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페이비언 협회의 점진적 사회주의

by 배대웅

* 시리즈 이전 글

1편 사회주의의 역사적 계보와 사회민주주의

2편 독일 사회민주당과 수정주의 논쟁


“형이상학적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전혀 없고, 영웅적 패배보다는 지루한 성공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 조지 버나드 쇼(1856~1950)


수정주의 논쟁의 변주들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은 독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 곳곳에서 나타났다.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 등의 맹아가 이때 형성됐다. 동시에 수정주의 세력들의 의회 진출이 본격화됐다. 그러나 선거를 통해 자본주의를 장기 개조하려 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사정은 조금 복잡했다. 국가별로 형성되어 있는 정치·사회적 조건과 문화가 다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에는 마르크스처럼 완성된 이론체계를 제시해주는 선지자가 없었다. 따라서 본인들의 상황에 맞는 집권전략을 어떻게 구사할 것인가가 고민거리였다.


영국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으로 튀는 나라였다.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와 성숙한 노동계급을 함께 갖고 있었다. 이는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혁명의 유력 후보지로 영국을 첫 손에 꼽은 이유이기도 했다. 대부분 저술활동을 런던에서 한 마르크스는 영국을 이념형으로 삼아 자본주의를 분석했다. 또한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로버트 오언 등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그만큼 영국은 마르크스주의에서도 중요한 위상을 가지는 나라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 영국은 사회주의로 넘어가기 직전에 있었던 것이다.

런던 하이게이트에 있는 마르크스의 묘지. 마르크스는 영국 자본주의를 분석하며 대부분 저술활동을 런던에서 했고, 사후 그곳에 묻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영국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근본주의보다는 점진주의, 경험주의, 실용주의의 특징이 훨씬 강했다. 영국도 프랑스 못지않게 사회주의의 유서가 깊은 나라다. 실제로 로버트 오언, 윌리엄 모리스, G. D. H. 콜, 버트런드 러셀 같은 사회주의자들도 많이 배출했다. 그러나 그중 마르크스주의자는 없다. 윌리엄 모리스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도 있다 : “그것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역시 사회주의자라고 믿는다. 적어도 유한계급은 부유하고 노동계급은 가난하다는 것, 부자의 풍요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한 것이라는 정도의 경제적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에 잘 안다.” 영국은 경험주의의 지적 전통이 깊은 나라인데, 모리스의 언급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마르크스주의는 고도로 추상화된 이론체계다. 이는 경험의 축적에서 사유를 이끌어내는 영국 지식인들에게 처음부터 어필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페이비언 협회의 창설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는 영국의 점진적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단체다. 요즘으로 치면 싱크탱크에 가까운 활동을 했다. 이들은 대중 계몽과 제도 개혁을 통해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고 믿었다. 그래서 적을 괴롭혀 힘을 소모시키는 전략을 잘 썼던 로마의 장군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Quintus Fabius Maximus)의 이름을 따, 스스로를 페이비언(Fabian)이라고 불렀다. 페이비언들은 ‘침투’라는 전략적 개념을 즐겨 썼고 실제 활동도 그렇게 했다. 즉 몇몇 지식인들이 담론과 조직의 내부로 들어가 대중들을 설득해 변화를 일으키고자 했다.


페이비언 협회의 창립은 18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세계 자본주의의 독점적 지위를 오래 누려왔으나, 1870년대 말 미국, 독일 등의 약진에 따라 불경기를 맞았다. 불경기는 실업과 노동조건 악화로 이어졌다. 이는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사회주의의 부활’이라고 부른 상황을 만들어냈다. 당시 영국에서는 노동자운동과 관련된 클럽과 협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중 변호사이자 증권 중개인인 에드워드 피스가 중심이 된 이상주의자들의 모임이 페이비언 협회의 시작이다. 여기에 모인 이들은 주로 작가, 교수, 성직자, 공무원 등 지식인층이었다.

페이비언 협회의 창립 장소에 붙은 알림판(왼쪽)과 페이비언 협회 사상가들을 다룬 책 표지(오른쪽). 책 표지 이미지는 페이비언 협회의 출판물들을 살펴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중 조지 버나드 쇼와 시드니 웹-베아트리스 웹 부부는 페이비언 협회를 대표하는 회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페이비언 논집(Fabian Essays)」 , 「페이비언 뉴스(Fabian News)」 등에 발표했다. 여기에 실린 페이비언들의 글들은 추상의 이론보다는 실증적 분석으로 구성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초창기 페이비언 협회의 활동은 여느 지식인 클럽처럼 텍스트 강독과 토론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페이비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직접적인 사회조사 활동을 진행하기로 한다. 대표적 사례가 20세기 초 웹 부부가 수행한 사회조사연구다. 이 연구는 런던 동부의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노동조건 실태를 파악하고 데이터를 수집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페이비언 협회를 대표하는 회원들. 왼쪽부터 베아트리스 웹, 시드니 웹, 조지 버나드 쇼.




「소수파 보고서」 : 현대복지국가의 오래된 미래


조사활동은 성공적이었다. 웹을 비롯한 페이비언들이 1905년 빈민법과 빈곤구제에 대한 왕립위원회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2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페이비언들은 소수파였다. 이들은 활동을 결산하며 별도로 「소수파 보고서(Minority Report)」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빈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제안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빈곤은 개인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인식되었다. 그러나 페이비언들은 빈곤의 원인을 노동 수요의 변화, 노령, 질병, 교육 등 사회 구조에서 찾았다. 따라서 빈곤 해결은 개인들의 단순 구제보다는, 사회 차원의 체계적 예방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봤다.


이외에도 이 보고서에는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진보적 제안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그중 특기할만한 것이 국민생활최저선(National Minimum)과 보편적 복지 개념이다. 요컨대 국가는 모든 국민이 특정 수준 이상의 삶을 살도록 보장해야 하며, 국가의 복지서비스는 국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복지국가의 정책적 기초를 이때 이미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감한 제안들은 아이디어에 머물러야만 했다. 정부가 소수파는 물론 다수파 보고서조차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페이비언들은 당시 막 창당한 노동당과 함께 빈민법을 폐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수당이었던 자유당의 반대로 실패했다. 그때까지 페이비언 협회의 정치적 입장은 자유당과 노동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즉 수권급 자유주의 정당인 자유당을 진보화하자는 입장과, 독자 진보정당인 노동당을 키우자는 입장이 공존했던 것이다(페이비언 협회는 노동당 창당의 주역 중 하나였다). 그런데 빈민법 폐지 실패를 계기로 페이비언들은 대거 노동당으로 선회한다. 1923년 자유당과 연합해 첫 집권한 노동당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면 오히려 자유당을 정치적으로 지워버린다.

20세기 이후 출범한 노동당은 불과 50여 년 만에 역사와 전통의 자유당을 지워버렸다.

노동당과 함께 페이비언들의 「소수파 보고서」도 부활했다. 저 유명한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대표되는, 「베버리지 보고서(원제 : 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로 말이다. 집필을 총괄한 윌리엄 베버리지는 원래 자유당 성향의 경제학자였다. 그러나 소싯적 웹 부부의 사회조사에 참여했다는 특이한 경력이 있었다. 그가 정부의 의뢰를 받아 1942년 발간한 이 보고서는 과거 「소수파 보고서」의 문제의식을 상당 부분 반영했다. 하지만 보수당 정부는 재정부담을 이유로 보고서의 제안을 대부분 무시했다. 결국 정권이 교체되어 노동당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이 「베버리지 보고서」를 기초로 광범위한 사회복지정책을 추진했다. 오늘날까지 많은 영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국민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ystem)도 그중 하나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복지국가 건설의 중요한 레퍼런스가 되었다.

베버리지 보고서(왼쪽)와 보고서 발간을 알리는 1942년 당시의 언론 보도(오른쪽)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배경과 기초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여러 면에서 단절적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감(또는 무관심)은 당시 영국 지식인 사회가 공유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표적 페이비언인 버나드 쇼는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대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위한 고전적 모델이지만 학문적 의미를 제외하고는 거의 실효성이 없다.”고 논평했다. 또 애덤 스미스의 전기를 쓴 존 래는 영국인들의 눈에 비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는 영국이 빠진 노동자운동은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의 글은 공자의 글만큼이나 알려져 있지 않다.” 영국의 독특한 역사적 특징이 마르크스주의를 아웃 오브 안중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점들을 몇 가지 갖고 있었다.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사상의 주도적 위치를 거의 점하지 못했다.

우선 지배적 사상 속에 늘 비판적 사상이 존재해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멀리 러다이트 운동에서부터, 리카도 사회주의, 협동조합 사회주의, 차티스트 운동, 사회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모순을 비판한 사상운동은 꾸준히 있었다. 이런 사상들이 수용되면서 급진적 사회비판의 선명성은 희석되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영국 노동계급에게 엄청난 지적 충격을 주지는 않았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이전에도 자신들을 대변해주는 사상들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과 국가기구도 상당히 유연하게 통치했다. 그들은 아래로부터의 항의를 무조건 억압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헤게모니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회유와 양보를 병행했다. 19세기 후반 선거권 확대, 노동조합 기금 합법화, 파업권 등이 이러한 맥락에서 도입되었다. 심지어 영국 정부는 시드니 웹 같은 사회주의자에게 작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이는 ‘국가는 자본가들의 이익조정위원회’라는 핵심 테제를 무력화시켰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낫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중간계급의 성장도 중요했다. 중간계급의 존재는 독일 수정주의 논쟁에서도 중요한 논점이었다. 자본주의 파국론의 전제는 계급 양극화인데, 오히려 중간계급이 두터워지고 있다는 것이 베른슈타인의 주장이었다. 영국에서도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시기 영국의 중간계급은 다른 나라에 비해 사상적으로 특이한 면이 있었다. 그들은 국가와 사회 운영을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동시에 하층계급에 대한 연민도 가졌다. 이러한 특징이 새로운 이념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19세기 말~20세기 초 수십 종의 신문과 잡지가 창간되었고, 각종 토론클럽과 정치조직도 생겨났다. 페이비언 협회도 그중 하나다. 대표적 회원인 버나드 쇼는 작가, 시드니 웹과 시드니 올리비에는 공무원, 그레이엄 월러스는 대학강사, 베아트리스 웹은 연구자였다. 중간계급으로서 이들은 정서적으로 자본가보다는 노동계급에 연대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사회의 역관계를 자본가로만 쏠리지 않게 하는 효과를 냈다. 이렇듯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연대를 바탕으로 국민적 사회주의 운동을 추구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중간계급의 자기표현 수단이기도 했다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영국 노동계급의 실리주의 성향을 들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가 진행된 영국답게 노동계급도 일찍부터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들을 통합하는 단일 형태의 노동운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계급적 동질성보다는 조직 또는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적 행동을 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구체적 현안에 따라 이익 투표하는 비율이 높았고, 이 때문에 보수당도 노동자들의 꽤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1880년대 이후 사회주의가 부활했다고 하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과 사안별로 행동을 같이 했을 뿐, 그들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노동당의 창당과 성장을 주도한 것도 노동조합이었지 사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지지 역시 노동 현안 해결로 집중되었다. 달리 말해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은 정치이념보다는 오히려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두드러졌다. 예컨대 펍(pub), 축구, 뮤직홀, 영화, 도박, 휴가, 가족 등이 노동자들이 공유하는 계급 콘텐츠였다. 영국 노동계급은 지배기구의 억압을 받지 않고,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의식도 없는 상황에서, 독자적인 오락‧여가 문화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보수주의와 실리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국 노동계급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 펍(pub), 맥주, 축구.




영국 노동당 : 점진적 사회주의와 실리적 노동조합주의의 결합


영국 사회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노동당은 바로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마르크스주의보다는 점진적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실리주의, 노동조합주의와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페이비언들은 이 점을 잘 활용했다. 이들은 노동계급을 무리하게 사회주의 깃발 아래로 모으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노동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이용했다. 그래서 정당의 명칭도 사회당이나 사회민주당이 아닌 ‘노동당’으로 정한 것이다.


창당의 산파 역할을 한 것은 페이비언 협회, 독립노동당, 사회민주연합의 세 단체였다. 이 단체들은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대부분 중간계급 지식인이었던 이들은 본인들만으로는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창당의 판을 깔았고, 노동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세심한 기획에 따라 움직였다.


1900년 이 세 단체의 합의로 출범한 '노동대표위원회'라는 선거 대응조직이 노동당의 모태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노동조합들이 합류하지 않았다. 굳이 정당이 아닌 위원회라는 어정쩡한 명칭을 쓴 것도, 정치활동이 익숙하지 않은 조합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고려였다. 이 위원회가 노동당으로 개칭한 것은 6년 뒤고, 사회주의 당헌이 채택된 것은 그로부터도 12년이 더 지난 뒤의 일이다.

페이비언 협회에서 발언하는 키어 스타머 노동당 당수(왼쪽)와 페이비언 협회의 2021년 신년 메시지(오른쪽). 1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페이비언 협회는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일단 창당은 했지만 노동조합을 끌어들여 당의 주체로 세우는 일은 지난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고, 자신들이 지도적 위치로 나서지도 않았다. 대신 자유당 성향의 노동자 램지 맥도널드를 초대 위원장으로 추대해 노동조합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또한 노동조합의 입지 강화를 위해 단체발의안과 블록투표안도 도입했다. 이로써 노동조합원들은 조합의 가입에 의해 자동으로 노동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또한 노동조합이 하나의 의사결정단위로서 당의 정책에 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노동당은 말 그대로 노동조합에 의한, 노동주의 정당이 되었다. 그러자 다른 입장을 가진 노동운동 분파들, 반정치적 실리주의 노동조합들도 차츰 노동당으로 모여들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노동당은 명실상부한 영국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이 되었다. 독일 사민당의 수정주의와는 또 다른 경로를 통해, 향후 유럽 사회민주주의를 대표할 정치세력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독일 사회민주당과 수정주의 논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