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건 당신이 무지한 탓은 아니다. 과학이라는 독특한 학문이 우리의 보편적 사고 범위와 잘 맞지 않아서 그렇다. 초미세 세포와 입자를 들여다보고, 눈에 뵈지도 않는 힘들의 관계를 따지며, 우주의 운행을 천문학적 숫자로 풀어내는 일이 쉽겠는가. 수십 년 연구만 한 과학자도 이 짓은 어렵다고 한다. 하물며 비전공자인 당신이 과학이 쉽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과학을 그나마 쉽게 이해하려면 역사적 접근이 유용하다. 세상 모든 학문이 그렇듯 과학도 시대의 요구에 따라 탄생했다. 과학의 배경을 이루는 시간과 사건을 맥락화하여 그 관계성에 주목해보자. 그럼 적어도 세 가지는 알 수 있다. 이런 연구가 왜 필요했고, 어떻게 조직되었으며, 인류 문명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 과학 자체보다는 그것의 의미를 깨닫는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렇게 과학과 역사를 함께 읽는 데 도움을 주는 책들이 있다. 보통 과학사로 분류된다. 역사라고 하면 오래전 흘러간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알기 쉽다. 하지만 헤겔이 갈파했듯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날개를 펴는 법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나간 역사에서 배울 것이 많다. 지금 소개하려는 책들에는 시대와 대결하면서 인류의 행로를 바꾼 과학자들의 분투가 담겨 있다. 그것은 과학을 이해하는 지적 즐거움은 물론, 불확실성의 현대를 돌파할 비전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여러모로 의미 있는 독서가 될 것이다.
김영식(2001), 『과학혁명: 전통적 관점과 새로운 관점』, 아르케.
과학의 기원을 단순히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긴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은 유럽에서 전개된 근대 과학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서 태동하여 뉴턴의 중력으로 일단락되는 이 과정은 과학이라는 독특한 세계관과 실험 방법을 만들어냈다. 이로써 과학은 자연철학으로부터 독립했고, 과학이 아닌 학문들에 대한 차별화에 성공했다. 오늘날 ‘비과학적’이라는 규정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보라. 과학이 갖는 권위는 학문은 물론 일상에서조차 심대하다.
이 책은 과학혁명이 진행된 근대 초기 100여 년의 역사를 추적한다. 과학혁명을 다룬 많은 책이 있지만, 이 책이야말로 가장 표준적인 해설서일 것이다. 그만큼 기존 문헌의 해석들을 망라하면서, 그 관점 차이를 비교‧종합하고, 공백으로 남은 문제들은 보완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갈릴레오의 역학, 하비의 생리학,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 뉴턴의 종합과 계몽사조에 이르기까지, 과학혁명을 구성한 분야와 인물의 요점을 밝히고 그 연계점을 짚는다. 요컨대 통사적 관점을 취하면서 개별 주제들도 세세하게 일람한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이런 추상과 구체 간의 ‘황금 균형’에 있다. 과학혁명의 전체 구도를 조망하면서 구체적 논점도 놓치지 않고 싶은 독자에게는, 이만한 입문서가 없을 것이다.
저자 김영식 선생은 우리나라 과학사 연구의 1세대다. 1947년생으로 서울대 화학공학 학사와 하버드대 화학물리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박사학위는 프린스턴대에서 역사학으로 받았다. 1977년 서울대 화학과 교수로 부임했으나 2001년부터는 동양사학과에서 가르쳤다. 또한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과학사‧과학철학을 협동과정으로 개설하기도 했다. 책에서 돋보이는 과학적 엄밀함과 인문학적 서사는, 이런 독특한 이력으로 쌓은 내공의 표출인지도 모르겠다.
야마모토 요시타카(2010), 『16세기 문화혁명』, 동아시아.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을 빼고 서양사를 논할 수 없다. 유럽은 두 사건을 거치며 암흑의 중세에서 계몽의 근대로 나아갔다. 르네상스는 15세기, 과학혁명은 17세기에 절정을 맞았다. 15세기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꽃 피운 인문주의 사상과 예술, 17세기 뉴턴역학이 정식화한 보편중력의 체계가 그러했다. 이는 오랜 세월 신의 종으로 복무해왔던 인류의 독립선언과도 같았다.
그럼 16세기는 어디로 사라졌나? 기존 서양사 연구는 눈에 띄는 이벤트가 없는 이 시대를 계륵처럼 취급하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은 16세기의 의미를 전혀 다른 맥락에서 복원한다. 그것은 단절이 아닌 연결이다. 즉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을 잇는, ‘문화혁명’의 시대라는 것이다. 혁명을 이끈 것은 무명의 기술자, 상인, 화가, 광부, 외과의 등이었다. 르네상스기 상공업과 문화예술이 발달하면서 사회 중하층에서 퍼져 나간 직업군이다. 이들은 길드에서 기술을 전수받고 연마했으며, 그 결과를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기록했다. 경험으로 체득한 이 기록들은 과학혁명을 촉발하는 도화선 역할을 한다. 코페르니쿠스, 베살리우스, 하비, 갈릴레이, 뉴턴 등은 대부분 대학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발견은 어느 날 뚝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앞 세대 직인들이 축적한 실용적 지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중세의 귀족과 달리 직인들을 멸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배우고자 했다. 르네상스가 잉태한 16세기 직인들은 그렇게 17세기 과학혁명의 원류가 되었다.
저자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이러한 민중적 시각은 살아온 이력에서 짐작할 수 있다. 1964년 도쿄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그는 엘리트로서 미래가 보장되었고, 일본의 차세대 노벨상 1순위로 촉망받았다. 그러나 1968년 도쿄대 전공투 의장으로서 반체제 학생운동을 이끌면서 인생이 반전되었다. 체포 후 4년을 복역한 그는 어느 나라의 민주투사들처럼 운동권 경력을 훈장 삼아 기득권이 되지 않았다. 대신 재야에 머물며 근대과학사와 1960년대 학생운동을 성찰하는 저술 활동에만 전념했다. 그래서일까,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문장에서는 고고한 선비와도 같은 올곧음이 배어 나온다. 여기에 방대한 문헌과 사료에 기초한 학문적 치밀함 역시 갖춰져 있다.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주저 없이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토비아스 휘터(2023), 『불확실성의 시대: 찬란하고 어두웠던 물리학의 시대 1900-1945』, 흐름출판.
19세기 물리학자들은 “이제 물리학은 끝났다”라고 일갈했다. 그러니까 자연의 모든 원리를 밝혀서 더 연구할 게 없다는 선언이었다. 뉴턴의 역학은 우주 만물의 운동을 정확히 계산해냈고, 맥스웰의 전자기학은 물리학의 오랜 난제였던 빛의 본질까지 규명해버렸다. 1874년 대학입학시험에 합격한 막스 플랑크도 물리학 교수로부터 똑같은 말을 들었다. 그래도 음악(그는 수준급 피아니스트였다)보다는 전망이 좋을 것 같아 물리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26년이 흐른 1900년, 호기롭던 물리학자들을 데꿀멍시키는 이론을 발표하게 된다. “에너지란 처음부터 일정한 양, 즉 양자의 정수배로만 존재한다.” 이른바 양자가설이다. 에너지를 연속적인 흐름으로 본 기존 물리학과는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이것은 신호탄일 뿐이었다. 뒤이어 뉴턴과 맥스웰 센세의 유산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론들이 쏟아졌다. 광양자가설, 상대성이론, 입자‧파동 이중성, 불확정성 원리, 핵분열… 결국 이 새로운 물리학은 300년 가까이 작동해온 기존 이론체계를 ‘고전’의 영역으로 추방해버렸다.
이 책은 이렇게 고전물리학이 현대물리학으로 바뀌는 격동기를 포착했다. 모든 패러다임 교체가 그러하듯 이 과정도 혼돈의 카오스였다. 수많은 이론이 쏟아져서 백가쟁명 백화제방으로 논쟁이 붙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아인슈타인-보어 논쟁만 하더라도 몇 년을 징하게 이어갔다. 다만 이 책은 이론보다는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 막스 플랑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헨드릭 로런츠, 마리 퀴리,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오토 한… 이들이 서 있던 사회적 위치와 배경에 상당한 서술을 할애한다. 그러다 보니 책이 한 편의 군상극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사람에 포커싱한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현대물리학으로의 전환 과정이 복잡한 수학적 계산이 아닌, 현실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으로 다가온다.
사실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은 물리학보다는 경제학에서 더 유명하다. 이 제목의 원저작자는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라는 미국의 비주류 경제학자다. 그가 같은 제목의 책을 낸 것이 1977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고도성장해온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지고, 신고전파나 케인스주의 등 주류 경제학의 처방이 전혀 먹히지 않던 때였다. 갤브레이스는 이런 혼돈의 시대를 ‘불확실성’으로 정의하면서, 변화한 현실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이론적 상상력을 제안했다.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이 책의 저자 토비아스 휘터도 같은 생각에서 이 제목을 썼을 것이다. 휘터는 독일 출신의 작가로 철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저널리스트답게 아주 생동감 넘치는 글을 쓴다. 언젠가 브런치에 독일인 저자의 인문사회 고전은 스킵하라고 쓴 적이 있다. 이 책은 예외다. 조지프 퓰리쳐는 글쓰기의 비결로 “그림 같이 써라, 그러면 기억에 머무를 것이다.”라고 한 바 있다. 휘터는 이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다. 무거운 과학사를 다루면서도 각 장면과 캐릭터가 드라마처럼 그려지게 만든다. 과학 글을 쓰는 작가로서 닮고 싶은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