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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an 23. 2021

과학은 어떻게 인류의 삶을 바꾸는가

한국은 과학에 대한 신뢰가 꽤 높은 나라다. 한국이 ‘저신뢰 사회’라지만 과학에서만큼은 예외다. 서구 선진국에서도 최근 과학에 대한 불신(아마 도널드 트럼프의 영향도 클 것이다)이 커졌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두 가지 기준에서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최근 서구 선진국에서 퍼지는 과학에 대한 불신에는 이 분의 기여도 큰 것 같다.

첫째로 전문가 집단으로서 과학자들에 대한 신뢰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혼란 속에서도 국민들은 과학자들의 발언을 대체로 귀담아 들었다. 바이러스의 실체에 대한 논의가 보통 이상의 과학 지식을 요구하는데도 그랬다. 반면 그때 정치인들은 백신 구매가 늦었다는 이유로 엄청난 욕을 먹고 있었다.


둘째로 과학기술 투자에 대한 국민적 지지다. 한국은 세계에서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올해 정부 R&D 예산은 27.2조 원인데, 2016년의 19.1조 원에 비하면 5년 새 8.1조 원이 늘었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세금낭비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큰 정치적 논란이 벌어졌던 4대 강과 문화융성 사업을 생각해보면, 과학기술 투자는 거의 범국민적 동의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과학기술’이라는 용어의 착시효과


과학이 이렇게 지지받는 이유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그중 아마 경제적 기대감이 가장 클 것이다. 즉 과학이 경제발전과 국부증진의 밑거름이 된다는 논리이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서구 선진국들과 일본이 그렇게 고도 경제성장을 이뤘다. 한국도 이를 경험적으로 안다. 1966년 KIST, 1971년 KAIST 설립과 함께 시작된 한국의 과학기술사는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되는 성장의 역사와 일치한다. 그 주역들인 중화학공업, 자동차산업, 전자·통신산업 등은 과학기술의 기반 없이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강의 기적'과 시대별 과학기술의 역할

하지만 이는 착시효과에 가깝다. 그간 과학‘기술’이 성장에 기여했지, ‘과학’기술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과학과 기술을 묶어서 과학기술이라 하고, research와 development를 합쳐 R&D라 한다. 그러나 양자의 목적과 방법은 서로 다르다. 기술과 development는 이미 알려진 지식을 산업 혁신과 제품 개발에 응용하는 과정이다. 반면 과학과 research는 그 지식 자체를 처음 발견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기술과 development주로 공학의 영역이라면, 과학과 research는 우리가 기초과학이라고 부르는 수학,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 등을 의미한다.


우리가 과학과 기술을 뭉뚱그려 인식하는 것은 시대와 역사의 산물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압축적 근대화’로 요약된다. 서구에서는 과학혁명으로 인한 지식의 발견과 축적이 선행된 후에 그것을 응용하는 공학이 발전했다. 과학사가 데시리 슈아즈는 유럽에서 공학이 과학과 뚜렷이 구분되는 학술분과로 확립된 시기를 19세기 중·후반으로 본다. 근대 과학혁명으로부터 약 2~3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 슈아즈에 의하면 이 시기가 되면 오히려 과학자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공학과의 구분짓기를 위한 기초연구 개념을 주창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뒤늦게 산업화에 착수했을 때는 그런 구분이 무의미했다. 그때는 과학과 기술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고민이 사치인 시대였다. 그보다는 당장 산업을 일으켜 수출할 제품들을 값싸고 빠르게 생산해야 했다. 그래서 과학의 이름으로 출범한 KIST와 KAIST가 실제로 한 것은 선진국 기술을 도입하여 기업에 보급하는 것이었다. 흔히 추격형 R&D라 부르는 이런 패러다임이 한강의 기적 30년을 뒷받침하는 과학‘기술’의 성과였다. 우리나라가 진지하게 과학을 키우고 지원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1990년대부터다.

KIST 초대 소장 최형섭(왼쪽)과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초창기 KIST의 가장 큰 임무는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공급해주는 것이었다.




과학의 역사성, 우연성, 불확실성


사실 과학은 새로운 지식의 발견 자체가 목적이므로 경제발전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관련이 있기는 있다. 과학의 성과는 때로 인류의 삶을 뒤바꾸고 문명의 일대 진보를 이룬다. 문제는 이것이 단기간에 확인되지 않으며, 예측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혹자의 표현처럼 과학을 순전히 경제적 측면에서만 보면 도박에 가깝다. 그러니 국가가 지원 계획을 마련하기도 어렵다. 예산은 한정돼 있는데 필요한 투자의 규모, 기간, 기대효과가 잘 가늠이 안 된다.


과학의 효과는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인지할 수 있다. 과학적 지식들은 한 방에 모든 것을 바꾸지 않는다. 그것은 조금씩 인류의 삶 속에 스며들어, 축적의 시간이 경과하면 어느 순간 문명의 수준을 크게 높인다. 즉 과학이 발견한 지식들이 응용‧개발을 거쳐 혁신적 기술로 일상화되는 데에는 역사 단위의 시간이 걸린다.


또한 과학적 발견과 그 활용도 정밀한 인과 관계를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연과 불확실성이 많이 개입된다. 과학자들도 연구 계획을 세우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튀는 경우도 많으며 거기서 대단한 발견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일단 뭔가 발견은 했지만 당시 과학 수준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당연히 그걸 어디에 쓸지도 알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발견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만들어지고, 응용‧개발에 대한 힌트와 시도가 겹쳐지면서 기술과 제품으로 확립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생물학자 막스 페루츠는 과학의 이러한 성격을 아이스하키의 ‘퍽’에 비유하기도 했다.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솟아올라, 어떤 방향으로 튈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의미에서다.

과학적 아이디어는 아이스하키의 퍽과 같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요컨대 과학은 역사성, 우연성, 불확실성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류의 삶을 변화시키고 문명의 수준을 높인다. 한국인들이 그토록 바라는 노벨과학상도 이렇게 과학적 발견으로 인류의 진보를 이끈 과학자들이 주로 받는다(즉 단순히 똑똑하고 연구 잘한다고 받는 상이 아니다). 노벨과학상의 수상 이력을 들여다보면 현대 인류 문명의 흥미로운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20세기 과학의 문을 연 빌헬름 뢴트겐의 X선


1895년 빌헬름 뢴트겐은 음극선관의 자외선 방출 실험을 하던 중에 정체불명의 광선을 발견했다. 음극선관에서 방출된 광선이 실험실의 물체들을 관통해, 몇 미터 떨어져 있던 바륨과 반응해 갑자기 빛을 냈던 것이다. 이 현상을 더 알아보려고 책을 가림막으로 썼다가, 책 안에 있던 열쇠와 책을 든 자기 손의 뼈가 투과되어 비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뭔가 발견은 했지만 그 정체를 알 수 없었기에 미지수를 뜻하는 ‘X’라고 명명했다.

뢴트겐의 X선 발견. 우연의 산물이었지만 후대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몇 년 뒤부터 X선은 의료기술로 활용되어 수많은 생명을 구하게 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X선 없는 외과 치료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또한 X선은 핵물리학의 태동을 견인했다. X선을 통해 본격적으로 원자 내부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과학자들은 원자의 구조를 밝혀내고 양성자, 중성자, 전자 등의 입자도 발견하게 된다. X선의 발견이 없었다면 닐스 보어의 원자 모형은 물론, 현대 의학의 중요한 성취인 DNA, 헤모글로빈, 인슐린에 대한 구조적 이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공로로 뢴트겐은 1회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뢴트겐은 인성도 바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X선이 자연에 원래 있었던 인류 공동의 자산이라며 특허조차 내지 않았다. 또 자신이 물리학자였음에도, X선이 가장 잘 쓰일 수 있는 의료기술단체에서 처음 공개 시연했다. 뢴트겐의 대인배적 기질로 인해 X선은 무수히 많은 후속 연구로 이어질 수 있었다. X선을 활용한 연구는 물리학, 화학, 의학 등 과학의 제 분야를 넘나들었고, 뢴트겐 이후로도 20명이 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공기 중의 질소로 빵을 만든(“bread from the air”) 과학자 프리츠 하버


인류 삶의 개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화학자 프리츠 하버도 역대 원탑을 다툰다. 하버의 최대 공로는 공기 중의 질소를 인공적으로 암모니아로 합성해 질소 비료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식량 생산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 인류를 위협하던 기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다. 당시는 저 유명한 토머스 맬서스의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명제(이른바 맬서스 트랩)가 정설로 인정받던 시대였다. 지금이야 일부 최빈국들 빼고는 아사자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유럽에서조차 기아가 상시적인 걱정거리였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던 맬서스 트랩.

그러나 하버가 고안한 공법으로 인공질소비료가 공급되자, 단 3년 만에 식량 생산량이 인구 증가량의 2배를 기록했다. 그 결과 20세기 초 약 16억 명이던 세계 인구가 100년도 안 돼 70억 명까지 급증했다. 인공질소비료가 없었다면 최소 수십 억 명이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요컨대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생존 조건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하버에 비견될 과학자는 찾기조차 어렵다. 따라서 하버도 당연히 노벨상을 받았다. 1918년의 노벨화학상 시상 연설은 하버가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이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버 교수님, 왕립과학원은 수소와 질소를 직접 결합시키는 문제를 해결한 뛰어난 공로를 인정하여 1918년 노벨화학상을 교수님께 수여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이전에도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교수님이 처음으로 공업적 해결책을 제공하였고, 농업의 표준과 인류복지를 향상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을 만들어냈습니다. 교수님의 조국과 인류 전체를 위한 값진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공기 중 질소를 암모니아로 합성하는 데 성공한 프리츠 하버(오른쪽)와 칼 보슈(왼쪽).

다만 하버는 조국 독일의 1차 세계대전 승리를 위해 독가스를 개발한 전범이기도 했다. 역사적 인물은 공과를 냉정히 판단해야 한다지만, 하버만큼 그것이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하버의 독가스 기술은 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져 나치의 홀로코스트에도 쓰였다. 하버가 유대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역설적인 일이다. 물론 핏줄이 그렇다는 것이지 하버는 개신교도이자 누구보다 애국심 충만한 독일인이었다. 그러나 나치는 ‘유대인은 뭘 해도 유대인일 뿐’이라며 하버를 추방했고, 역사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업적을 남긴 이 천재 과학자는 해외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과거사에 엄격한 독일이지만 그 업적이 워낙 넘사벽이라서 그런지 그의 이름을 딴 연구소가 있다. 독일이 자랑하는 최고의 두뇌집단 막스플랑크연구회 산하 86개 연구소 중에, 유일하게 연구분야가 아닌 과학자의 이름을 붙인 연구소가 바로 프리츠하버연구소이다.




시작은 실수였으나 끝은 구원이 된 페니실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약으로 꼽히는 항생제의 개발도 과학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영국의 의사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과정은 순전히 실수였다. 1928년 포도상구균을 연구하던 플레밍은 샘플 배양 접시를 제대로 닫지 않고 휴가를 떠났다. 그 사이 샘플은 오염됐는데, 실험실로 돌아온 플레밍은 배양 접시에 있던 포도상구균을 웬 곰팡이들이 먹어치운 것을 발견했다. 플레밍은 이를 곧바로 폐기하지 않고 곰팡이를 좀 더 살펴보았다. 그 결과 페니실리움이라는 이 곰팡이가 세균을 억제하는 성질이 있음을 알아냈다.

알렉산더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은 실수의 산물이었다.하지만 실패한 결과물을 바로 폐기 처분하지 않고, 궁금증을 갖고 더 관찰한 것만으로 그는 충분히 위대한 과학자다.

이러한 원리를 적용해서 만든 항생제가 페니실린이다. 다만 플레밍은 페니실린의 원리를 실험적으로 밝히는 데 그쳤고, 다른 과학자들이 항생제로서 대량 생산을 가능케 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페니실린 출시 이후 유사한 형태의 다양한 항생제들이 쏟아져 나왔고, 인류는 질병과의 싸움에서 일대 진보를 이루게 됐다. 지금으로서는 잘 상상이 안 가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감염 질환으로 목숨을 잃었다. 극단적으로 현대에 약국에서 쉽게 구하는 연고만 있어도 치료 가능한 상처가 팔, 다리 절단이나 죽음으로 이어지던 게 이때의 일상이었다. 항생제가 살린 사람 수는 산출조차 어렵다. 1950년대 50대 언저리였던 인류의 평균 수명이 현재 80세 이상으로 늘었다는 점에서, 항생제의 위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페니실린의 개발 공로로 플레밍도 194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페니실린은 특히 2차 세계대전 중의 부상병 치료에 큰 효과를 발휘했다. 본인이 우연한 기회에 엄청난 업적을 남겨서인지, 평소에도 플레밍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비일상적 현상을 등한히 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다음의 문장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플레밍의 명언이다.


“실험실의 젊은 연구원들에게 충고하자면, 나는 우리 인생에서 우연은 놀랄 만한 영향력을 미친다고 지적하고 싶다. 그러니 실험 중에 특별히 나타나는 모습이나 생기는 일을 절대로 소홀히 다루지 말라.”




인류에 새로운 빛의 혁명을 선물한 청색 LED


비교적 최근의 성과로 청색 LED의 개발도 중요하다. 2014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아카사키 이사무, 아마노 히로시, 나카무라 슈지가 그 일을 해냈다. 당시 노벨위원회가 밝혔듯, 그들의 성과는 횃불-백열전구-형광등으로 이어져 온 인류 빛의 혁명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빛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면서도 더 밝은 빛을 내는 쪽으로 진화해왔다. 백열전구는 에너지 효율이 달랑 5%밖에 안 된다. 형광등의 효율은 30% 정도로 그보다는 높다. 하지만 환경과 인체에 해로운 수은과 형광물질을 사용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전기 에너지를 빛 에너지로 바꿔주는 소자인 LED는 기존 빛의 패러다임을 교체했다. 효율은 훨씬 높은 데다 친환경적이다. 전기 에너지의 90%를 빛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으며, 형광등과 나트륨등처럼 환경오염 물질을 함유하지 않는다. 수명도 굉장히 길다. 백열전구 수명이 최대 4,000 시간이나, LED는 50,000 시간은 너끈히 사용 가능하다. 게다가 작고 가볍기까지 하다. LED는 이미 우리 생활에서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벽걸이 TV 시대의 개막도 LED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디스플레이는 물론, 스마트폰, 전광판, 가로등 등 모든 분야에서 LED는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다.

청색 LED는 인류 '빛의 혁명'의 마지막 난제였다.

LED는 적색, 녹색, 청색 순으로 개발되었으며 이 중 청색이 마지막 난제였다. 그것이 난제였던 이유는 파장이 짧을수록 빛을 만들어내는 화합물 반도체 개발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없었던 적색과 녹색 LED는 1960년대 미국에서 일찌감치 개발되었다. 하지만 파장이 짧은 파란색 빛은 수십 년 간 불가능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청색 LED를 꼭 개발해야 했던 이유는 백색광을 만들어야만 조명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빛의 3원색인 적색, 녹색, 청색이 혼합되어야 백색이 된다. 대다수 전문가들이 20세기의 기술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1992년 아카사키 이사무와 아마노 히로시가 질화갈륨으로 청색 LED 제조에 성공했고, 나카무라 슈지가 이의 대량 생산기술을 만들어낸 것이다. 세기의 난제로 남아있었던 청색 LED를 개발한 세 과학자의 집념은 무서울 정도다. 아카사키와 아마노는 1970년대 초부터 20년 가까이 이론 검토와 실험을 반복했다고 하며, 나카무라도 2년 간 사적인 약속을 일체 잡지 않고 하루 100차례씩 실용화 실험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청색 LED야 말로 요즘 유행하는 ‘축적의 시간’이라는 표현에 잘 부합하는 연구였던 셈이다.


청색 LED라는 마지막 퍼즐이 맞춰짐으로써 인류는 마침내 빛의 혁명을 목도하게 되었다. 청색 LED는 화려하고 멋진 빛의 향연을 연출한다. 그러나 꼭 그것 때문에 위대한 발견으로 칭송받는 것은 아니다. 청색 LED의 혜택을 가장 크게 본 사람들은 아프리카 등의 개도국 국민들이다. 청색 LED 완성으로 높은 효율로 밝은 빛을 내는 백색 LED가 가능해져, 개도국의 전등 보급률이 높아질 수 있었다. 게다가 청색 LED의 강한 살균 효과로 위생도 좋아졌다. 노벨위원회는 이렇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빛의 혜택을 선물해준 점을 높이 샀던 것이다.




인류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과학


과학은 인류 지식의 지평을 넓힌다는 점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즉 무언가를 새롭게 알았다는 것만으로 그 목적을 다 이룬 것이다. 그래서 과학은 낭만적인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과 학문에 비유하면 경영학, 경제학보다는 철학, 문학에 가깝다. 과학자들의 연구 목적도 대부분 간단하다. 그저 자연에 대한 호기심,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발견한 지식이 후일 혁신적 기술의 기반이 되는 경우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그것까지 예측하면서 연구를 할 수는 없다.


앞서 예로 든 X선, 인공질소비료, 페니실린, 청색 LED를 생각해보라. 대체 누가 그 발견 가능성과 활용 효과를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결과적으로 이 연구들은 역사의 진보를 이끌고 인류 삶의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오히려 이 연구들이 예외적인 것이지, 인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연구들이 훨씬 더 많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영향을 미칠지 어쩔지 아직 알 수 없는 연구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과학에 대한 지원은 계속돼야 한다. 지금은 대체 이런 연구가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어도, 2~30년 후 인류의 명운을 뒤바꾸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본래 과학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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