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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l 14. 2024

쇼미더머니 : 과학에도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로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생각보다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연구만큼이나 후원을 받는 데 열심이었고, 권력자들과도 두루두루 잘 지냈다. 당연히 가톨릭과의 관계도 좋았다. 당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상식에 가까웠고, 성직자 중에는 지동설 강의를 듣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종교재판을 받은 이유는 교황청 모독이었지, 지동설 때문이 아니었다. 게다가 재판 과정에서 갈릴레이는 모독 혐의를 반성했다. 그를 과학의 순교자로 만든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후대의 창작이었을 뿐이다.

     

원래 파도바대학의 수학 교수였던 갈릴레이는 적은 보수가 늘 불만이었다. 그래서 요즘 말로 N잡러를 뛰어서 부족한 수입을 벌충하려 했다. 과외도 하고, 실험 기구를 제작해 팔았으며, 하숙도 쳤다. 그러던 1609년, 자신이 개발한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4개 발견했다. 잘 됐다 싶었던 그는 이를 후원을 받는 데 이용했다. 위성에 ‘메디치의 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다음과 같은 ‘메디어천가’를 지어 헌정했다.

     

전하의 내면에는 절로 고귀한 이 모든 품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모든 선의 원천인 창조주를 본받아 더없이 자애로운 주피터의 별에서 이 모든 품성이 유래했음을 모르는 자 누가 있겠습니까? 전하가 탄생하셨을 때, 지평선의 어두운 안개를 뚫고 중천으로 솟아올라 왕실의 동편을 비춘 별이 바로 목성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하는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2세다. 토스카나의 실력자였던 메디치 가문은 막강한 자금력을 토대로 학문과 예술을 후원해왔다. 요즘으로 치면 연구재단이나 장학재단의 역할을 한 셈이다. 이를 잘 알았던 갈릴레이도 메디치의 눈에 들어 지원을 받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이 ‘메디어천가’는 지원금을 신청하는 프로포절 같은 것이었다. 덕분에 갈릴레이는 메디치 가문의 궁정 철학자가 되었고, 강의와 이런저런 잡일에서 벗어나 큰돈을 받으며 연구만 할 수 있었다. 메디치의 이름값을 이용해 자신의 이론적 권위를 세울 수 있었음도 물론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로 상징되는 강직한 이미지와 달리, 갈릴레이는 현실 타협적인 인물로서 후원금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많은 노력 끝에 메디치 가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과학혁명과 계몽주의의 선구자인 갈릴레이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좀 깨긴 하지만, 딱히 민망한 일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과학에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후원을 받은 과학자는 갈릴레이 말고도 많았다. 티코 브라헤는 덴마크 왕실의 도움으로 천문대를 만들었고, 요하네스 케플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실 천문학자였다. 다만 이렇게 권력자의 신임을 바탕으로 후원받는 방식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자가 갑자기 죽거나 황실의 권력 투쟁에 잘못 휘말리면, 후원도 그대로 끊기고는 했다. 갈릴레이도 코시모 2세가 죽자 새로운 후원자로 교황에게 줄을 댔다. 하지만 엉뚱한 빌미를 잡혀 종교재판까지 받아야 했다.

     

중세의 지배 질서가 무너진 직후에는 이렇다 할 과학의 후원자가 없었다. 신학문으로 부상한 과학을 미심쩍게 여긴 사람 여전히 많았기 때문이다. 중세를 거치며 성장한 대학에서도 과학이 정규 과목으로 편성되지는 못했다. 다만 수학과 의학은 예외였는데, 그래서 아이작 뉴턴이나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같은 학자들은 교수로서 대학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학에서 과학자가 교수로 일하는 사례는 드물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본업이 따로 있으면서 취미 삼아 연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아마추어 과학의 전통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 근대적 원자론의 제창자 존 돌턴(교사), 현미경의 발명자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무역상), 에너지 보존 법칙의 발견자 제임스 프레스콧 줄(양조업자) 등이 그 예다. 이들은 일과 시간에는 직업에 종사하고, 퇴근 후 집안에 갖춰 놓은 실험실에서 연구해서 위대한 발견을 했다. 물론, 로버트 보일, 찰스 다윈처럼 평생 연구만 했어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었던 금수저(부럽…;;)도 있었다.

     

근대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과학 지원에 대한 인식도 바뀌기 시작했다. 근대국가의 설계자들은 과학이 국익에 도움이 되며, 따라서 국가 재정을 투입해서라도 지원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 결과 국가가 공인 및 관리하는 과학단체가 등장했다. 프랑스 절대왕정이 만든 파리과학 아카데미가 그 시초다. 여기에 모인 과학자들은 급여를 받으면서 정부가 의뢰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러니까 현대 국가 R&D 과제의 원형인 셈이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설립되었다. 대프랑스동맹과의 혁명전쟁을 치르면서 부족해진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키우기 위한 국립 학교였다. 파리과학 아카데미 출신 과학자들이 교수진을 맡았고, 전국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은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했다. 아직 신분제가 존재했던 프랑스에서 이러한 인재 선발 방식은 파격적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수학, 물리학, 기계공학 등을 배웠고, 포병과 공병 등의 장교가 되어 전선에 투입되거나 대형 국책 사업을 관리‧감독했다. 오늘날 프랑스 국가행정의 근간이 되는 엘리트 테크노크라트들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확대될 수 있었다.

1894년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물리학 수업을 그린 그림. 이곳을 졸업한 학생들은 프랑스의 근대화를 이끈 테크노크라트로 성장했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났다. 유럽에서도 산업화가 늦었던 독일은 국가가 나서서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 힘을 얻었다. 특히 영국과 미국의 전기‧전신 회사들과 경쟁하던 독일은 국제적 기술 표준의 선점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다만 그러려면 아주 정밀한 수준에서의 측정이 가능해야 했다. 독일 산업계의 ‘큰손’이었던 전기기술자 베르너 폰 지멘스가 이러한 기술적 문제에 직면해 있었고, 그의 호소에 헤르만 폰 헬름홀츠가 동참하여 1887년 제국물리기술연구소(PTR)가 설립되었다. 오늘날 정부출연연구소의 원형인 셈이다. 20세기 들어서는 더욱 진화된 형태의 종합 연구소가 등장하게 된다. 1911년 빌헬름 2세의 칙령으로 설립한 카이저 빌헬름 협회(KWG)다. 그때까지 주로 대학교수였던 과학자의 강의 부담을 완전히 없앤 이 연구소에는, 독일을 대영제국처럼 만들고 싶었던 황제의 제국주의적 비전이 담겼다. 물론 연구소를 만들도록 황제를 부추긴 과학자들의 의도도 명확했다. 당시 공학의 급성장에 위기의식을 느낀 과학자들은, 공학적 응용‧개발과 구분되는 기초연구라는 영역을 확보하여 국가의 안정적 지원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당장 돈이 안 되어도 자연의 원리 규명에 투자해야 결국 산업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였다. 카이저 빌헬름 협회는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며 독일의 위상을 높였고,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는 전쟁 무기 개발에 투입되어 설립 목적을 이행했다.

     

반면 영국의 분위기는 달랐다. 영국은 자유방임주의의 본고장답게 정부가 과학의 스폰서가 된다는 생각을 낯설어했다. 과학자의 호기심 해결을 위한 순수 연구라면 개인이 비용을 내고, 산업기술을 개발하는 실용 연구라면 이득을 볼 기업이 자금을 대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니 국가가 과학에 세금까지 끌어다 써야 할 특별한 근거가 없었다. 오히려 과학자들은 국가의 지원이 과학의 자율성을 훼손할 것이라는 의심도 갖고 있었다. 기업들도 과학 연구로 발생할 이익이 당장 분명하지 않은 한 대규모 자금을 투자할 수 없었다. 1830년대 지질조사국을 설립하는 과정은 이러한 갈등을 보여준다. 지질조사국을 만들면 영국의 주력산업인 광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제안이 나오자, 정부는 광산회사가 그 자금을 내라고 했다. 하지만 광산회사들은 지질조사국을 만든다고 바로 광산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지속적인 로비로 정부가 지원해 지질조사국이 설립되었으나, 국가기관으로 상설화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미국인들의 정서도 이와 비슷했다. 미국에서 과학에 대한 투자는 큰돈을 번 사업가들의 자선사업으로 하는 것이었다. 1902년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가 1,000만 달러를 투자해 카네기 연구소를 설립했고, 석유왕 존 D. 록펠러는 1901년과 1913년 록펠러 의학연구소와 록펠러 재단을 만들었다. 이것은 미국적 자유방임주의 외에도, 아직 미국의 과학기술이 세계적 수준에 이르지 못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카네기가 거금을 들여 연구소를 만든 이유는 미국 과학기술이 뒤처지는 것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미국의 입장은 바뀌었다. 전쟁 중 미국은 20억 달러를 투자한 맨해튼 계획의 성공으로 원자력이라는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 여기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엔리코 페르미, 베르너 폰 브라운 같은 유럽의 과학자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것은 전후 미국 정치경제는 물론 과학기술 패권까지 갖추게 됨을 의미했다. 때마침 맨해튼 계획을 지휘했던 MIT 교수 버니바 부시가 <Science, The Endless Frontier>라는 보고서를 백악관에 제출했다. 부시는 여기서 평화 시대에도 과학기술에 투자하여 그 결과가 산업혁신과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제안은 그대로 수용되어 미국 과학기술 정책의 기본 틀로 자리 잡았다. 정부는 국립 과학재단(NSF)을 설립하여 과학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한편, 항공우주국(NASA), 국립보건연구원(NIH), 에너지부 국립연구소(DoE National Laboratory)들을 통해 국가안보와 산업발전에 필요한 대규모 연구개발을 지휘했다. 현대과학의 패자로 떠오른 미국의 거대한 과학기술 시스템은 이런 과정을 거쳐 확립될 수 있었다.

맨해튼 계획을 총괄했던 버니바 부시가 1945년 백악관에 제출한 <Science, The Endless Frontier>는 미국 정부가 과학기술에 투자하는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오늘날 국가의 과학 투자와 지원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 수준에 따라 국가의 발전 정도가 결정된다는 믿음도 굳건하다. 다만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과학이 불확실성과 우연성의 영향을 많이 받는 학문이라서 그렇다. 뭘 발견할지 예측하기 어렵고, 발견의 결과가 어디에 쓰일지 당장은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예산 계획을 세우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부유한 국가라도 하루가 다르게 샘솟는 과학자들의 아이디어에 무한정 지원할 수는 없다. 게다가 현대과학을 주도하는 입자물리, 천문학, 항공우주 등의 거대과학 연구는 천문학적인 투자와 대비해 얻는 효과가 불확실한 경우가 많다. 미국만 하더라도 1980년대 후반 유럽 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강입자 충돌기(LHC)를 뛰어넘는 초전도 초충돌기(SSC) 개발에 착수했다가, 그 엄청난 금액을 감당할 수 없어 중도 포기했다. 이때 허공으로 흩어진 국가 예산만 수억 달러였다. 일본 정부도 2003년부터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기 위한 가속기 실험에 70억 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했다. 다행히 RIKEN 연구진은 113번 원소 니호늄을 발견해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GDP에 1도 도움되지 않을 순수과학에 그렇게 어마어마한 예산을 쓰는 게 적절하냐는 의문도 제기되었다. 주기율표에 동양에서는 최초의 원소명을 올렸다는 국민적 자부심과는 별개로 말이다.

     

이렇듯 과학에 대한 국가의 투자는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먹고살 여유가 충분한 선진국만이 누릴 수 있는 호화로운 특권이자 플렉스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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