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가정에는 평등, 배려, 협력, 도움주기가 만연해있다. 이를 커다란 인민의 그리고 국민의 가정에 적용한다면, 현재 국민을 특권층과 소외층, 지배자와 신민, 수탈자와 피수탈자로 나누는 모든 사회적·경제적 장벽의 철폐를 의미한다.” - 페르 알빈 한손(1885~1946)
20세기 초 사회주의자들은 정당의 역할 설정에 고민이 많았다. 본래 마르크스주의 정당론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했다. 노동자의,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계급정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노동자들을 조직해 자본주의 타도의 정치적 전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당의 임무였다. 이 논리는 자본주의가 곧 파국에 이르러 사회주의라는 신세계가 펼쳐진다는 전제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1890년대 초 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약 10년 정도면 자본주의가 파국을 맞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그렇게 쉽게 망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많은 사회주의 정당들이 말로는 혁명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선거와 개혁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맏형 독일 사민당부터 그러했으니 나머지들은 더 볼 것도 없었다. 베른슈타인이 들고 나온 수정주의는 그런 흐름의 자연스러운 반영이었다. 자본주의 체제 내 일상적 정치 활동이 당 운영의 중심이 되면서 계급정당론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었다. 사회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마르크스 경전 속 가르침일 뿐, 현실의 정치적 전략을 담보해주지 못했다. 대신 자본가를 포함하는 국민국가 구성원 모두를 잠재적 지지자로 상정하는 실천이 힘을 얻었다. 이른바 국민정당론이 계급정당론을 대체한 것이다. 이로써 사회주의 정당은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가 아닌, 운영의 주체가 되고자 하였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이하 사민당)도 그중 하나다. 현대 사회민주주의 국가 스펙트럼에서 스웨덴은 가장 왼쪽에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스웨덴은 유럽에서도 사민당 집권 기간이 가장 길면서 또한 심각하게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스웨덴 사민당이 추진한 ‘임노동자 기금안’이 대표적 예다. 이 계획은 기업 초과 이윤의 일정 부분을 노동조합 기금에 적립시켜, 수십 년 내 노동자들이 기업의 최대 주주가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그어진 ‘선’을 넘는 행위였던 것이다. 이렇듯 스웨덴은 ‘사회주의로의 점진 이행’이라는 사회민주주의의 최초 목표에 근접했던 거의 유일한 국가다. 그런 스웨덴 사민당이 일찍부터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국민정당론을 채택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여기에도 나름의 역사적 맥락이 있다.
1889년 창당한 스웨덴 사민당은 본래 진퉁 마르크스주의 정당이었다. 사실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내건 정당들이 대부분 그러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적자인 독일 사민당이 그들의 롤 모델이었고, 카우츠키의 노선이 정통으로 인정받았다. 카우츠키 이론은 한 마디로 단계론이었다. 사회주의 정당은 개혁과 혁명을 모두 임무로 삼아야 하며, 이 둘은 상호 배척 관계가 아닌 단계적으로 이어지는 과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이 언제쯤 일어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때까지는 열심히 개혁에 매진하면 되기 때문이다. 혁명의 순간이 도래하면 비로소 혁명정당의 역할을 하면 된다는 것이 카우츠키의 논리였다.
하지만 이는 절충이자 봉합일 뿐이었다. 사실 혁명을 준비하면서 개혁도 추구한다는 논리는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개혁은 체제 합리화를 위한 것이고, 개혁의 성과가 쌓이면 혁명의 필요는 없어진다. 반대로 혁명이 목표라면 개혁은 애초에 무의미한 일이 된다. 어차피 뒤엎을 체제인데 일부 합리화하는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예 처음부터 체제 전복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 마르크스의 후예 중에 누구도 이 혁명과 개혁의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유럽 사회주의 운동은 공산주의(혁명주의, 계급정당)와 사회민주주의(개혁주의, 국민정당)로 쪼개진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도 이러한 분화를 거치며 재정립되었다. 두 명의 선구자가 이를 주도했다. 페르 알빈 한손과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다. 한손은 정치가, 비그포르스는 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비그포르스가 사회민주주의 이론을 정책으로 설계했다면, 한손은 뛰어난 리더십으로 이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뤄냈다. 게다가 이때는 대공황과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혼란의 시대이기도 했다. 한손과 비그포르스는 사회민주주의 진영을 넘어서 위기에 처한 스웨덴 사회를 통합하는 새로운 국가전략을 제시했다. 이들이 내세운 비전은 ‘국민의 집(forkhemmet; people’s home)’으로 요약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가들을 타도하고 노동자 독재체제를 만들어야만 사회주의가 완성된다고 보았다. 그들에 의하면 이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과학이다. 그러나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전혀 다르게 정의했다. 사회주의란 타도가 아닌 포용의 이념이며, 그 본질 또한 과학이 아니라 윤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특정 계급이 국가를 독점하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국가 공동체 내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상호 연대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도 달라진다. 국가의 폭력적 전복 투쟁이 아닌, 국가의 안정적 운영에 필요한 정책과 제도의 개발이 더욱 중요해진다.
물론 이러한 전환은 단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웨덴 사민당은 창당 후 1920년대까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도로 수권정당으로 성장했다. 이 시기는 스웨덴의 고도성장기와도 겹친다. 스웨덴은 산업혁명이 비교적 늦었지만, 이후 40년 넘게 실질 GNP 성장률이 연 3%를 넘는 유럽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그러나 고도성장이 끝나고 이어진 대공황과 노사분쟁에 사민당은 적절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렇게 맞은 1928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공산당과 연대했다. 같은 노동자 계급정당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결과는 대패였다. 보수파 연합은 사민당이 내세운 급진적 상속세 공약과 공산당과의 연대를 집중 공격했다. 이들은 사민당이 승리하면 러시아 볼셰비키들이 스웨덴을 집어삼킬 것이라 주장했고, 이 색깔론이 통하면서 지지율이 급락했다. 성장세를 지속해온 사민당으로서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그해 당수가 된 한손은 선거 패배를 계기로 혁신에 착수했다. 그 방향은 기존보다 좀 더 실용적, 대중적, 통합적인 성격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오랫동안 당을 이끌어 왔던 카우츠키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한손은 당과 대중을 결합시키는 대중성의 정치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념과 정책 이전에, 대중을 설득하여 정치적 힘을 조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당의 철학을 재구성하고, 자본가, 농민, 중산층 등으로 지지의 외연을 넓혀나가는 전략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한손의 정치관을 잘 보여주는 슬로건이 ‘국민의 집’이다. 한손은 1928년 의회 연설에서 이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즉 국가는 특정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거나 타도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며, 가족들이 그렇듯 누구도 소외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따뜻한 집 같은 곳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한손은 대중정치인으로서 국민들 앞에서 난해하거나 급진적인 언사를 쓰지 않았다. 대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친숙한 개념들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끌어안는 포용의 리더십을 앞세웠다. 사민당의 지향을 쉽고 명쾌하게 제시한 ‘국민의 집’ 명연설도 그래서 탄생할 수 있었다. ‘국민의 집’은 한손 시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스웨덴 사회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철학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한손을 필두로 사민당의 개혁은 다양한 차원에서 진행됐다. 우선 공산당 등 급진좌파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보수파 연합의 일원이었던 농민당과 연대했다. 두 정당의 주요 지지층인 노동자와 농민들의 이해는 원래 대립하는 관계였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높은 농산물 가격을 감내하며 농민들에게 가격 보장을 해주고, 농민들은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을 지지하는 형태로 타협을 이뤄냈다. 이러한 연대는 2차 세계대전 중 거국중립내각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한손이 이끄는 대연정 내각은 나치독일과 연합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중립노선으로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했다. 인류 최대, 최악의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국토와 국민을 보존한 스웨덴이 전후 경제성장에서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노사 대타협을 이뤄냈다. 1920~30년대 스웨덴은 유럽에서 노동쟁의가 가장 격렬한 나라 중 하나였다. 대공황 극복을 위해 사민당은 대규모 건설사업을 통한 경기부양을 도모했지만, 파업 장기화로 계획에 차질을 빚을 정도였다. 이에 스웨덴 노동조합총연맹(LO)과 사용자협회(SAF) 간의 협상을 중재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살트셰바덴 협약이다. 협약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였다. 1. 노동자들은 경영자들의 지배권을 보장하고, 2. 경영자들은 일자리 제공과 기술투자에 힘쓰며, 3. 기업이익금의 85%를 사회보장 재원(법인세)으로 내놓는다는 것이다. 이후 쟁의는 대폭 줄어들었고, 노‧사‧정이 타협과 양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의사결정의 기틀을 마련하게 됐다. 스웨덴 복지국가 시스템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코포라티즘(조합주의적 의사결정)은 그렇게 확립된 것이다.
경제‧사회정책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까지 사민당은 (다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그랬듯) 사회화‧국유화 전략을 기본 노선으로 갖고 있었다. 다만 이것은 실업률이 20% 이상으로 치솟는 위기 상황에서 별다른 처방을 내려주지 못했다. 1928년 총선의 대패도 이러한 위기관리방안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에 경제학자 비그포르스가 새로운 대안을 내놓는다. 비그포르스는 경제위기의 장기화 가능성을 예측하고, 정부 지출을 늘려 대규모 공공근로사업을 벌여 고용을 늘리고 경기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봤다. 이를 통해 폭락한 농산물 가격을 지지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수인 한손도 언제가 될지 기약하기 힘든 사회화보다는, 국민의 삶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며 이를 지지했다.
사실 이러한 경기부양책은 현대에는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인 시도로 여겨졌다. 그때만 해도 국민경제의 운용원리는 시장에 모든 걸 맡겨야 한다는 부르주아 경제학과, 생산수단 사회화로 자본주의의 상시적 위기를 원천 차단해야 한다는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극단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그포르스의 대안은 그 중간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부 재정을 늘린다는 발상에 보수정당들은 반대했고, 사민당 내 급진파들 역시 사회화를 주장했다. 실제로 총선을 앞둔 1932년 당 대회에서 비그포르스의 제안은 격렬한 논란 끝에 근소한 차이로 채택되었다.
이 시기 경제‧사회정책의 재정립은 국민정당론과 함께 사민당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된다. 이전까지 사민당은 먼 미래의 계획(사회주의적 사회화)은 있지만, 당장의 위기를 해결하는 현재의 해법(국민경제 운용)은 부족한 정당이었다. 비그포르스도 이를 “우리 당은 향후 100년 동안 성취할 경제 강령은 갖고 있지만, 향후 10년 동안의 경제 강령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꼬집은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일반화되지 않은 케인스 경제학을 전격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이는 일종의 반경기순환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즉 ‘정부 재정 투입 -> 고용 확대 -> 소비 촉진 -> 경기 활성화 -> 정부 재정 재투입’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그 핵심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이론화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고용, 이자,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이 발간된 것이 1936년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주류 정책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다. 미국의 사회학자 테다 스카치폴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케인스주의를 도입한 것은 영국이나 미국이 아닌 스웨덴이며, 스웨덴의 성공이 케인스주의 확산의 중요한 계기였다고 평한 바 있다.
비그포르스는 본래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좌파 인사였다. 하지만 그는 주류경제학에도 밝았으며, 케인스의 초기 저작과 영국 사회주의 이론을 연구하면서 정부 개입을 통한 총수요관리이론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미래의 유토피아적 전망 못지않게,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바꿔나갈 일상의 정책도 중요하게 여겼다. ‘잠정적 유토피아‘는 비그포르스의 이러한 지론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즉 예측 가능한 미래에서 실현할 중장기 사회개혁을 추진하되, 이를 확정하지 말고 경험을 통해 수정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일상의 정치와 중장기 비전을 결합함으로써, 사민당은 적절하면서도 총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수권정당의 면모를 확실히 했다.
사민당은 이러한 혁신을 바탕으로 1932년 총선에 임했다. 그리고 국민정당으로서 경기를 부양하고 투자를 촉진해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비전을 강조했다. 더불어 기업활동을 장려하고, 농민들과도 연대하는 등 다양한 계급을 포용하고자 했다. 이것은 이전 총선에서 공산당과 함께 급진적 상속세 부과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것과는 다른 행보였다. 그리고 집권에 성공하는데, 이것이 무려 44년에 이르는 사민당 장기 집권의 출발점이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개혁은 이후 복지국가 건설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즉 우리가 ‘스웨덴 복지국가’라고 하면 떠올리는 제도의 원형들이 이 시기에 주로 완성되었다는 의미다. 협력적 노사문화, 노‧사‧정이 동참하는 정책결정, 계급타협을 통한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등이 그것이다. 집권 이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긴 호흡에서 필요한 제도들을 꾸준히 도입했다. 실업보험, 모성보호지원금, 주택대출지원금, 유급휴가 등이 그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원대한 이상에서 봤을 때, 이 제도들은 자본주의를 털끝만큼도 위협하지 못하는 시도일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에 걸친 제도개혁이 축적되면서, 스웨덴 사회민주주의는 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보다도 인민들이 살기 좋은 국가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