낸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고대로부터 인간사회를 움직여 온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법칙으로서 축적된 결과가 자본주의였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생산력 발전 수준에 따른 사회구성체가 존재(원시 공산제 -> 고대 노예제 -> 중세 봉건제 -> 근대 자본주의)해왔으며, 자본주의는 생산력 발달이 최고 수준에 이른 현재적 단계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전 사회구성체들이 그랬듯, 자본주의도 생산력 수준과 생산관계(자본주의에서는 자본과 임노동 관계)의 모순으로 인한 계급투쟁에 의해 붕괴되어 다음 단계 사회로 이행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그 '다음 단계'가 바로 사회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식화를 사적 유물론이라고 한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과학이라고 했다. 본인 이론이 ‘과학’이라고 호기롭게 선언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르크스는 당시 유럽의 지식인 사회를 풍미한 이론들 - 헤겔의 변증법,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프랑스의 사회주의 이론, 영국의 고전파 정치경제학 등 - 을 섭렵 및 재구성하여 독자적 이론체계를 집대성한다. 근현대 사회주의의 정수를 이루는 본좌격 사상, '마르크스주의'가 이렇게 탄생한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기존 사회주의와 전혀 다른 관점과 방법론을 취함으로써 사회주의 운동의 질서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마르크스주의의 등장은 사회주의 운동의 질서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이제 사회주의의 역사는 마르크스주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란...? 바로 '과학'이었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보기에 오언이나 바뵈프는,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 무기도 없이 무작정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몽상가에 불과하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는 기존의 하품 나오는 공상적 사회주의와 자신의 쌈빡한 과학적 사회주의를 구별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오언 등이 사용했던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이미 공상적 사회주의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본인의 사상을 그런 얼치기들과 동급으로 취급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선택한 용어가 '공산주의(Communism)'였다. 우리말 共産主義는, 마르크스가 사용한 '코뮌주의'의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우리나라 근대화가 그렇듯, 좌파 사상의 수입 역시 일본을 경유한 탓이다. 공산주의는 한자 표기가 의미하듯 공동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체제다. 본래 코뮌은 프랑스의 소규모 지역공동체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마르크스는 이 개념에 새로운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이후에 올 사회의 모습을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체'라고 하였다. 즉 이윤극대화를 위한 무차별적 생산이 아닌, 계급관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개인들이 서로 협력하여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분배받는 공동체 연합이라는 의미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생산수단을 소수 자본가 계급이 독점하는 데서 일어나므로, 이 독점적 소유를 해체하고 '생산수단을 사회화'해야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마르크스 사후에도 마르크스주의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혁명가들이 마르크스의 후예를 자처하며 마르크스주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정작 그 혁명을 어떻게 성공시키고, 혁명 이후의 사회는 어떻게 설계·운영해야 하는가에 대해 마르크스가 거의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후예들은 대략 이 짤을 마주한 기분이었을 것이다.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마르크스의 본업은 '사회주의 혁명가'보다는 '자본주의 연구자'에 가깝다. 실제로 「공산주의 선언」 같은 일부 문서들을 제외하고는, 마르크스 저작들 대부분은 자본의 본질, 운동법칙, 축적원리 등을 규명하는 정치경제학에 집중되어 있다. 혁명의 방법론과 혁명 이후의 사회체계 기획에 대한 내용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후예들은 스승님의 뜻을 받들어 사회주의 이행을 어떻게 하면 앞당길 수 있는지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이는 게 일상이었다. 진리 여부를 확인해줄 마르크스가 없으니 후계자들은 논쟁에서 승리해 본인 주장의 타당함을 입증해야 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는 곧 논쟁의 역사이기도 했다. 수정주의 논쟁, 공황론 논쟁, 국가론 논쟁 등 온갖 배틀이 백가쟁명 백화제방으로 벌어졌다.
러시아 혁명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체계화
그런데 이들 중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는 '난 놈'이 하나 등장한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다. 레닌은 스승의 말을 곧이곧대로 현실에 우겨넣으려 했던 교조적 인사들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조국의 특수한 현실에 맞게 응용했다는 점에서 '난 놈'이었다. 생전에 마르크스는 최초 사회주의 혁명의 유력 후보지로 영국을 꼽았었다. 자본주의 발달이 최고조에 이른 영국에서야말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가장 빨리 첨예화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닌은 다소 엉뚱하게도 차르가 통치하던 러시아에서 혁명을 성공시켰다. 레닌은 조국 러시아의 역사적 특수성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그에 맞는 혁명전략을 마련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면 부르주아 혁명이 선행되어야 사회주의 혁명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레닌은 부르주아 권력 하에서는 노동자 혁명의 원동력 자체가 소멸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니 소수 프로페셔널 혁명가들을 중심으로 당을 조직하여, 사회주의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를 멱살 잡고 끌고 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론과 폭력혁명론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이행 조건으로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제시했다. 그런데 이는 대단히 모호한 정의이다. 생산수단을 누가 어떤 방법으로 점유하고, 또 어떻게 관리한단 말인가? 레닌의 답은 간명하다. 혁명가들의 지휘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가 폭력혁명을 일으켜(자본가들이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으니) 생산수단을 전취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지를 대리하는 공산당이 이를 일괄 관리한다는 것이다. 공산당은 일당 독재를 하지만, 가장 기층의 프롤레타리아들의 토론 결과가 상층 간부들을 거치며 숙의되므로 자유주의의 다수결보다 더 민주적이라는 것이 레닌의 주장이었다. 공산주의 정치의 기반인 민주집중제는 이렇게 체계화되었다.
레닌의 공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혁명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탁월한 능력만큼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이렇듯 마르크스의 이론적 이상을 레닌이 주창한 혁명론의 형태로 완성시킨 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한다. 마르크스주의에 빈 공간으로 있던 부분, ‘어떻게 혁명을 성공시키고 국가를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레닌주의가 제시했고, 이 두 사상이 서로 보완하며 하나의 완결된 체계가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사상은 크게 보아 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폭력성과 중앙집중성을 토대로 삼기 때문에 민주주의 관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사상이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주체사상 등의 변종들을 낳으면서, 같은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다. 한 마디로 지도자에 대한 숭배와 당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관료주의가 뭔 민주주의이고 사회주의냐는 논리이다.
공산주의는 인민들의 의지가 당 최정점의 지도자에게 집중되는 권력구조를 취한다. 물론 당의 지도자와 간부들이 인민의 대의에 충실한 멸사봉공의 정치가라면 이 시스템이 훌륭하게 작동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디 그렇던가? 현실의 역사에서 공산주의의 이론적 이상은 성공보다는 실패 사례가 훨씬 많았다. 일례로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사람만 몇 명인지 정확히 알 수조차 없다. 인민을 위해 만든 일당 독재가 오히려 인민들을 억압할 수 있다는 역설을 역사는 충분히 보여주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은 동서고금과 정치체제를 막론하는 철의 법칙일 것이다.
마르크스 사후 사회민주주의의 분화
논의의 시점을 마르크스 사망 직후로 다시 돌려보자. 근현대 사회주의의 주요 흐름은 공상적 사회주의 -> 마르크스주의 -> 레닌주의(공산주의)로 이어져왔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주의 사상체계의 전부는 아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 이후, 공산주의가 아닌 사회주의 사상은 없는가? 마르크스주의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그렇지, 비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도 스펙트럼이 넓고, 분파들도 많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 글의 주제인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이다(쓰다 보니 좀 멀리 돌아왔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회민주당, 사회당, 노동당 등의 당명을 가진 세력들이 취하는 이념적 포지션이다. 이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가장 큰 차이는 정치적 자유주의(다당제)를 존중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폭력혁명 노선을 부인한다는 점이다. 즉 선거를 통한 정치 참여와 시장경제에 대한 관리를 통해, 민주주의적 가치와 사회주의적 이상을 모두 실현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역사적으로 사회민주주의는 마르크스 사후의 논쟁 과정에서 분화했다. 현대 사회민주주의가 사회주의보다는 자유주의와 더 친화력을 보이면서, 강경‧선명 좌파들 중에는 사회민주주의를 사회주의 족보에서 파내려는 이들도 많다. 사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와 진보적 자유주의는 거의 구별되지 않는 수준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념의 뿌리가 사회주의 역사에 닿아 있고, 우경화‧주류화에 맞서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도 사회주의의 역사적 계보에 위치시킬 수 있다.
이 사상의 시초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일으킨 수정주의 논쟁에서 형성되었다. 즉 마르크스주의를 베른슈타인이 수정하고자 하였고, 그에 반론이 제기되며 벌어진 논쟁이라는 의미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른슈타인은 칼 카우츠키와 함께 마르크스의 수제자로 꼽혔었고,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유언집행자이기도 했던 인물이다(그런데 스승이 죽자마자 배신을 때렸다). 베른슈타인을 비롯한 수정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예견한 역사법칙과 자본주의 파국론에 회의를 품고, 특정한 목적지(혁명의 완성)를 설정하지 않는 '장기 개혁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 논쟁의 전개와 결과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