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가를 좋아하는 데에는 세 가지 동기가 작용한다. 사상, 지식, 문체. 남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그렇다. 사상적으로 따르는 작가는 최장집이다. 오래전 접한 그의 현실론적 정당 민주주의는 지금도 내 세계관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지식의 방대함으로는 장하석을 꼽는다. 그의 치밀한 논증에 인용되는 과학사의 풍부한 사례들은 언제 읽어도 흥미롭다. 문체는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다. 물론 나는 하루키와는 다른 분야의 글을 쓴다. 하지만 그 간결하면서도 리듬감이 느껴지는 문체만큼은 따라 하고 싶다.
그런데 한 가지 동기가 더 작용할 수 있음을 최근에 알았다.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다. 감정을 감춘 사실적인 글에서도 작가의 성격은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물론 대부분은 읽다가 그냥 지나친다. 타인에 별 관심이 없는 나는 더욱 그렇다. 다만 아주 가끔, 문장에서 언뜻 떠오르는 뭔가가 시선을 붙들 때가 있다. 그것에 주목해서 글을 따라가면 인간적인 호기심에 닿는다. 독자로서 그 답을 글 속에서 열심히 찾다 보면, 결국 작가의 팬이 된다.
『여자 군인의 가벼운 고백』이라는 브런치북을 연재 중인 수진 작가가 그렇다. 처음 그를 접한 계기는 일본에 대한 글이었다. 후쿠오카에 사는 그는 담담한 시각으로 자신이 경험한 일본의 일상 이야기를 풀어냈다. 일본의 과학과 문화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내가 이걸 놓칠 리 없었다. 항상 흥미롭게 읽고 긴 댓글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ㅋㅋ) 남기곤 했다. 주제 못지않게 문체도 인상적이었다. 수진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섬세하면서도 담백한 문장을 쓴다. 주로 자아의 내밀한 문제를 다루는데도 그렇다. 과도한 자기 편향이나 감정의 과잉이 없다. 글만 보아도 그가 내성적인 개인주의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의외의 사실을 알았다. 수진 작가가 여군 장교 출신이라는 점이다. 군 복무를 5년이나 했단다. 나는 군대라고 하면 차갑고 거대한 기계가 떠오른다. 명령에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복종하는 로봇들을 생산하는 기계. 그 몰개성적인 곳에서는 자유, 비판, 상상 같은 글쓰기의 덕목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누구보다 예민해 보이는 수진 작가가 그곳 출신이라니! 처음에는 국방색이 약한(?) 간호나 정보 계통인가 싶었다. 알고 보니 아니었다. 무려 야전의 꽃이라는 소대장 출신이었다. 전장에서 수십 명을 지휘하는 소대장과 감성적인 글을 쓰는 에세이스트라… 두 정체성 사이에 큰 언밸런스가 느껴졌다.
그때부터 수진 작가에게 인간적인 호기심을 느꼈다. 이런 문학적인 사람이 왜 군대에 갔지? 군 생활과는 절대 안 맞을 성향인데 어떻게 견뎠을까? 그 시절에 대한 후회는 없을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수진 작가의 브런치에 마침 여군 시절을 회고하는 글도 꽤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었다. 물론 나는 군대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곳 이야기는 읽고 싶지도 않다. 26개월 동안 직접 경험한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수진 작가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보니 그곳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마치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무지개색으로 바뀌듯 말이다.
나는 군대라는 팍팍한 공간에 던져진 20대 여성에게 감정이입했다. 그러면서 그가 바라본 세상, 그와 갈등하고 번민하는 내면의 이야기를 읽어내려갔다. 군 생활이 힘들었을 것 같다는 예상은 많은 부분에서 사실이었다. 하긴 한창 하고 싶은 것 많고, 예쁘게 꾸미고 싶은 20대 여성 아닌가. 게다가 읽고, 쓰고, 사색하기 좋아하는 작가형 인간이라면, 끝없이 개성을 박탈당해야 하는 군의 관료주의가 더욱 가혹했을 것이다. 수진 작가의 글에는 그 시절을 채웠던 쓸쓸하고 공허한 감정들이 짙게 녹아 있었다. 문득 만추의 차갑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도 꼭 우울하지만은 않았다. 비록 적성에는 안 맞았지만, 긴 시간을 견디며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수진 작가는 5년의 군 생활이 다 끝나고 마침내 삶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전역 후 한동안 그 자리를 온전히 채우는 시간을 갖고 나서야, 한 시절을 마무리 짓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이 이야기가 성장 스토리 같다고 느꼈다. 흔히 성장 스토리라고 하면, 위업을 이룬 사람의 대단한 경험담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그게 꼭 그렇게 극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든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는 일을 할 수 있다. 아니, 아마도 그런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적성에 안 맞는 일을 하는 건 쉽지 않지만, 그저 버티고 견뎌내는 것만으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 또한 성공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브런치에서 한동안 쓰지 않았던 이 <직장인의 인문서재>는 완성된 작품을 리뷰하는 매거진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미완성 작품인 수진 작가의 『여자 군인의 가벼운 고백』에 대해 써본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내가 수진 작가에게 뽐뿌를 넣었다는 점이다. 수진 작가의 여군 생활 이야기가 이대로 묻히기에는 아까웠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나도 공감하는데, 비슷한 경험이 있는 독자, 특히 20~30대 여성에게는 큰 위로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좋은 글감을 다시 꺼내어 새 단장을 해보라고 권했다. 물론 수진 작가가 나 때문에 연재를 시작한 건 아니겠지만, 내 지분도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내 브런치에도 소개해본다.
둘째는 이 작품은 어차피 곧 출간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내가 출판사 편집자는 아니다. 그러나 출간할 만한 글은 분명한 오리지낼리티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수진 작가는 비슷한 글들이 홍수를 이루는 브런치에서 유독 보석처럼 빛나는 글을 쓴다고 전부터 생각해왔다. 그런 작가가 이 좋은 글감을 각 잡고 쓰고 있으니, 책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자전적 소설로 써보라는 내 제안이 안 받아들여진 것은 아쉽다ㅎㅎ). 분명 누군가가 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출간을 제의할 거라 믿는다. 좋은 글은 아무 데나 걸어놓아도 눈에 띄기 마련이니까.
만약 이 작품이 출간된다면 추천의 글은 내가 쓰고 싶다. 아직 완성도 안 된 작품에 이렇게 긴 리뷰 글을 썼으니, 그 정도 자격은 되지 않을까?(ㅋㅋㅋ) 나도 책을 내보니 이제는 다른 사람 책에 추천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다. 물론 추천 글은 아무나 못 쓴다는 걸 안다. 출판업계에 영향력이 있는 유명작가나 가능한 일이다. 내 첫 책에 추천 글을 써준 분들도 그랬다. 그러니 나도 작가로서 유명해져야겠다. 책의 추천 글을 쓰는 일은 책을 쓰는 것 이상으로 영광스러운 경험이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