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폐단은 성공을 너무 서둘러 금방 응용 쪽을 개척해 결과를 얻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이화학 연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반드시 순수 이화학의 연구 기초를 다져야 한다.”
- 다카미네 조키치(1854~1922)
과학강국 일본을 이끄는 대형 국가 연구소
과학사는 곧 서양의 역사다. 근대과학은 유럽에서 태동・발전했고, 20세기 이후 현대과학은 미국이 대부분 분야를 주도하고 있다. 일본은 이러한 서양 중심 과학사에 지분을 가진 거의 유일한 동양국가다. 일본 근대과학의 시작은 서양에 비해 100년 이상 늦었지만 빠른 속도로 서양을 따라잡았다. 추격의 비결은 정부의 효율적인 계획과 지원이었다. 개인들이 bottom-up으로 과학을 주도한 서양과 달리, 일본에서는 top-down의 국가정책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발근대국가로서 일본은 근대화를 위해서는 과학 엘리트가 필수적임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그래서 메이지 유신 이후 과학 육성은 국가정책의 상위를 꾸준히 차지해 왔다. 특히 1970~80년대 일본의 경제력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면서 과학에 대한 투자도 정점에 올랐다. 이때 집중 지원을 받은 과학자들이 2000년대 노벨상을 무더기로 받는 원동력이 됐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는 총 24명인데, 이중 18명이 2000년 이후 수상했으며 이는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이다.(축적의 시간이 만든 일본의 노벨상)
이화학연구소(Rikagaku Kenkyujo, 이하 RIKEN)는 이런 일본의 과학을 최선두에서 이끄는 국가 연구소다. 서양이 그랬듯 일본도 일찍부터 대학과 국립 연구소를 과학기술체제의 양대 축으로 운영해왔다. 후자를 대표하는 RIKEN은 1917년 문을 열었다. 설립의 모티브가 된 독일 카이저빌헬름연구회(1911년 설립, 1948년 막스플랑크연구회로 개칭)는 RIKEN보다 역사가 6년 더 길다. 그러나 RIKEN은 카이저빌헬름연구회와 달리 이름을 바꾸지 않고 100년 넘게 이어져왔다.
1917년 기부금 200만 엔으로 시작한 RIKEN은 2019년 예산 988억 엔(약 1조 1,408억 원), 인력 3,572명의 대형 국가 연구소로 성장했다. 흔히 연구소는 세상과 떨어져 존재하며, 국가가 주는 돈으로 초연하게 연구에만 집중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많다. 그러나 이전 글의 막스플랑크연구회 사례(그들은 어떻게 최고의 연구소가 되었나 (1))에서 살펴봤듯, 연구소도 사회・정치 상황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 또한 그 결과에 따라 연구소의 명운도 달라진다. 당연히 RIKEN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부터 이 세계적 연구소는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의 시스템과 위상을 확립했는지 알아보자.
연구 포트폴리오 : 기초와 응용을 포괄하는 국가R&D의 종합 컨트롤타워
‘이화학(理化学)’연구소라는 풀네임에서 보듯, 이 연구소의 초창기 주요 분야는 물리학과 화학이었다. 과학의 기초를 이루는 두 학문을 중심으로 연구소가 태동한 셈이다. 이는 응용・개발 목적을 배제한 순수 기초연구에 집중하자는 설립 철학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RIKEN을 대표한 분야는 핵물리학이었다. 1937년 RIKEN의 니시나 요시오가 미국 이외에는 최초로 사이클로트론(입자가속기)을 개발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폐기(핵무기 개발에 쓰일 수 있다는 이유로)해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니시나 요시오의 후예들이 1966년 더 큰 규모의 가속기 개발에 성공했다.
오늘날 이 세계 정상급의 희귀동위원소 가속기를 운영하는 RIKEN의 연구조직 이름이 니시나센터이다. 이 센터는 별난 원자핵(exotic atomic nuclei) 연구를 통해 핵 수준에서 우주의 기원을 밝히고, 자연상태에 존재하지 않는 초중원소(superheavy elements)를 탐구한다. 특히 113번째 원소를 발견하여 2016년 일본 이름을 딴 니호늄(nihonium)이라고 명명한 성과가 유명하다.
RIKEN 니시나 연구실이 개발한 사이클로트론과 연구원들(1944년)
2016년 RIKEN 니시나센터의 모리타 고스케 연구팀이 발견한 113번 원소(니호늄)
설립 후 100여 년 동안 규모가 커지면서 RIKEN의 포트폴리오도 다양해졌다. 물리학・화학은 물론, 생명과학・의학・수학・컴퓨터과학・공학에 이르는 넓은 분야를 포괄하게 됐다. 특히 생명과학이 최근 RIKEN의 주력 분야로 급성장해왔다. 2012년 유도만능 줄기세포(iPS) 개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야마나카 신야가 RIKEN과 임상 협업을 확대한 것이 중요한 모멘텀이 됐다. 2014년 RIKEN 연구진은 유도만능 줄기세포로 만든 망막세포를 실명위기에 있던 환자에게 이식했다. 이 성공에 힘입어 2017년부터 유도만능 줄기세포의 임상 연구를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론칭했다. 이는 줄기세포 분야에서 RIKEN이 세계 최선두 연구집단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최근 각광받는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RIKEN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RIKEN은 세계 최고 사양의 슈퍼컴퓨터를 바탕으로, 인공지능과 수학 분야에 신규 조직을 설치하는 등 공격적인 확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확장과 투자는 RIKEN이 꼭 전통적 의미의 기초과학 연구소이지만은 않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RIKEN의 포트폴리오는 전통적 기초학문뿐만 아니라 응용과학, 공학에 이르는 폭넓은 영역에 걸쳐 있으며, 융합적인 주제들도 상당히 많이 다룬다. 달리 말하면 ‘기초, 응용’과 같은 학문의 구획을 넘어서는 종합과학연구소가 RIKEN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15년 ‘특정국립연구개발법인’ 지정은 RIKEN의 운영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문부과학성은 세계 수준의 연구경쟁력 확보를 위해 RIKEN 등 3개 연구소를 특정국립연구개발법인으로 지정했다. 이 연구소들은 혁신적 연구들에 집중하는 대가로 정부로부터 인재유치・보수체계 등 파격 지원을 받게 된다. 기초분야의 RIKEN, 재료분야의 국립재료과학연구소(NIMS), 산업분야의 산업기술총합연구소(AIST)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RIKEN은 하나의 연구소인 동시에, 국가의 기초연구 전략을 수립・지휘하는 컨트롤 타워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이를 반영하듯 2018년 RIKEN 중장기 계획에는 정책 및 사회 수요에 대한 대응이 핵심 과제로 포함됐다. 아울러 국가적 육성이 필요한 9개 분야를 향후 RIKEN의 중점 주제로 제시했다. 인공지능, 머신러닝, 재생의학, 양자광학 등 최근 핫한 주제들이 다수 포함됐다. 같은 시기 문부과학성도 양자과학기술에 대한 4대 추진전략을 수립하고, 전체 R&D 로드맵에서 RIKEN이 양자컴퓨팅 분야를 맡을 것을 천명했다. 이렇게 국가가 전략과제를 제시하고 RIKEN이 과학적 해법을 내놓는 방식의 파트너십은 꾸준히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연구조직 : 연구 목적과 기능에 따른 유연한 편성
RIKEN의 연구조직은 크게 Center와 Cluster로 나뉜다. 전자에는 Strategic Research Center와 Research Infrastructure Center가, 후자에는 RIKEN Pioneering Research Cluster와 Cluster for Science, Technology and Innovation Hub가 속한다. 이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될 수 있다.
RIKEN의 연구조직 구성
Center 중에서 Strategic Research Center는 이름 그대로 국가전략적 연구주제를 탐구한다. 앞서 언급한 니시나센터를 비롯, 인공지능, 뇌과학, 통합의과학 등을 연구하는 9개 센터가 있다. 국가전략분야와 직결되는 만큼 조직의 설치와 해소도 유연해서 5~10년의 기간을 설정해 운영된다. Research Infrastructure Center는 주제가 아닌 인프라를 기반으로 운영된다는 차이가 있다. 슈퍼컴퓨터, 방사광가속기, X레이 전자레이저 시설 등 대학 또는 기업에서 운영하기 어려운 대형 인프라들이 이 센터에 소속되어 있다. 이들은 RIKEN 자체 연구도 수행하지만 외부 연구를 기술적으로 지원해주는 역할도 한다.
Cluster도 상이한 두 집단이 함께 존재한다. 먼저 RIKEN Pioneering Research Cluster는 Chief Scientist Laboratory와 All-RIKEN Project로 구성된다. 이중 Chief Scientist Laboratory는 RIKEN의 중추인 주임연구원(Chief Scientist)들이 운영하는 연구그룹들이다. 이들의 임무는 이제껏 탐구된 적 없는 혁신적 지식을 발견하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이다. 그만큼 탁월한 역량과 리더십을 보유한 우수연구자들이 주임연구원으로 선발된다. 선발 기준이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3,000명이 넘는 RIKEN 연구인력 중에 주임연구원은 50여 명에 불과하다. 주임연구원이 되면 RIKEN 내에서는 연구의 ‘장인’으로 대우받는다. 즉 주제 선정, 인사, 예산 등에 있어 완벽한 독립성을 발휘한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회의 디렉터들이 그렇듯, 각 주임연구원들이 그 자체로 하나의 연구 단위가 되는 것이다. All-RIKEN Project는 외부 협력 과제들이다. 현재 생명과학 분야의 2개 프로젝트가 외부 그룹과 개방형으로 공동운영 중이다.
둘째로 Cluster for Science, Technology and Innovation Hub는 RIKEN의 연구성과를 외부로 이전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RIKEN과 외부 참여 집단이 연구비를 분담해 공동운영한다. RIKEN이 수행하는 기초연구는 활용 목적을 전제하지 않고 지식의 발견 자체를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곧바로 산업에 응용하는 것이 어렵고, 중간단계에서 변형과 중개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기업・병원・제약회사 등이 RIKEN의 성과를 응용・개발단계를 거쳐 사업화하기 위한 공동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요컨대 RIKEN의 연구조직은 목적에 따라 유연한 형태를 취한다고 할 수 있다. 국가전략연구나 거대실험 등 덩치가 크고 대규모 자원투입이 필요한 분야들은 Center로 운영한다. 반면 high risk high return의 프런티어 연구나 사업화 목적의 중개연구는 다품종 소량생산에 가까운 Cluster로 운영한다. 흔히 자연현상의 근원을 탐구해 새로운 지식을 얻으려는 활동을 ‘기초연구’라고 뭉뚱그려 표현한다. 그러나 기초연구도 일종의 집합명사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수준에서 들여다보면 주제, 방법론, 필요자원 규모 등에 있어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RIKEN의 조직형태는 기초연구의 이런 특성을 효과적으로 잘 반영하고 있다.
‘국민과학연구소’ RIKEN의 창설
모든 연구소가 그렇듯 RIKEN의 설립도 시대의 산물이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국가의 초석을 다진 일본은 20세기 초부터 본격적인 제국주의 전쟁에 뛰어든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연달아 이기고 1차 세계대전에서도 승전국이 되어 세계적 열강의 반열에 오른다. 이 과정에서 군사부문을 중심으로 생산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산업혁명도 성숙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범국가적으로 추진해온 부국강병 정책이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실 당시 일본뿐만 아니라 힘 좀 쓴다는 나라들은 모두 부국강병 경쟁에 뛰어들었고, 그 필연적 결과로서의 전쟁으로 다 함께 달려가는 중이었다.
20세기 들어 각국이 앞 다투어 설립한 기초과학 연구소들에도 이런 부국강병의 목적이 있었다. 미국 록펠러의학연구소(1901년), 카네기연구소(1902년), 독일 카이저빌헬름연구회(1911년) 등 지금까지도 세계 기초과학을 이끄는 연구소들이 이때 생겨났다. 서양이 하는 일은 뭐든지 따라 해 보는 방식으로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이 이런 흐름을 놓칠 리가 없었다. 일찌감치 서양의 연구환경을 체험한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국가 차원의 기초과학 연구소 설립 논의가 본격화됐다.
그중 다카미네 조키치가 연구소 설립 필요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역설했다. 그는 도쿄제국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기술사업화로 성공한 응용화학자였다. 식물에서 전분 및 글리코겐을 분해하는 디아스타제를 추출해 타카디아스타제라는 소화제를 개발했고, 가축의 내장에서 세계 최초로 아드레날린 결정을 추출한 성과로 명성을 날렸다. 아드레날린은 현대의학의 필수 호르몬으로서 급성 알레르기 발작 진정제와 지혈제로 활용된다. 이렇듯 원천기술로 많은 돈을 번 다카미네 조키치는 기존 기계산업이 물리학‧화학 기반의 과학산업으로 대체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이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기초과학 연구소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그가 순수 화학자가 아니라 화학의 성과를 응용하여 상품으로 개발하는 공학자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산업이 발전하려면 가장 기초가 되는 물리학과 화학이 튼튼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이는 순수기초연구에 장기 집중하여 국부 증진으로 연계할 ‘국민과학연구소’를 만들자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RIKEN 설립의 산파 역할을 한 다카미네 조키치(왼쪽)와 시부사와 에이이치(오른쪽). 이들은 기초과학자가 아니었음에도 순수기초연구에 집중하는 연구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다카미네 조키치의 주장에 거물 사업가이자 경제관료인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호응했다. 그는 도쿄증권거래소, 제일국립은행, 히토쓰바시대학, 제국호텔 등 500개가 넘는 기업 설립에 참여해서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린다(2024년 새로 바뀌는 1만 엔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때마침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독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던 화학공업이 큰 타격을 입어, 생산기술의 국산화 필요성이 커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즉 2019년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촉발된 소‧부‧장 사태와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업가의 본능적 촉이 작동해서인지,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다카미네 조키치의 비전이 대단한 탁견임을 단박에 꿰뚫어 보았다. 이에 주위 정‧재계 인사들을 모아 국민과학연구소의 설립 여론을 확산시켰다. 머지않아 오쿠마 시게노부 총리까지 관여하게 되고, 마침내 제국의회의 설립 의결을 거쳐 1917년 재단법인 RIKEN이 출범했다. 초기 자본금 200만 엔은 민간 기부금, 정부 보조금, 왕실 하사금 등을 모아 조성했다. 1913년 도쿄의 한 레스토랑에서 다카미네 조키치가 국민과학연구소 설립에 대해 연설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1917년 도쿄에 세워진 초기 RIKEN 건물
설립 초기의 난항과 오코치 마사토시의 개혁
이렇듯 RIKEN은 학계, 재계, 정계의 지원을 받아 야심차게 출범했지만 초기 상황은 좋지 못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불황이 시작됐고, 정부가 약속한 예산의 1/3 정도밖에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에 있어서 안정적 재정 지원은 필수요건이지만 초창기 RIKEN은 이와 거리가 멀었다. 이를 반영하듯 1, 2대 소장도 도합 4년의 임기만을 채웠다. 어렵게 설립한 연구소가 용두사미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
그리고 1921년 3대 소장 오코치 마사토시가 취임했다. 그는 42세에 불과했지만 RIKEN의 개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확실한 비전과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역대 RIKEN 소장 중 최장수인 25년을 재임하면서 그는 RIKEN을 뿌리부터 완전히 바꿔 놓았고, 많은 부분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주임연구원 제도의 도입이다. 초기 RIKEN은 물리학부와 화학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연구소의 주도권을 두고 양 조직 간 갈등이 심했다. 이에 오코치 마사토시는 취임 1년 만인 1922년 두 부서를 해체하고 14개의 주임연구원실 체제로 재편해버렸다. 주임연구원은 개별 프로젝트의 책임자이자 RIKEN 최상위 등급의 연구자이다. 이 제도는 소장이 주임연구원의 권위와 리더십을 인정하고, 그에게 연구에 관한 모든 권한을 일임하는 형태를 취한다. 미국 이외 국가에서 최초의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한 니시나 요시오, 일본의 첫 노벨상 수상자 유카와 히데키가 모두 RIKEN의 주임연구원 출신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장인에 대한 존중과 도제식 교육이 보편화된 일본의 문화와도 상당히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주임연구원 제도는 1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RIKEN의 근간으로서 이어져오고 있다.
둘째는 산업계와의 적극적 연계이다. 오코치 마사토시는 특허 및 실용신안을 바탕으로 기업을 설립하고, 이들로부터 특허권 사용료를 받아 부족한 운영자금을 충당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연구소가 나서서 R&D기업들을 창업해 수익사업을 벌인 것이다. 이런 기업들을 ‘RIKEN 콘체른’이라고 불렀다. 이 시스템은 꾸준히 확대되어 1939년에는 63개의 기업과 121개의 공장이 RIKEN 주도로 운영되었다. 오늘날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복사기 및 카메라 제조업체 리코(Ricoh)도 RIKEN 콘체른 중의 하나였다.
오늘날 세계적 광학기기 제조기업 리코도 RIKEN의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다. 사진은 영국의 리코 아레나.
산업계와 연계한 RIKEN의 연구는 분야를 가리지 않았는데, 쌀을 사용하지 않는 술, 기존 텅스텐 강철보다 3배의 자기저항을 가진 강철, 비타민, 자동차의 필수부품인 피스톤 링이 그 대표적 예다. 이렇듯 정밀기계, 전기설비, 광학기기, 진공펌프, 정밀화학, 제약 등에서 강점을 보였다. RIKEN은 이들 기업으로부터 총예산의 80%에 해당하는 자금을 충당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정부로부터 많은 예산을 지원받는 오늘날에도 RIKEN은 산업계와의 연계를 중시한다. 특히 앞서 소개한 Cluster for Science, Technology and Innovation Hub가 정규 연구조직으로 존재하며 다양한 형태의 기술이전‧중개연구를 수행함으로써, RIKEN의 사명 중 하나인 ‘사회 환원’을 실천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패전과 해체 위기
산업계와의 연계는 RIKEN에 재정적 도움을 주었지만 정체성에는 오히려 위협이 되기도 하였다. 본래 설립 철학인 순수기초연구보다는, 응용‧개발을 위한 목적성 기초연구에 더 치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발발 후에는 산업계 연구의 절대다수는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에 접어들어 RIKEN과 정부의 관계가 긴밀해졌고, 정부는 RIKEN에 군사기술 고도화를 위한 응용‧개발연구에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결국 원자폭탄 개발 의뢰로 이어졌고, 니시나 요시오가 연구를 총괄했다. 니고연구(ニ号研究, 니시나 요시오 성의 앞 글자를 따서 명명)로 불린 이 비밀 프로젝트는 몇 년 간의 이론검토를 통해 원자폭탄 제조가 가능함을 밝혔으나, 실패로 끝났다. 사실 실패할 만도 했다.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는 10만 명의 과학자가 투입된 것에 비해, 니고연구 투입 인원은 니시나 연구실의 100여 명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도 니고연구의 실체에 대해서는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니시나 요시오가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의 계산 결과가 원자폭탄 개발에 충분하지 않았다며, 니시나 요시오가 연구를 보장받기 위한 수단으로 니고연구를 이용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서양에서 오래 생활한 니시나 요시오는 유럽‧미국과의 전쟁을 처음부터 미친 짓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연구소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정부에 협조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 현대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니시나 요시오는 '니고연구'로 불린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다.
어쨌든 2차 세계대전의 패전은 RIKEN에도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거의 연구소 해체 위기에까지 몰렸다. 폭격으로 인해 건물의 3분의 2가 소실되고, 실험장비의 절반 이상이 망가져 버렸다. 소장 오코치 마사토시는 전범으로 체포됐고, 2,300만 엔의 부채도 떠안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군정은 원자폭탄 개발에 깊이 관여한 RIKEN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사이클로트론을 해체해 도쿄만에 던져버림은 물론, 무기개발과 연결될 수 있는 모든 연구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이를 감시하기 위하여 미국 본토에서 과학자들도 파견했다. RIKEN의 기술로 성장한 RIKEN 콘체른 기업들도 모조리 해체했다.
미군정이 해체해서 도쿄만에 수장시켜버린 RIKEN의 사이클로트론
그런데 감시 목적으로 파견된 과학자들이 역설적으로 기사회생의 계기가 되었다. MIT 소속으로 파견단의 일원이었던 해리 켈리는 RIKEN의 해체보다는 전후 일본 사회의 재건에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이제 일본의 기초과학은 새롭게 태어나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전후 재건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켈리의 전향적 견해는 니시나 요시오의 입장과도 맞아떨어졌다. 당시 니시나 요시오는 미군정에 의해 재단법인에서 주식회사로 전환된 RIKEN의 4대 소장직을 맡고 있었다. 어떻게든 연구소를 유지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한 그는 켈리와 손잡고 전후 RIKEN의 역할 재정립 계획을 수립했다. 그것은 RIKEN이 축적한 과학지식을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 사용하고, 이로써 RIKEN을 평화의 시대에 부합하는 연구소로 개조한다는 것으로 요약됐다. 이러한 계획이 제대로 먹혀서, 미군정은 RIKEN을 해체하지 않고 운영을 지속하는 데 동의하게 되었다.
전후 재건과 세계적 연구소로의 성장
연구소 유지에는 어찌어찌 성공했지만, 이전처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다. 무엇보다 돈이 가장 문제였다. 미군정 하에서 정부 보조금을 받기에는 제약이 많았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제상황에서 기부금이나 투자를 받기도 어려웠다. 니시나 요시오가 다시 아이디어를 냈다. RIKEN의 대표 연구로 페니실린 개발을 추진하여 연구소 이미지도 개선하고 연구비도 확보하자는 것이다. 페니실린은 전쟁에 가담한 과거를 청산하고, 평화의 시대에 인류에 기여하는 RIKEN을 새롭게 상징하는 연구로서 선택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페니실린 개발로 당시 5개월 정도 기간에 벌어들인 수익만 10만 엔이 넘었고 이는 RIKEN 재건에 요긴한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리더십을 발휘했던 4대 소장 니시나 요시오는 재건의 와중이던 1951년 사망했다. 그는 양자역학과 핵물리학에서 세계적 업적을 쌓았고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과 교류한 천재 물리학자였다. 하지만 연구자보다는 경영자로서의 면모다 더 인상적이다. 전쟁 중 핵무기 개발에까지 관여했던 연구소를, 패전 후 해체 직전에서 멱살 잡고 끌어낸 것만 봐도 뛰어난 리더십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RIKEN 100년사에서 니시나 요시오는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로 늘 언급된다. 독일에서 나치 시대를 견디며 연구소를 지켜낸 막스 플랑크와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위기를 극복하자 찬스도 찾아왔다. 1949년 유카와 히데키가 첫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RIKEN 니시나 연구실 출신인 그는 해외유학 한번 하지 않은 순수 국내파로서 노벨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뤘다. 패전 이후 불황과 비관에 빠져있던 일본이 이 수상 소식에 얼마나 환호하고 활기를 되찾았을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덩달아 RIKEN의 위상도 크게 올라갔다. RIKEN에는 유카와 히데키와 비슷한 수준의 동료 과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후 RIKEN에서 계속 노벨상 수상자들이 배출될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다.
1958년 일본 의회는 특별법을 통해 RIKEN의 법적 지위를 주식회사에서 특수법인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RIKEN은 총예산의 95%를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국가 연구소로서 위상을 확립하게 되었다. 즉 더 이상 수익사업을 위한 연구를 할 필요가 없고, 온전히 순수기초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부응하듯 1965년에는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두 번째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도 유카와 히데키와 함께 연구했던 또 한 명의 ‘니시나 키즈’였다.
1967년 RIKEN은 도쿄에서 사이타마현의 와코시로 이전했다. 동시에 이는 RIKEN이 전국적 규모를 갖춘 대형 연구소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 전역에 연구소들을 갖춘 막스플랑크연구회를 벤치마킹하여, RIKEN도 전국에 부속 연구소와 실험시설들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에 쓰쿠바, 센다이, 나고야, 요코하마, 고베 등에 RIKEN의 연구센터들이 차례로 설립되었다. 또한 방사광가속기, 중이온가속기, 핵자기공명시설, 슈퍼컴퓨터 등 오늘의 RIKEN을 뒷받침하는 최첨단의 연구인프라들도 함께 갖춰 나갔다.
일본 전국에 위치한 RIKEN의 부설 연구소들과 연구시설들
이를 기반으로 RIKEN은 우주, 물질, 생명의 근본적 질문에 도전하는 빅 사이언스를 거침없이 펼쳐 나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유도만능 줄기세포의 인체 이식,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원소(니호늄) 발견 등 과학교과서를 바꿀 굵직한 성과들을 꾸준히 내고 있다. 전후 운영자금 확보를 위해 페니실린 개발에 매달렸던 과거 모습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1913년 다카미네 조키치의 연설에서 시작된, ‘순수기초연구에 장기 집중하는 대규모 국민과학연구소’의 비전은 그렇게 100년이 넘는 시간을 거쳐 오늘의 위용을 갖췄다.
그들이 성공한 비결
흔히 RIKEN은 ‘과학자의 낙원’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이 표현을 처음 쓴 것은 일본의 두 번째 노벨과학상 수상자 도모나가 신이치로다. 그는 1930년대 RIKEN에서 과학자들이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받고 난제에 도전하는 모습에 감명받아 이런 표현을 했다고 한다. 이후 ‘과학자의 낙원’은 과학자가 원하는 연구를 장기‧안정 지원하는 RIKEN을 상징하는 표현이 됐다.
그만큼 RIKEN에서 장인정신과 장기 연구는 핵심 가치로 인정받는다. 주임연구원 제도에서도 살펴봤듯, RIKEN에서 우수한 연구자는 장인의 대우를 받는다. 이런 장인들은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과 질문이 있고, 그 근원의 목표에 닿기 위해 몇 년이 걸리든 한 우물만 파는 연구를 한다. 그리고 연구소는 이 과정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해준다.
113번째 원소 니호늄의 발견 과정이 대표적 예다. 모리타 고스케 연구팀이 원소 발견 연구에 처음 도전한 것은 2003년이다. 첫 2년 간 원소 합성에 두 번이나 성공해서 연구는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원소 명명권을 가진 국제순수‧응용화학연합(IUPAC), 국제순수‧응용물리학연합(IUPAP)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원소는 합성에 성공해도 짧은 시간 내 다시 붕괴되기 때문에, 붕괴 과정까지 정확히 확인돼야 새 원소로 인정받는다. 113번 원소는 붕괴 과정이 이론적 예측과 어긋나 추가 검증이 필요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2년 간 두 번이나 성공했던 원소 합성이 그때부터 계속 실패했다. 세 번째 합성에 성공한 것은 첫 실험으로부터 9년 뒤인 2012년이다. 연구팀은 이 9년 간 무려 400조 번의 합성 실험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첫 실험으로부터 원소명 등록까지 총 13년이 걸렸다. 그러니까 연구팀이 한 가지 프로젝트에 (400조 번의 실험 포함) 13년 동안 매달려 있을 수 있도록 연구소가 지원해주었다는 의미다. 요즘 장기 기초연구의 중요성이 자주 강조되는데, 제대로 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 스케일은 되어야 할 것이다.
연구팀이 13년 동안 한 프로젝트에만 매달려 400조 번의 실험을 해야 한다면...;;
RIKEN의 성공 비결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사회 환원의 가치이다. 앞서 살펴봤듯 RIKEN은 초창기부터 결코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운영되지 않았다. 부족한 재정으로 운영난을 겪기도 했고, 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해체 위기까지 몰렸었다. 그럼에도 RIKEN이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사회와의 적극적 상호작용을 통해 꾸준히 지지를 얻었다는 점을 꼽아야 할 것이다. RIKEN은 기초과학 연구소였지만 일찍부터 기술이전을 통한 사회 환원을 기관의 주요 역할로 삼아 왔다. 요즘 말로 하면 R&D 벤처의 비즈니스 모델을 약 100년 전부터 확립한 것이다. 세계적 기술강국 일본의 명성은 물론 기업들이 쌓아 올린 것이겠지만, 그 저변에는 RIKEN과 같은 연구소들이 개발한 원천기술 역시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RIKEN에 있어서도 이는 중요한 수입원이었겠지만, 단순히 경제적 의미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RIKEN이 경제발전과 복리증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대중들에게 각인시켜, 연구소에 대한 지지 여론을 견고히 할 수 있었다는 사회적 의미가 어쩌면 더 클 것이다. 즉 사회 속에서 존재 의의를 분명히 드러내는 연구소는, 위기에 직면해도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극복해낼 수 있음을, RIKEN이 100년의 역사를 통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