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자본주의의 전망은 밝지 못했다. 우선 유럽과 일본은 초토화됐고, 그들의 식민지도 대부분 독립했다. 산업 기반이 붕괴된 그들이 당장 재기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전쟁 이전보다 생산력이 늘어난 유일한 국가는 미국이었다. 생산량의 폭발적 증대는 물론, 전시의 기술 혁신(자동차, 비행기, 무기, 통신 등)으로 압도적인 대량생산체제를 갖췄다. 그러나 그런 미국의 미래도 불투명했다. 전쟁을 뒷받침했던 수요가 사라지면 불황과 실업이 일어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경제학자들이 종전 후 미국 경제가 1930년대 대공황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그런데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역사에 유례가 없는 성장세가 20년 넘게 이어진 것이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부터 1차 오일쇼크가 일어난 1973년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이 기간 세계 자본주의는 역대 최대의 생산력 향상과 안정된 부의 재분배를 실현했다. 이를 경제사에서는 ‘자본주의 황금기(Golden Age)’라고 부른다.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 미국의 성장을 중심으로, 유럽과 일본이 놀라운 속도로 경제부흥을 이뤄냈다. 선진국뿐만 아니라 막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신생 국가들도 그 혜택을 보았다. 세계은행 통계에 의하면 1950년~1970년의 1인당 연간 경제성장률은 선진국 4.0%, 개발도상국 1.7%, 전체 3.0%를 기록했다. 자본주의 역사의 어떤 시대도 황금기의 이 기록적인 성장률 근처에도 이른 적이 없다.
유럽의 자본주의 황금기를 보여주는 한 짤 요약. 이 정도의 성장률을 기록한 적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어떻게 이런 시대가 가능했을까. 미국의 경제사학자 로버트 하일브로너는 자본주의 황금기의 주요 특징으로 국제적 세력 관계, 소비 수요 확대, 기술 진보, 자본과 노동의 타협, 정부 역할 강화를 꼽는다. 이 모든 요소들이 선순환하면서 세계적 장기 호황을 뒷받침했다는 설명이다.
자본주의 황금기를 만든 요인들
먼저 미국의 주도로 이전에 없던 제도들이 만들어졌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orld Bank), 브레튼우즈 체제가 그것이다. 앞의 두 기관은 현재도 존재하며,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국가들에 대규모 자금 대출을 해줘 재건과 발전을 촉진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금본위제의 기반 위에서 달러를 기축 통화로 하는 안정적인 국제금융질서를 확립했다. 여기에 무역과 관세에 관한 일반 협정(GATT), 마셜 플랜 등이 더해지면서 국제협력의 수준은 더욱 높아졌다. GATT 가입국은 최혜국 대우에 따라 무역 장벽을 낮춰야 했으며, 120억 달러짜리 원조 패키지였던 마셜 플랜은 유럽의 구매력을 되살리는 역할을 했다. 구매력을 회복한 유럽은 주로 미국 제품을 수입했기 때문에, 마셜 플랜은 결국 쌍방에 이득이 되었다.
이 협력적 제도들은 냉전이라는 새로운 지정학적 환경에서 작동했다. 미국은 소련과 손잡고 파시즘과 싸웠지만, 승전 후에는 자본주의의 맹주로서 공산주의와 대립했다. 수십 년 간 두 진영 사이에는 언제라도 무력 사용으로 발화될 수 있는 긴장감이 흘렀다. 따라서 경제정책이 반드시 일국적 경제논리를 따라서만 운용되지 않았다. 자본주의 동맹의 유지·강화라는 정치적 요인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했던 것이다. 공산주의의 최전선과 맞닿아 있던 서독과 일본이 이런 이유에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특히 일본은 농업국가로 전락할 위기에서 벗어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병참 기지 역할을 하면서 고도의 기술산업국가로 성장하게 됐다.
소비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해 성장의 압력으로 작용했다. 전쟁 기간 필수 물자들은 일반인들에게 대부분 배급제로 묶여 있었다. 석유와 식료품은 말할 것도 없고, 대규모 생산라인이 대부분 비행기와 전함을 위해 가동되었기 때문에 자동차 생산량도 부족했다. 전쟁이 끝나자 소비자들은 그간 억눌러온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전쟁 내내 하릴없이 저축에만 몰려있던 노동자 임금이 풀려나와 구매에 나섰다. 이에 자동차, TV, 냉장고, 전화기, 세탁기 등 중산층을 상징하는 소비재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1950년대 미국 중산층의 모습을 상징하는 라이프 지의 표지.
기술 진보가 이러한 소비의 욕망을 더욱 부추겼다. 대규모 전쟁을 치르며 이루어진 기술 혁신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어디 가지 않고 신산업을 뒷받침했다. 예컨대 비행기 생산기술이 그랬다. 비행기가 전투용에서 운송용으로 전환되면서 관광업 발전을 견인한 것이다. 제트 여객기는 휴가를 즐기려는 부유한 미국인들을 미국 대륙은 물론 유럽 곳곳으로 실어 날랐다. 비행기 외에도 TV, 자동차 등의 기술 혁신이 뒤따랐고, 이는 각 부문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신제품을 쏟아내며 소비를 자극했다. 일례로 1950년대 미국 전체의 TV는 1백만 대를 살짝 넘었지만, 1960년대에는 5천만 대 이상으로 늘어났다.
황금기의 주역 중에는 놀랍게도 노동조합도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자본과 타협해 호황이 임금 상승 압박으로 이어지지 않게 한 것이다. 자본 입장에서 호황은 노동에 대한 수요를 높여 임금 지출을 늘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것이 이윤 창출을 상쇄시키는 상황에 이르면 자본은 투자를 줄이고, 그러면 호황도 끝난다. 장기 호황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자본과 타협을 이루어 이를 가능하게 했다. 타협의 핵심은 생산성 향상 목표의 공유였다. 노동조합이 오히려 생산성 개선과 기술 진보에 앞장섰고, 임금 상승분 이상의 이윤 창출 효과를 자본에 가져다주었다. 국민소득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 임금과 자본의 이윤이 함께 늘어나는 것이다. 그 결과 자본은 자신감을 가지고 더 많은 투자에 나섰고, 이것이 장기 호황을 이어가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정부가 지휘했다. 이전까지 정부는 시장의 관망자에 가까웠고, 그래서 대공황이 닥쳐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아니, 정부가 나서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대공황의 와중에 집권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취임 100일 만에 대규모 개혁을 추진했다. 경기 부양, 공공인프라 확충, 반독점, 노동권 보장, 사회보장제도 확대 등 기존 자본주의에는 없는 프로그램들이었다. ‘뉴딜’로 불린 이 정책 패키지는 말 그대로 국가와의 새로운 계약을 의미했다. 경제학의 새로운 주류로 떠오른 케인스주의가 이러한 변화에 이론적 정당성을 제공했다. 자본주의는 황금기에도 호황과 불황을 순환했지만, 정부가 재정 정책을 통해 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재정 정책으로 거시 경제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케인스주의의 대표적인 정책 처방이다. 이렇듯 정부는 자본주의 국민경제의 가장 강력한 기획자이자 조절자가 되어 황금기를 최선두에서 이끌었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Tennessee Valley Authority)가 주도한 댐 건설. 뉴딜을 대표하는 경기부양 및 고용창출 정책으로 꼽힌다.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동기화
하일브로너의 설명에서 보듯 황금기의 자본주의는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는 통제되어야 한다는 합의가 반영된 결과였다. 이에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요소들이 자본주의에도 도입되었다. 그 결과 자본주의인 듯 자본주의 아닌 자본주의 같은 자본주의가 등장했다. 이는 혼합경제, 수정자본주의, 내장된 자유주의(embedded liberalism)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달리 말하면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동기화시킨 플랫폼 체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후의 자본주의 혁신을 계기로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보다는 자본주의에 훨씬 가까워졌다.
사실 20세기 초반까지도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완전히 나눠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만했다. 당시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최초의 국가(소련)가 등장했고, 대공황 때문에 자본주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래도 명색이 사회주의 정당인데) 혁명 노선의 완전한 폐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자본주의-공산주의 양극 체제가 정립되자 모호함은 깔끔히 사라졌다. 사회민주주의도 자본주의 진영의 일원으로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를 명확히 한 것이다. 그 기준점은 다당제 정치와 자본주의 소유관계에 대한 인정 여부였다.
1957년 영국의 헤럴드 맥밀런 총리는 "이보다 더 좋았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Never had it so good)"라고 연설했다. 이는 황금기의 향수를 상징하는 문장이 되었다.
1951년 결성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이를 대변한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해체된 제2인터내셔널(국제사회주의연대)의 계승을 자임하며 출범했다. 1889년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제2인터내셔널은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아우르는, 말 그대로 범사회주의 국제운동조직이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의 1차 세계대전 참전 결정이 빌미가 되어 분열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계급보다 민족을 택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제국주의 전범 취급했고, 소련이 중심이 되어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결성했다. 이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강령인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공산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전통을 오히려 퇴행시켰고, 자유의 가치를 부정하는 일당독재, 군국주의, 관료주의 체제라는 것이다.
이로써 베른슈타인과 로자가 시작한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의 오랜 논쟁은 마침내 ‘각자 제 갈 길 가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사이 두 번의 세계대전, 러시아혁명과 소련의 등장, 자본주의의 자기 혁신 등의 변화들이 있었다. 이중 2차 세계대전을 사회주의 운동사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는 사회주의라는 메타이념에 근거해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같은 맥락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물론 사회민주주의는 자신들이야말로 자유, 평등, 연대의 정신을 계승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후 적지 않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장기 개혁’보다는 ‘유지·관리’에 더 치중하면서, 그런 주장도 무색해졌다.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탄생
자본주의 황금기는 사회민주주의에도 황금기였다. 전후의 자본주의 혁신과 성장에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공로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유럽의 자본주의 황금기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집권기와 상당 부분 겹친다. 영국 노동당(1945년)과 독일 사회민주당(1969년)이 첫 집권에 성공했고,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1932년~1976년), 노르웨이 노동당(1935년~1963년), 덴마크 사회민주당(1950년~1968년)은 장기 집권을 이어갔다. 이로써 현대자본주의의 중요한 성취로 평가받는 ‘복지국가’ 모델이 만들어졌다.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는 코포라티즘(corporatism), 케인스주의, 복지제도 등의 정책 수단을 통해 작동했다. 이것들은 정치·경제·사회의 각 영역에서 긴밀히 상호작용하며 복지국가의 정교한 체계를 뒷받침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복지국가는 단순히 복지 지출을 늘린다고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선 경제의 안정적 성장세를 유지하며, 그 성과를 사회 제 세력의 합의를 통해 배분하고, 이를 다시 성장에 대한 자극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이중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면 복지국가는 엄청난 갈등과 낭비를 초래할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의 정책 조합은 따로 떼어보아도 어려워 보이는 이 목표들을 서로 선순환하게 만드는 데 탁월했다.
우선 코포라티즘은 국가가 매개가 되어 자본과 노동을 체제 내로 흡수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를 구성하는 국가, 자본, 노동의 대표들이 모여 합의한 결과를 각 부문에 일괄 적용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를 조합주의, 협약정치 등으로 번역하지만, 의미의 결이 다양해서 정확히 대응하는 우리말 개념이 없다. 다만 언론에서 쓰는 ‘노사정 합의주의’라고 하면 어느 정도 핵심이 전달된다. 초창기 코포라티즘은 국가의 필요로 조직되었기에 강압적, 보수적 양상을 보였다. 19세기 후반 독일 제국의 정치가 그러했다. 당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 탄압법으로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한편, 세계 최초로 사회 보험을 도입하는 등 포섭책도 함께 썼다. 사회 제 계급을 직접 제어해 의회를 무력화시키겠다는 정치적 계산에서였다. 후일 독일의 히틀러 정권,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도 비슷하게 국가 주도로 사회 계급을 통합했다. 이를 정치학에서는 국가 코포라티즘(state corporatism)으로 개념화한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코포라티즘은 이와 목적과 운영 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국가의 필요에 따른 위로부터의 통합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자율적 합의를 국가가 중재한다는 점이다. 즉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가 주요 행위자로서 협상하고, 국가는 조정자 역할을 맡는다. 이를 국가 코포라티즘과 구별하여 네오 코포라티즘(neo corporatism) 또는 사회적 코포라티즘(social corporatism)이라고 한다. 전자가 국가 주도의 계급통합 모델이라면, 후자는 사회 중심의 계급타협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코포라티즘은 사회민주주의 정치 환경에 특히 최적화되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필립 슈미터는 사회적 코포라티즘의 성공 요인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꼽는다. 배타적 지위를 공인받은 노사 대표 조직, 회원들을 통제할 수 있는 지도부의 리더십, 중앙집권화된 조직체계. 유럽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에는 이러한 사회문화적 요소들이 잘 갖춰져 있었다.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의 세계 최고 수준 조직률을 바탕으로, 각 지도부가 강한 통제력을 발휘하여, 중앙정부와 집중화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이는 협의 과정의 돌발 변수는 최소화하고, 정책의 혜택은 소속 구성원들이 고르게 받는 효과를 낸다. 즉 결정의 안정성, 참여의 평등성, 효과의 파급성이라는 측면에서 장점이 있다.
사회적 코포라티즘의 원형으로 꼽히는 1938년의 살트셰바덴 협약. 스웨덴 사민당 정부의 중재로 노동총연맹(LO)과 사용자총연맹(SAF) 사이에 체결되었다.
계급타협, 성장모델, 탈상품화
코포라티즘의 계급타협은 케인스주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어찌 됐든 자본과 노동이 모두 만족하려면 경제 성장과 고용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둘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이들이 코포라티즘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 케인스주의는 정부 개입을 통한 유효수요 관리로 성장과 고용의 동시 증진을 가능케 했다. 이때 유효수요는 총수요함수와 총공급함수가 교차하는 영역에서 결정되며, 실제 소비와 투자를 합친 것이다. 이는 정책적으로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국부의 산출을 함수화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케인스 이후 다양한 생산함수 모델이 개발되었다. 이전에 성장은 자기조절적 시장(self-regulating market)이 만들어내는 ‘신비한 현상’이었을 뿐이다. 그것이 이제 인위적으로 통제 가능한 변수들의 결과물이 되었다. 성장을 ‘정책’으로서 입안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케인스주의는 이를 통해 경제의 지속 성장을 담보함은 물론 완전고용까지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복지제도 확대는 이러한 코포라티즘-케인스주의 정책 패키지의 필연적 결과였다. 이 패키지에서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는 이익집단을 넘어 통치기구로서 기능하게 된다. 물론 이를 사적 영역의 과도한 정치화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들의 일상에 중요한 사회·경제 현안들이 활발히 공론화되어 정책에 반영될 수 있었다는 점도 분명하다. 이 패키지는 어떤 면에서는 의회보다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의회는 대의민주주의 기구로서 국민들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를 대리해서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듯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솔직히 말해 안 그런 경우가 더 많다). 흔히 말하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인 것이다. 코포라티즘-케인스주의 정책 패키지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복지제도들을 대거 도입했다. 노동조합 대표들이 임금 인상 요구를 억제하고 거대자본의 경영권을 인정하는 대신, 국민들 누구나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을 권리로서 누리도록 요구한 결과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기초연금, 생활지원 수당, 사회보험 등 복지국가의 대표 브랜드들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는 단순한 제도를 넘어, ‘국가가 개인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현대국가의 운영원리로서도 체계화되었다.
본래 복지제도는 사회민주주의의 발명품이 아니다. 오히려 앞서 언급했던 보수주의자 비스마르크에게서 국가 복지제도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사회민주주의에서는 복지를 특정 집단을 위한 지원책이 아닌, 시민권의 일부로서 정립했다는 특징이 있다. 즉 복지란 그 국가에 태어나면 누구든 기본으로 깔고 시작하는 권리의 총합이라는 의미가 된다. 덴마크의 사회학자 요스타 에스핑 안데르센은 이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을 한 바 있다. 그는 탈상품화와 사회계층화라는 두 가지 지표를 기준으로 서구 복지국가를 유형화했다. 탈상품화는 개인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지 않아도(즉 일을 안 해도) 생활이 보장되는 정도를, 사회계층화는 계층 간 생활 수준의 상대적 차이를 의미한다. 이 구분법에 의하면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는 탈상품화 정도는 높고 사회계층화 정도는 적다. 즉 복지가 기본권으로 작용하기에 적게 노동해도 어느 정도의 삶은 보장받고, 본인 노력 여하에 따라 계층 상승도 자유롭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볼 때 사회민주주의가 복지제도를 발명한 것은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틀 내에서 그 수준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요스타 에스핑 안데르센이 제시한 서구 복지국가의 세 가지 유형. 사회민주주의는 복지를 특정 계층을 위한 지원이나 보상이 아닌, 보편적 시민권으로 정립했다.
이렇듯 자본주의 황금기는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전성기와 맞물리며 전개됐다. 오랜 세월 이상만 드높았던 사회민주주의는 이 시대에 이르러 고유의 체제 운영 방법론을 확립했다. 그것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사적 이익을 국가의 공적 이익으로 전화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그러니까 본인들의 조상 격인 칼 마르크스의 철학과는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른 셈이다. 노동자와 자본가가 꼭 파이를 두고 싸우는 제로섬 관계(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파이 자체를 함께 키우는 포지티브섬 관계(사회민주주의)도 가능함을 입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