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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May 09. 2024

본업과 부업

나의 본업은 회사원이다. 누군가 본업에 대해 물으면 이렇게 답하곤 한다. “기계 속 부품과 같은 존재”라고. 자조적인 표현 같지만, 진짜 그렇다. 회사라는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기 위해 나는 부지런히 돌아가야 한다. 물론 혼자서는 기계를 못 돌린다. 다른 부품들과도 서로 맞물려야 한다. 그런데 만약, 나라는 부품이 빠진다면? 기계는 어떻게 될까? 잠깐 멈출 수는 있겠지만, 이내 문제없이 돌아간다. 시중에 넘치는 다른 부품으로 교환해도 되고, 이왕 낡은 거 아예 빼버려도 된다. 회사원이란 대개 그런 존재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나는 내 적성에 맞도록 장치화된 부품이라는 것이다. 2009년에 회사원이 되고 나는 직장을 두 번 옮겼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거의 한 가지 업무만 했다. 전략기획, 또는 정책기획이라고 하는 것이다. 보고서 쓰기가 90%인 일이다. 예전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이 업무에 거부감이 없었다. 그리고 매년 엄청난 양의 보고서를 썼다. 다 합치면 아마 수천 페이지쯤 될 거다. 도대체 뭘 쓰길래 그리 많냐고?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회사에서 가장 최근에 작업한 보고서다.

위 보고서는 특정 연구소와 아무 연관 없습니다(...)


보기에는 허접해도, 이거 쓴다고 4월 내내 풀야근했다. 아내가 말하길 어느 날 딸래미가 “근데 아빠는 오늘도 안 와?”하면서 잠들었다고 한다(딸램 미안ㅜㅜ). 아무리 일머리가 없어도 같은 일을 반복하면 요령이 생긴다. 나도 그랬다. 일이 손에 익으니, 주위에서 글 잘 쓴다고 칭찬해줬다. 그때 생긴 별명이 배작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을 더 시키려고 붙인 별명(응 잘하니까 니가 하렴^^) 같지만, 어쨌든 작가라고 하니까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같은 일을 10년 넘게 하니 권태기가 왔다. 어차피 순간의 필요만 충족하고 아무도 안 읽을 글, 쓰면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쯤 부업을 시작했다. 브런치 작가라는 부업 말이다. 브런치는 비슷한 플랫폼인 네이버, 티스토리와는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작가’라는 호칭이다. 나를 포함해서 브런치에 글을 쓰는 모두가 작가다. 본업인 회사에서는 나를 배책임이라고 부른다. 그보다 부업인 배작가가 훨씬 우아하고 격조있고 간지난다. 실제로 브런치 동료 작가님들이 배작가라고 불러줄 때마다, 처음에는 좀 머쓱했지만, 진짜 작가가 된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 호칭이 듣기 좋아서 브런치에 글을 열심히 썼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작가라고 불러주니까 나는 정말 작가가 되었다. 브런치에 올린 글을 보고 이런저런 제안들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 제안은 모 건설사 홍보실에서 주었다. 사보에 내 브런치의 <과학은 어떻게 인류의 삶을 바꾸는가>라는 글을 싣싶다고 했다. 그렇게 처음 작가로서 글을 기고하고, 30만 원을 원고료로 받았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참 감격적이었다. 세상에 내가 글을 써서 돈을 벌다니!

      

이후에도 여러 곳에 내 이름으로 글을 실었다. 신문, 과학잡지, 과제보고서, 과학정책지 등등. 그러다 좋은 출판사를 만나 책까지 냈다. 그게 계기가 되어 강연도 했다. 이제는 정말 많은 사람이 나를 작가라고 부른다. 물론 작가가 여전히 부업임에는 틀림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냉정히 계산해보면 작가로서의 수입은 아직 0에 가깝기 때문이다(『최소한의 과학공부』 인세를 아직 못 받은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본업이면 어떻고 부업이면 또 어떤가. 그저 작가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얼마 전에는 뜻밖의 일이 있었다. 번역하다라는 번역가들의 동인지에서 기고 의뢰를 한 것이다. 그곳의 편집자께서 내 브런치의 <번역을 하는 이유>라는 글을 싣고 싶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번역 문외한인 내가 전문 번역잡지에 글을 도 될까 싶었는데, 상관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냥 하기로 했다. 다만 원문은 많이 거칠어서, 좀 더 공들여 다듬어서 넘겼다. 그 글이 최종 편집되어 실렸다. 그것도 커버스토리로.


작가로서 겪은 이 모든 일이 나는 여전히 신기하다. 작가라는 업은 그야말로 신세계다. 비록 부업이라고 해도 말이다. 앞으로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나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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