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 운동은 모든 것을 의미하며, 사회주의의 궁극적 목표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
마르크스의 후예들과 노동자 정당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주의 운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노동운동도 급성장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은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다. 착취 관계를 끊고 당신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과학이다.’라고 가르쳤다. 몇 푼 안 되는 급여에 살인적 노동 강도를 견디던 노동자들이 보기에 얼마나 매력적인 주장인가? 노동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무기로 삼아 자본가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는 노동조합과 정당의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전자가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일상적 경제투쟁 단위였다면, 후자는 사회주의 전환을 위한 정치투쟁 단위로 이해되었다. 특히 정당은 예나 지금이나 마르크스주의의 화두 중 하나이다.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언명처럼, 마르크스주의에서 당은 사회주의 이행의 지도적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후예들은 대중조직인 노동조합에 노동자들을 모으는 한편, 전위조직인 노동자 정당을 앞세우며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독일의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이 그중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이 당은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정당 이전에 최초의 정당이기도 하다. 역사가 무려 1863년부터 시작된다. 이 해 라이프치히에서는 페르디난트 라살의 주도로 전독일노동자연맹이 창설된다. 변호사 출신인 라살은 헤겔좌파를 거쳐 사회주의자가 된 인물이다. 그는 마르크스와도 교류했지만,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 헤겔의 영향을 받은 라살은 국가를 '자유의 실험대'로 보아 노동계급 해방에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도 생전에 라살을 강하게 비판했다.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파악한 마르크스에게 라살은 순진하거나 멍청한 몽상가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사민당에는 아주 초기부터 라살로 대표되는 수정주의 경향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전독일노동자연맹은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사회민주노동당과 통합해 1875년 독일 사회주의노동자당으로 재탄생했다. 그런데 통합하자마자 1878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자 탄압법에 직면했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사민당에게 두 가지 효과를 냈다. 외부로 드러나는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내부의 마르크스주의 이념은 더욱 강화된 것이다. 권력의 탄압이 도리어 저항의 결속력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페르디난트 라살은 독일 사민당의 창당 주역 중 하나다. 그는 창당 초기 개혁주의 경향을 대표하며, 이는 후일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로 이어진다.
현재 당명인 ‘독일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으로 개칭한 것은 1890년 비스마르크 실각 이후부터다. 이때부터 사민당은 꾸준히 의석수를 늘리며 수권정당으로 성장했다. 이 무렵 당을 이끈 지도자들의 면면이 꽤나 화려하다. 대표적인 인사가 프리드리히 엥겔스, 칼 카우츠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 사후 「자본」의 유고를 편집해 2, 3권으로 출판한, 마르크스의 분신과 같은 존재였다. 당연히 사회주의 운동에서 그의 권위는 대단했다. 카우츠키는 당대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꼽혔던 인물이다. 그는 오늘날 「자본」의 4권으로도 분류되는 마르크스의 유고집 「잉여가치학설사」의 책임 편집자였다. 요컨대 마르크스가 생전 끝내지 못한 과업을 이어받은 이들이 둘이나 사민당에 있었던 것이다.
베른슈타인도 카우츠키 못지않은 명망가였다. 그는 후배 카우츠키와 함께 1891년의 에르푸르트 강령을 작성하였다(다만 이 강령은 카우츠키가 쓴 초반 혁명론 부분과 베른슈타인이 쓴 후반 정치적 실천 부분이 서로 잘 안 맞는, 괴이한 문서라는 평이 많다). 그러니까 인적 계보로 보면, 마르크스의 적통은 블라디미르 레닌과 소련이 아니라 독일 사민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사민당은 유럽 사회민주주의 진영 내에서도 보수성향이 강한 편이라서, 마르크스와 잘 연결이 되지 않지만 말이다.
독일 사민당의 중앙당사 빌리 브란트 하우스. 독일 사민당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 출범했지만, 지금은 전체 사회민주주의 진영 내에서도 꽤 오른쪽에 속한다.
베른슈타인의 도발적 문제제기
엥겔스까지 사망한 직후인 1896년부터 사민당 내에서는 격렬한 노선 투쟁이 벌어진다. 이는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논쟁의 중심에는 놀랍게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충실한 후계자였던 베른슈타인이 있었다. 생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를 이론가로서 높이 평가했고, 특히 엥겔스는 자신의 유언 집행자로 지목할 정도로 신임했다. 그의 변신 이유로 영국에서의 망명 기간이 결정적이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흔히 제기된다. 봉건적 생활양식이 잔존했던 고향 독일과 달리, 고도로 발전한 영국을 보며 혁명을 회의하지 않았겠느냐는 해석이다.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의 두 가지 핵심 테제를 부정했다. 자본주의 파국론(사적 유물론)과 계급정당론이 그것이다.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일으키는 모순에 의해 자본주의가 파국에 이를 것이며, 이때 노동자 정당이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했다.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실천적 지향은 바로 이 과학법칙으로서 자본주의 파국론의 전제 위에 있는 것이었다. 이건 비유하자면 유교의 삼강오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과도 같다.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정수에 해당하는 부분이어서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사적 유물론은 유교의 삼강오륜,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비슷한 권위를 갖는다.
하지만 베른슈타인은 이 전제가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는 사회유기체로서 여러 위기를 거치며 오히려 변화·발전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본주의란 괴물은 전투를 거듭할수록 전투력이 더 높아지는 「드래곤볼」의 사이어인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위기를 겪으며 발전하는 자본주의는 싸울수록 전투력이 높아지는 사이어인과 비슷하다.
자본주의가 파국에 이르기 위한 필수 조건은 계급양극화이다. 그런데 베른슈타인은 유럽 사회에서 오히려 중간계급이 두터워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즉 자본주의 발전은 이전에는 없었던 사회계급의 새로운 양상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식회사의 증대로 소수 대자본가가 아닌 모든 계층을 망라하는 ‘주주’라는 무리의 공동소유자들이 늘어나고, 농업·상공업의 소생산도 마르크스 예언과 달리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새로운 중간계급으로서 사무직·공무원 등 화이트칼라가 급성장하여 계급구조를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에서 이러한 근거들을 실증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유물론자란 신을 갖지 않았을 뿐인 칼뱅주의자”라고 일갈한다. 마르크스가 과학이라고 자부한 사적 유물론을 졸지에 신학적 교리로 만든 것이다. 대신 베른슈타인이 중시한 것은 자유, 평등과 같은 지향 가치였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 사회주의를 자처한다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윤리적 사회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베른슈타인의 논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폭력혁명 노선의 폐기로 이어진다. 대신 ‘노동계급의 정치적 진출 -> 선거 승리 및 권력 장악 -> 국가의 민주적 개조 -> 사회주의적 조치 실행’으로 기본전략을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라살의 노선을 복원하자는 것이기도 하다. 당 전략의 수정은 정체성의 변화도 동반한다. 즉 사민당은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만의 계급정당이 아니게 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늘어나는 중산층, 쁘띠부르주아지들도 포섭하는 국민정당으로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를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닌, 인민들의 삶을 개선해나가기 위한 지속적인 운동으로 재규정했다. 서두에 쓴 베른슈타인의 ‘운동이 모든 것’이라는 선언은 이렇게 현실적 삶의 조건을 바꾸어 나가는 일상적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베른슈타인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궁극의 이상향이 아니라 현실 극복을 향한 끝없는 운동이다.
베른슈타인이 단순히 논리적 분석의 결과로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다. 1873~1896년의 불황기에도 실질임금은 지속 상승했고, 1896년 이후 성장국면이 이어지면서 독일 노동자들의 생활여건은 크게 나아졌다. 이러한 변화로 노동자들은 근본주의보다 개혁주의로 기우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반영하듯 사회주의자 탄압법 폐지 이후 사민당은 상당한 의석을 확보해 단숨에 집권을 바라보게 됐다. 사민당은 1890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19.7% 득표를 기록했고, 1912년 선거에서는 34.8%를 얻어 원내 다수당이 되었다. 이러한 성장은 합법적 수단을 통한 사회주의 이행을 낙관하게 만들었다. 당 원로인 엥겔스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말년의 그는 '부르주아들은 바로 그들이 만든 합법적 정치수단에 의해 몰락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논쟁과 비난 : ‘개량주의’라는 욕설
이렇듯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베른슈타인의 반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것이 수정주의 논쟁이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비판을 받았다. 요즘에도 강경 좌파들 틈에서 저런 주장을 하면 사알못 취급을 받을 것이다. 하물며 마르크스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당시에는 오죽했겠는가. 1899년 하노버 당 대회, 1903년 드레스덴 당 대회에서 수정주의가 검토되었지만 압도적 차이로 부결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거부도 좀 웃긴 것이었다. 이미 사민당은 실천적으로 수정주의를 그대로 따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운동 출신의 초창기 당원들에게 수정주의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사민당 후배 카우츠키는 물론, 블라디미르 레닌,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로자 룩셈부르크 등 난다 긴다 하는 네임드들이 모두 나서서 베른슈타인을 깠다. 특히 로자는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라는 책까지 내면서 베른슈타인을 저격했다. 로자는 베른슈타인의 주장은 노동계급에 침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일 뿐이며,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에서 생활여건을 개선할 수 있다는 주장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또한 베른슈타인이 주목한 자본주의의 위기 적응 능력은 오히려 위기의 심화 수단이라고 비판한다. 로자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카르텔, 신용체계,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달, 노동계급의 지위상승 등을 통해 언뜻 위기에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무정부적인 자본 축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결국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 밖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레닌도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베른슈타인을 자본주의에 빌붙는 기회주의자이며 그의 사상은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려는 술책에 불과하다고 깠다. 특히 1917년 레닌이 러시아 혁명에 성공하자, 베른슈타인에 대한 비판은 그야말로 정점에 올랐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사민당의 수정주의를 가장 강력히 비판한 혁명가다.
아마 수정주의, 개량주의라는 말이 좌파가 동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이 된 게 이 무렵부터일 것이다. 단언컨대 세계 사회주의 운동사의 올타임 넘버원 어그로는 베른슈타인이다. 실제로도 수정주의는 당시의 이론적 헤게모니 싸움에서 패배했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베른슈타인의 물렁한 관점이, 당대 최고의 키워들이었던 레닌, 로자 등의 정통주의를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는 혁명에 성공한 소련을 비롯해 사회주의 국가들이 점차 현실이 되어가는 시기였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진정한 후계자는 독일인들이 아니라 혁명을 성공시킨 자신들이며, 개량주의와 선을 긋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독자적으로 체계화해나갔다.
논쟁 이후 : 이론의 패배, 실천의 승리
그런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수정주의가 사민당의 주류적 지위로 올라선다. 사람 사는 원리에 비춰볼때 이는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주의란 곧 언제가 될지 모르는 싸움을 준비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뛰어드는 과업이다. 그러니 소수 선진 활동가가 아닌 평범한 대중들은 주저할 수밖에 없다. 대체 온다는 파국은 언제 오는 것인지, 파국이 온다 해도 총칼을 독점한 자본가들과 어떻게 싸워 이길 것인지, 이긴다 해도 그 사회가 이전보다 낫다는 보장이 있는지 등에 대해 마르크스주의는 시원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즉 인간사의 보편적 상식에서 볼 때 마르크스주의는 너무도 멀고, 불분명하고, 어렵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이론가들끼리의 매치업은 베른슈타인의 패배로 끝났지만, 대중적 실천의 영역에서는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 대회는 수정주의를 부정했지만, 이후 사민당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의석수는 꾸준히 늘었고, 1914년에는 심지어 원내 다수당으로서 1차 세계대전을 위한 공채 발행을 승인했다. 이 결정으로 사민당은 사회주의의 대의를 저버린 배신자들이자 전범들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사회주의 운동이 본격 분화하기 시작한다. 즉 1864년 제1인터내셔널 결성 이후 성장한 국제 사회주의 운동은, 1914년 사민당의 참전 결정과 1917년 러시아 혁명 성공을 계기로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로 나뉘게 된다.
이러한 분리는 독일 내에서도 이루어졌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의 스파르타쿠스 동맹으로 결집하여 1918년 독일 공산당을 창당했다. 카우츠키를 비롯한 사민당 내 좌파들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채택했지만 소수파에 머물렀다. 대신 베른슈타인의 후예들이 당의 다수파를 완전히 점했다. 이들의 주도로 사민당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해 수정주의와 국민정당 노선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단독 집권에도 성공(빌리 브란트 내각)했다.
유럽의 다른 노동자 정당들도 대부분 독일 사민당과 비슷한 길을 갔다. 영국 노동당, 스웨덴 사민당 등에서 베른슈타인과 비슷한 흐름이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영국 노동당에서는 창당의 한 축이었던 페이비언 협회의 점진주의가 당의 기본노선이 되었다. 조지 버나드 쇼, 시드니 웹 등이 이끈 페이비언 협회는 태생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는 무관한 집단이었다. 여기에 이념보다는 노동조건 개선에 관심이 많은 노동조합이 주축을 이루다 보니, 당의 노선은 자연히 실용주의 성향을 띠었다. 반면 스웨덴 사민당은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 출범했지만, 독일 사민당처럼 노선 투쟁의 결과로 수정주의자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초창기 지도자였던 페르 알빈 한손이 제창한 '국민의 집'이라는 비전 아래, 에른스트 비그포르스 같은 뛰어난 이론가가 (자유주의도, 마르크스주의도 아닌) 제3의 길로서 사민주의 노선을 확립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