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그 시대의 아들이다.” 근대철학의 완성자 G. W. F. 헤겔의 유명한 말이다. 철학은 시대가 고심하는 문제에 대한 응답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다만 철학 또한 시대의 산물이기에, 그 시대 사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뜻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이렇듯 헤겔은 관념론자답게 하나의 시대를 관통하는 절대적 정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시대정신(Zeitgeist)’이라 했고, 시대정신이 발전하면서 역사도 진보한다고 보았다.
철학과 함께 근대정신사의 한 축을 맡은 과학에도 시대정신은 중요하게 작용했다. 과학의 역할 중 하나는 현재의 경험적 분석을 토대로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연구의 자원과 방법, 결과의 활용 등은 시대적 조건과 밀접히 연관된다. 헤겔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학도 그 시대의 아들’인 셈이다. 근대의 철학과 과학이 하나의 시원에서 분화했음을 고려하면, 이러한 유사성은 새삼스럽지 않다.
과학과 정치의 상호작용
그럼에도 유독 과학에 대해서는 비정치적, 가치중립적 학문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특히 과학 연구소는 세상과 동떨어져 연구에만 열중하는 모습으로 곧잘 상징화된다. 순수한 진리 탐구가 목적일 뿐, 현실 문제에는 초연한 집단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통념을 넘어 당위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연구소는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성을 가져야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과학은 현실정치와 꾸준히 상호작용하며 발전해왔다. 근대과학의 출발점인 16~17세기 과학혁명부터 정치적 목적과 무관하지 않았다. 과학혁명의 성과들은 당시 계몽주의와 공명하며 근대시민사회를 여는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유럽 대륙에 소개한 이가 계몽주의의 기수 볼테르였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시민계급은 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그 원리와 방법론을 적용한 새로운 사회를 기획했다. 이것이 성공하여 시민계급은 신 중심의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고 근대 자본주의 국가를 세웠다. 그 물적 토대를 만든 산업혁명도 과학의 성과에서 비롯됐다. 뉴턴역학과 전자기학을 기반으로 생산의 기계화와 교통·통신의 고도화라는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이 가능할 수 있었다.
1687년 영국에서 출간된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보통 '원리'를 뜻하는 라틴어 「프린키피아」라고 부른다)는 근대시민혁명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자본주의 국가와 과학의 제도화
새롭게 등장한 자본주의 국가는 과학 연구를 체제 내부로 적극 흡수했다. 그래서 정부가 과학자를 집단으로 고용하여 국가 재정으로 연구자금을 대는 제도와 문화가 만들어졌다. 이로써 과학은 개인의 실험실을 벗어나 국책 연구소로 대형화되었다. 원래 근대과학의 선구자 중에는 프로페셔널 과학자보다는 본업이 따로 있는 아마추어들이 많았다. 예컨대 근대적 원자론을 정립한 존 돌턴은 교사였고, 전자기학의 아버지 마이클 패러데이는 제본소 직공이었으며, 에너지 보존 법칙의 발견자 중 하나인 제임스 줄은 양조업자였다. 이들은 생업을 꾸려가는 중에 과학 연구를 병행해 위대한 발견을 해냈다. 그러나 국가가 과학을 제도화하면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전문 과학자 집단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대략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일어났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어서, 국가의 과학 연구 지원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국가는 과학자들이 시대정신 구현의 임무를 수행하기를 바란 것이다. 이때는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설파했듯 ‘제국의 시대’였다. 제국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산업과 국방 부문의 강화는 대부분 국가의 최우선 과제였다. 이를 위한 상품 생산과 무기 체계 개발에 과학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은 자명했다. 이에 많은 연구소들이 이러한 부국강병의 시대정신에 따라 설립됐다. 그리고 일부 연구소들은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세계 최고의 두뇌집단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황제의 꿈을 담은 카이저 빌헬름 연구회
1911년 출범한 카이저 빌헬름 연구회(Kaiser-Wilhelm-Gesellschaft)가 대표적이다.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꿈은 조국을 대영제국처럼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영국은 오랜 시간 축적한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초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과학 진흥을 위한 런던 왕립학회(Royal Society)가 왕실의 공인을 받은 것이 무려 1662년이었다. 과학이 막 신학문으로 떠오르는 시대에 결성된 왕립학회는 다양한 회원들의 교류와 왕실의 지원에 힘입어 아이작 뉴턴, 마이클 패러데이, 찰스 다윈 등의 거성들을 배출했다.
영국을 동경한 황제에게 구체적인 연구소 설립 계획을 내민 것은 독일의 과학자들이었다. 그 무렵 공학의 급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과학자들이 응용 목적을 배제하고 기초연구에 특화된 국가 연구소를 만들자고 나선 것이다. 베를린의 신학자 아돌프 하르낙이 이러한 주장을 대변했다. 하르낙은 산업화의 문제는 물리와 화학의 더 많은 원리를 발견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로 황제를 설득했다.
이에 감화된 빌헬름 2세는 칙령을 내려 카이저 빌헬름 연구회를 설립하고, 하르낙을 총재로 임명했다. 황제의 이름을 내건 덕분에 각계각층에서 많은 기부금이 모였다. 다만 황제는 지원에만 힘썼을 뿐 운영의 전권은 하르낙에게 위임했다. 하르낙도 일단 설립 때는 국가가 필요하지만, 운영을 시작하면 오히려 국가는 배제되어야 한다는 이중적인 논리를 취했다. 황제가 통치하는 시대에 이러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획기적인 운영 모델이었다. 덕분에 연구회는 아무런 부담 없이 연구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4년 만에 첫 노벨상 수상자(리하르트 빌슈테터)가 나오고, 산하 연구소를 2개에서 30개까지 빠르게 늘려나갔다.
1911년 1월 11일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에서 열린 카이저 빌헬름 연구회 창립 총회. 황제 빌헬름 2세는 베를린대학 100주년을 맞아 연구회 설립을 발표했다.
빌헬름 2세의 꿈과 달리 독일은 곧 발발한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연달아 패했다. 황제 자신도 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네덜란드로 망명해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딴 연구회는 훨씬 오래 남아 세계적 연구소로 성장했다. 1930년대 나치 집권이라는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2대 총재 막스 플랑크의 뛰어난 리더십으로 이를 현명하게 피해 갔다. 덕분에 연구회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해체되지 않고 조직의 유지와 성과의 보존에 성공했다.
이전에도 세계 수준을 자랑했던 카이저 빌헬름 연구회는 서독의 전후 체제로 고스란히 흡수되었다. 그리고 ‘라인강의 기적’과 함께 화려하게 부활했다. 1948년 막스 플랑크 연구회(Max-Planck-Gesellschaft)로 개명한 이들은 2021년까지 노벨상 수상자만 37명을 배출하고 있다. 연구회 역사가 110년이니, 월드컵이나 올림픽의 개최 주기보다도 빠른 3년에 한 번 꼴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고 있는 셈이다.
학계와 정·재계가 합심해서 만든 이화학연구소
일본 이화학연구소(理化学研究所, RIKEN)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설립됐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부국강병을 본격화했다. 그 성과로 20세기 들어 몇 번의 제국주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군사부문을 중심으로 산업혁명도 성숙했다.
그러나 해외 수입에 의존하던 화학공업이 1차 세계대전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이로 인해 불황이 일어나자 생산기술을 국산화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미 열강의 반열에 오른 일본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었다. 메이지 시대부터 내보냈던 유학생들도 돌아와 1세대 과학자 집단을 형성하고 있던 터였다. 또한 미국과 유럽에서는 록펠러연구소(1901년), 카네기연구소(1902년), 카이저 빌헬름 연구회(1911년) 등이 설립되고 있었다.
서양을 충실히 벤치마킹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이런 흐름을 놓칠 리 없었다. 특히 미국에서 소화제와 아드레날린 결정 기술을 개발해 큰돈을 번 다카미네 조키치가 적극적으로 국민과학연구소 설립을 제안했다. 그는 공학자였지만, 앞으로는 기초·원천기술이 산업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는 전망에서 물리학과 화학에 전념하는 연구소를 구상했다. 경제관료 출신 사업가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이 제안에 호응하고 나섰다. 500개가 넘는 기업 설립을 주도한 그는 다카미네 조키치의 주장이 탁견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거물 사업가답게 한번 판단이 서자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오쿠마 시게노부 총리를 포함한 정·재계 인사들을 모아 연구소 설립을 지원한 것이다.
이렇듯 각계의 노력이 모여 1917년 제국의회에서 이화학연구소 설립이 의결됐다. 처음 몇 년은 혼란도 겪었으나, 3대 소장 오코치 마사토시의 개혁으로 급성장했다. 그는 연구소가 개발한 기술을 창업으로 연계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기업군을 ‘RIKEN 콘체른’이라고 불렀다. 이 기업들은 정밀기계, 전기설비, 광학기기, 진공펌프, 제약 등 분야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산업발전을 견인했다.
RIKEN 콘체른 중 하나인 RIKEN Vitamin사의 1938년 비타민 광고. 이화학연구소는 원천기술의 창업을 통한 산업계 연계 강화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화학연구소에도 격랑을 일으켰다. 일본 전체가 전시 총동원 체제로 전환되는데 연구소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산업계 협업 연구의 대부분은 군사기술 관련으로 바뀌었고, 결국 원자폭탄 개발까지 의뢰받게 된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패전 이후 미군정에 의해 연구소 해체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4대 소장 니시나 요시오가 미국과 협상해, 과학의 평화적 이용과 전후 재건에 앞장서겠다고 약속하여 해체는 면했다. 다만 일체의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주식회사로 바뀌어야 했다.
파산 직전의 이화학연구소는 당시 첨단 신약으로 각광받던 페니실린의 개발 수익으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9년 일본의 첫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유카와 히데키)를 배출했다. 니시나 요시오의 제자인 유카와 히데키의 노벨상 수상으로 이화학연구소는 단숨에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다. 1958년 의회는 특별법을 통해 이화학연구소를 다시 특수법인으로 바꿨고, 1967년부터는 전국에 부속 연구소와 실험시설의 설치를 추진해나갔다. 오늘날 일본 과학을 이끄는 컨트롤 타워 연구소의 모습은 이렇게 갖춰지게 되었다.
맨해튼 계획의 중추 역할을 한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
미국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Lawrence Berkeley National Laboratory)는 전쟁이 연구소의 모태가 된 경우다. 예일대의 물리학 교수였던 어니스트 로렌스가 UC 버클리로 옮겨와 1931년 방사선연구소를 설립한 것이 그 시초다. 로렌스의 193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성과인 사이클로트론 개발은 현대물리학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우선 방사성 물질을 인위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원자핵 연구가 크게 발전했다. 또한 대형실험장비를 중심으로 다수의 과학자들이 함께 연구하는 거대과학이 주요 분야로 부상했다. 핵물리 연구와 거대과학은 지금까지도 이 연구소를 상징하는 요소다.
로렌스는 과학자로서는 흔치 않게 경영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골드러시 직후인 1930년대 캘리포니아의 성숙한 산업 조건(광산업, 통신시설, 발전시설 등)을 사이클로트론 실험에 접목해 큰 성공을 거뒀다. 또한 화학, 생물학, 공학, 의학 등 다분야의 전공자들을 규합해 팀워크 연구를 하는 데도 능했다. 이러한 경영자적 면모로 인해 로렌스 주위에는 인재들이 넘쳐났고, 정부로부터도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
1942년부터 시작된 맨해튼 계획은 연구소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이는 원자폭탄을 개발하려는 군사계획인 동시에 현대물리학 최전선의 연구이기도 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 리처드 파인만,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등 노벨상을 휩쓴 당대의 천재들이 참여했다. 로렌스의 동료 교수인 오펜하이머가 이론·기술 부문을 총괄했고, 로렌스도 계획의 핵심인 사이클로트론으로 원자폭탄의 원료 우라늄-235를 분리하는 실험을 맡았다. 모든 것이 기밀이었기에 전국 곳곳, 특히 사막이나 시골 마을 등에 분산되어 연구가 이뤄졌다. 다만 워낙 대규모 연구라 하나의 실험 단위를 맡은 시설도 그 도시 전체와 맞먹을 정도였다. 이렇게 작정하고 자원과 천재들을 투입한 덕분에 계획은 3년 만에 성과를 냈다. 이로써 미국은 두 개의 원자폭탄으로 일본의 의지를 완전히 꺾고 승리를 거뒀다. 미국이 압도적 헤게모니를 갖는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어니스트 로렌스가 개발한 60인치 사이클로트론. 버클리 방사선연구소는 맨해튼 계획의 핵심 시설 중 하나였고,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해 원자폭탄의 원료인 우라늄-235를 분리해냈다.
전쟁이 끝나자 공포의 핵무기를 만들어낸 이 시설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화두로 떠올랐다. 맨해튼 계획을 이어받은 원자력위원회(현 에너지부)는 이를 국립연구소로 재편해 지역별 연구 거점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이에 핵심 시설이 있던 버클리, 로스앨러모스, 오크리지가 국립연구소로 지정됐다. 이 국립연구소들에는 실험시설의 공동 활용이라는 임무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전쟁 기간 고비용·고사양의 거대장비들을 많이 갖췄으니, 평화 시에는 이를 민간의 과학 연구에 사용하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버클리 방사선연구소는 1958년 로렌스 타계 후 그의 업적을 기려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로 개명했다. 오늘날 에너지부에 속한 17개 국립연구소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길며 연구역량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에너지부의 위탁으로 연구소를 운영하는 UC 버클리와도 관련이 깊다. 세계적 연구중심대학과 핵무기까지 만들어낸 첨단 인프라가 시너지를 내는 것이다. 이곳에서도 노벨상 수상자 14명이 배출됐으며, 공동연구 및 시설사용을 위해 연구소를 찾은 과학자의 수는 한 해에만 15,000명이 넘는다.
과학 연구에도 시대정신이 중요한 이유
이렇듯 연구소의 설립과 운영은 그 시대를 지배한 이념과 강한 연관을 갖는다. 이는 단순히 현상의 수준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시대정신과의 동기화는 연구소가 성공하는 실질적 요인이기도 하다. 과학 연구도 결국 사회 속에서 현실의 주체들과 관계를 맺으며 진전시켜나가야 하는 일이다. 물론 연구자의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 다만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현실의 조건을 만드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는 연구소 운영자들이 얼마나 진보적인 생각과 실천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보는 정치적 개념(좌파)이 아니라, 서두에 언급한 헤겔적 의미에 가깝다. 즉 시대의 과제를 통찰하고 사상을 발전시켜, 역사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끄는 것이다.
앞서 예로 든 세 곳의 연구소들에는 모두 이러한 시대정신의 체현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새로 만들 연구소의 비전을 시대적 과제와의 관계 속에서 발견했고, 이를 운영 철학에 불어넣었다. 그리고 헤겔이 말한 ‘시대의 아들’로서 당대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만들어냈다. 덕분에 인류는 여러 자연적 위협에서 벗어나 삶의 질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연구소들이 전쟁 등 모진 풍파를 겪고도 건재한 이유를 이와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즉 그만큼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시대정신을 공유하는 대중들에게 확고히 각인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많은 것들이 대중의 지지 여부에 따라 지속되거나 폐기될 수 있다. 정치와 기업이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다만 연구소라고 해서 여기서 특별히 예외가 되지는 않는다. 대중의 지지를 받는 연구소와 그렇지 못한 연구소는 연구활동의 범위와 수준에서 서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시대정신이라는 말을 정치권이나 기업인의 전유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연구소도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