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ght must precede application.(지식은 응용을 앞서야 한다)"
- 막스 플랑크(1858~1947)
막스플랑크연구회(Max-Planck-Gesellschaft, 이하 MPG)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초과학 연구기관이다. 과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곳이 심심하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집단이라는 것쯤은 안다. 2020년에도 2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물리학상의 라인하르트 겐첼은 세계에서 가장 큰 망원경(칠레 파라날 천문대)을 이용하여, 20년 넘는 관측 끝에 블랙홀의 존재를 입증했다. 화학상의 에마뉘엘 샤르팡티에는 난치병 치료와 동식물 개량에 혁명적 가능성을 지닌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작동 기작을 최초로 밝혀냈다. 이렇듯 이 연구소에서는 과학의 역사를 새로 쓸 최전선의 연구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넘사벽의 연구소
홈페이지를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이곳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다. 이중 역사, 노벨상 수상자, 예산의 세 가지 지표를 살펴보자. 1911년 창설된 MPG의 역사는 100년을 가뿐히 넘는다. 이는 전신인 카이저빌헬름연구회(Kaiser-Wilhelm-Gesellschaft) 때부터 계산한 것이나, 중간에 이름은 바뀌었어도 하나의 역사로 볼 수 있다. 그때 쯤에 동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망했고, 중국에서는 막 신해혁명이 시작되어 청나라가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독일은 그때 한 세기 넘게 세계적 연구소로 군림할 조직을 만든 것이다.
또한 노벨상 수상자는 35명에 이른다. 연구소 역사가 109년이므로 약 3년에 한 명 꼴로 수상자를 배출하는 셈이다. 올림픽과 월드컵의 개최 주기가 4년이니, 그보다 이 연구소에서 새로운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시간이 더 짧다는 이야기가 된다.
마지막으로 예산은 2018년 기준 약 2.37조 원 정도이다. 이게 정확히 어느 정도 규모인지 감이 잘 안 잡히니 이렇게 비교해보자. 2020년 우리나라 정부가 지원하는 전체 기초연구사업비는 1.52조 원이다. 정부는 2022년까지 이를 2.5조 원으로 늘리겠다는 ‘매우 도전적’인 목표를 제시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대학, 연구소, 기업 등이 나눠 갖는 전체 기초연구비를 탈탈 털어도, MPG 한 곳에서 쓰는 예산에 훨씬 못 미친다.
MPG 홈페이지의 Facts and Figures와 Nobel Prize 소개. 이곳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싶다면 이 두 페이지만 봐도 충분하다.
요컨대 MPG는 역사, 성과, 규모 등에서 우리가 아는 연구소의 일반적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이들이 이 정도 수준을 갖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일단 학술 연구를 중시하는 독일의 역사적 전통이 중요할 것이다. 독일은 자연과학은 물론 인문·사회과학에서도 인류 지성사를 대표하는 거목들을 배출했다. 예컨대 칸트-피히테-헤겔-마르크스로 이어지는 18~19세기 독일인 철학자의 계보가 그렇다. 그러나 MPG의 성장과 발전은 배경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랜 세월 다진 고유의 시스템이 역사와 조우하며 더 큰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독일 과학기술의 양대산맥, 대학과 공공연구소
이 연구조직은 ‘막스플랑크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86개에 달하는 막스플랑크연구소(Max-Planck-Institut, 이하 MPI)들의 연합체가 막스플랑크연구회(MPG)이다. 따라서 그냥 막스플랑크연구소라고 하면 MPG에 소속된 개별 연구소들을 의미한다. 이들을 집합 단위로 지칭하려면 막스플랑크연구회(MPG)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된다.
뮌헨의 MPG 본부가 독일 전국에 산재한 86개의 MPI들을 총괄 지원한다. 즉 연구는 각 MPI들이 수행하되, 공동의 의사결정이나 정책·사업의 추진은 MPG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구조이다. 이는 독일의 정치체제인 연방제와도 비슷한 형태(MPI-주정부, MPG-연방정부)다.
독일 전역에 위치한 MPI들의 분포 지도
그런데 독일에는 MPG를 포함하여 4개의 연구회(Gesellschaft) 또는 협회(Gemeinschaft)들이 있다. 독일 과학기술체제는 대학과 공공연구소가 상호 협력하는 형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런 공공연구소들이 대규모 연구(협)회로 조직된다. 막스플랑크연구회(MPG), 프라운호퍼연구회(FhG), 헬름홀츠협회(HG), 라이프니츠협회(LG)가 그들이다.
연구회와 협회는 조직 구조에서 차이가 있다. 영어의 Society로 번역되는 연구회는 수직적 구조로서 본부의 의사결정에 의해 개별 연구소들이 신설 또는 폐쇄된다. 그러나 영어의 Association으로 번역되는 협회는 수평적 구조를 취한다. 따라서 개별 연구소들의 가입 또는 탈퇴가 가능하다. 이러한 연구(협)회들은 역할 중복을 막기 위해 각자 미션에 특화된 연구를 수행한다.
MPG는 기초학문, FhG는 산업·응용기술, HG는 거대과학, LG는 학제 간 융합연구를 맡는다. MPG의 86개 MPI 외에도, FhG에 72개, HG에 19개, LG에 96개 연구소가 운영 중이다. 이들은 모두 연방정부 및 주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다. 모두 다 합치면 273개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분야 공공연구소 수는 30개 안팎에 불과하다.
연구(협)회들의 명칭도 인상적이다. 모두 저명한 독일인 과학자의 이름을 땄다. 자국의 뛰어난 과학자를 기리기 위해 연구소에 그 이름을 붙이는 것은 서구권에서 꽤 보편화된 일이다. 아직 세계에 내놓을만한 과학자가 없는 우리로서는 부러운 일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한국인 과학자의 이름을 따서 연구소를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딱히 이 사람이다 하고 떠오르는 이름이 없을 것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4개 연구(협)회. 대학과 함께 국가과학기술체제를 이끄는 쌍두마차 역할을 한다.
MPG가 다루는 기초학문의 범주
MPG는 천문학·천체물리학, 생명과학·의학, 물질·기술, 환경·기후, 인문학의 다섯 가지 분야를 연구한다. 말 그대로 ‘기초학문’을 폭넓게 다루는 셈이다. MPG가 어떤 분야를 연구할 것인가는 중요한 의사결정사항이다. 1975년 MPG 과학자문위원회는 연구분야 선정에 대한 두 가지 권고안을 제시했다. 첫째는 미개척 분야 또는 여러 분야들이 접목되는 분야이다. 이는대학에서 수행하지 않거나, 대학에 정착하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특수 거대 설비 또는 막대한 자원이 필요한 분야이다. 즉 국가의 공공투자 외 방법으로는 수행하기 어려운 분야를 의미한다.
흥미로운 점은 인문학도 주요 분야로 삼는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학문의 기초라는 기준에서 보면 과학과 철학은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근대 초기만 해도 과학자는 곧 철학자였고, 철학자들도 과학에 조예가 깊었다. 아이작 뉴턴과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전자에, 르네 데카르트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후자에 가깝다. 이렇듯 과학과 철학은 모든 지식체계에 대한 기반 역할을 한다. 요즘에는 거의 사라졌지만, 과거 '문리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인문대학과 자연과학대학이 통합된 단과대학이 존재했던 이유도 이와 같다.
또한 현대과학과 인문학의 거리가 줄어들었다는 이유도 중요하다. 인지과학, 신경과학, 사회생물학 등이 그러한 경향을 선도하는 분야들이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처럼 인문학의 시선에서 과학을 탐구하는 학문도 비중이 커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MPG는 인문학 관련 MPI들도 적지 않은 비율로 두고 있다. 오래전 문과와 이과의 구획이 명확해져 교류가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거버넌스의 특징
각 MPI들의 연구도 다양하고 복합적인 층위로 이루어진다. MPI 조직은 연구소 대표 분야에 대한 주제별 연구부서(department)와 특수 목적 연구그룹(research group)으로 구성된다.
연구부서의 수장은 디렉터(director)라고 한다. 이들이야말로 MPG의 중추이자 핵심 인재들이다. 엄격한 평가를 거친 세계적 과학자가 디렉터로 선발되며, MPG가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의 대부분도 이들이 차지한다. 디렉터는 학문적 권위만큼이나 연구소 운영에 많은 권한을 갖는다. MPG는 ‘우수한 과학자에 대한 신뢰와 자율성 보장’을 지향하는데, 디렉터들이 이 철학을 체현하는 현실의 주체가 된다. 디렉터는 MPG 내에서 소수만 얻을 수 있는 정년을 보장받으며, 연구·인사·예산 등에 절대적 권한을 행사한다. 즉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연구할지, 누구를 뽑아서 어디에 활용할지, 재정과 자원은 어느 정도로 투입할지를 모두 디렉터가 결정한다. 게다가 MPG의 과학 회원(scientific member) 자격도 가진다. 과학 회원은 MPG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중요한 단위인데, 대부분 전·현직 디렉터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와 다르게 연구소장(managing director)은 큰 의미가 없다. 소장직을 디렉터들이 돌아가며 맡는 데다, 주요 의사결정은 디렉터 협의기구(board of directors)를 통해 내려지기 때문이다. 즉 MPI의 운영은 우리나라로 치면 정부출연(연)보다는 대학과 더 비슷하다.
MPI의 또 하나 중요한 조직은 연구그룹이다. 연구부서가 큰 변동 없이 운영되는 골간 조직이라면, 연구그룹은 특정 목적 달성을 위해 편성하는 태스크포스팀에 가깝다. 이는 MPI별로 다양한 목적에 따라 운영된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젊은 과학자들이 이끄는 연구그룹이다. MPG는 대학으로 치면 정교수에 해당하는 디렉터 못지않게, 부·조교수 및 박사후연구원에 해당하는 연구자들이 연구를 주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MPI의 연구그룹은 소규모로 운영되기 때문에 젊은 연구자들이 도전적 연구를 하는 데 유리하다.
이러한 연구그룹의 수장을 그룹리더라고 한다. 그룹리더들은 2~10명의 연구원들을 데리고 디렉터 또는 외부로부터 지원받는 연구비를 통해 그룹을 운영한다. 어디서든 신참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기회를 얻기 어렵다. 그러나 MPG의 연구그룹 프로그램은 신참 연구자들도 도전적인 연구를 시도할 수 있게 해준다. MPG의 세계적 경쟁력은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지만, 그중에서도 젊은 과학자들을 키우는 능력은 독보적이다. 이 그룹리더 출신 중에 약 11%가 향후 MPI의 디렉터로 성장한다는 통계도 있다.
지금까지 알아본 MPI의 조직 구조 특징을 실제 사례를 통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래 이미지는 생명과학의 대표적 기초분야인 발생학을 연구하는 MPI for Developmental Biology의 거버넌스를 요약한 것이다.
MPI for Developmental Biology의 연구조직 체계
MPI for Developmental Biology의 연구부서는 진화생물학, 미생물학, 분자세포생물학 등의 5개 주제로 구성된다. 연구그룹도 3개가 있는데, 식물의 병원체, 섬모류의 유전체, 상리공생 등을 연구한다. 이러한 구성을 보아 짐작하건대, 이 MPI는 정규 연구부서는 기초 및 기반학문들을 연구하고, 연구그룹을 통해 이를 특정 주제들에 적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다수의 소규모 프로젝트들이 MPI 내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수도 많고 복잡해서 이 이미지에서는 생략하였다.
카이저빌헬름연구회 창설과 하르낙 원칙
앞서 언급했듯 MPG의 역사는 109년에 이른다. 1911년 독일 제국 3대 황제 빌헬름 2세의 칙령에 의해 설립한 카이저빌헬름연구회(이하 KWG)가 그 시초이다. 창설과 함께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와 화학연구소가 설립되고, 다른 분야 연구소들도 생기면서 30개까지 확대된다. 20세기 초에 빌헬름 2세의 지원을 받아 KWS가 설립된 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다.
KWG의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와 화학연구소 개막식에 참석한 빌헬름 2세
우선 빌헬름 2세의 부국강병 정책을 들 수 있다. 빌헬름 2세는 유럽 안정의 중재자로서 실리를 우선시한 선대 황제들과 다른 노선을 택했다. 그의 꿈은 독일을 대영제국처럼 만드는 것이었으며, 부국강병을 통한 해외팽창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통치 슬로건도 ‘Deutschland uber alles(그 무엇보다 독일)’라고 했다. 이에 따라 국내 산업 육성, 국방력 강화가 시급한 정책과제가 되었다. 지금이야 독일이 미국 다음 티어의 강대국이지만, 20세기 초반만 해도 영국과 프랑스 등에 뒤진 후발산업국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진국들을 따라잡기 위한 산업기술 개발을 주도할 KWG 설립을 구상한 것이다. KWG는 황제의 이름을 간판에 내세웠기 때문에 순식간에 유명해졌고, 기부금도 많이 모을 수 있었다.
또한 독일 과학자들의 연구소 설립 노력(또는 로비)을 들 수 있다. 과학사가 데시리 슈아즈는 ‘기초연구(basic research)’ 개념의 형성사를 추적하면서 흥미로운 지적을 했다. 그녀에 따르면 이 개념은 독일에서 19세기 말부터 쓰였는데, 역설적으로 공학기술 발전에 따라 공학과 과학의 경계가 모호해진 데서 기인한다. 즉 당시 공학이 기술혁신을 이끌면서 전문 학술분과로 성장한 반면, 과학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무렵 베를린 공대 총장 알로이스 라이들러는 과학과 기술의 관계가 양방향적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는 과학의 위치를 넘볼만큼 성장한 공학의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슈아즈는 위기를 느낀 과학자들이 공학자와 자신을 구분 짓기 위해 기초연구 개념을 도입했다고 말한다. 과학자들은 기초연구를 '비록 불확실성은 크지만, 안정적 지원을 받아야 하는 학문 분야'로서상징자본화한 것이다. 이는 기초연구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연구소를 만들자는 발상으로 이어졌고, 빌헬름 2세가 호응하면서 KWG가 탄생했다. 즉 MPG도 시작은 과학자들의 밥그릇 챙기기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빌헬름 2세에게 기초과학 연구기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은 베를린의 신학자 아돌프 하르낙이었다. 하르낙은 산업화의 문제들은 물리와 화학의 더 많은 원리들을 발견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황제를 설득했다. 이렇게 산업에 기여한다는 논리로 기초연구비를 확보하려는 하르낙의 모습은 현대의 과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KWG 초대 총재 아돌프 하르낙. 모든 MPG 과학자들에게 그는 건국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그런데 하르낙은 KWG의 초대 총재가 되자 이전과는 다른 논리를 취했다. 그는 국가 지원으로 만든 KWG가 올바로 성장하려면 정작 국가로부터의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오늘날 MPG의 상징과도 같은 ‘하르낙 원칙(Harnack Principle)’이다. 하르낙의 지론은 ‘뛰어난 과학자를 먼저 찾아내 그를 중심으로 연구소를 운영하며, 그가 연구에만 집중하도록 지원한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이는 과학연구에서 획기적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MPG의 가장 중요한 철학으로 존중받고 있다. 또한 하르낙은 연구자금 조달에도 수완을 보여 자본가들로부터 많은 지원금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이로써 초창기 KWG 연구자들은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부담 없이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설립 4년 만인 1915년에는 창업 멤버이자 유기화학연구소장인 리하르트 빌슈테터가 첫 노벨상을 수상하여 이러한 운영 방식이 효과적이었음이 입증된다.
막스 플랑크와 위기의 시대
그러나 1930년 하르낙 사망, 1933년 나치 집권을 겪으며 KWG는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집권당 나치는 KWG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당시 KWG는 재정의 절반 이상을 국고 지원에 의존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1937년에는 정관 개정으로 제국문교부 장관 산하로 소속되었다. 이로써 총재 선출과 이사 임명도 나치의 승인 하에 이루어지게 됐고, 그만큼 과학자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게다가 나치는 과학자들에게 인종말살정책 및 군수산업 발전에 필요한 연구를 지시했다. KWG는 하르낙이 주창했던 과학자 중심의 연구소가 아닌, 정치 이데올로기의 시험장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독일을 탈출한 과학자들. 앞줄 왼쪽 두 번째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보인다. 과학에 이데올로기를 강요한 나치의 정책은 심각한 두뇌유출로 이어졌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하르낙에 이어 2대 총재를 지낸 사람이 막스 플랑크이다. 흑체복사 연구와 양자역학 성립에 중요한 기여를 한 막스 플랑크는 191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당대의 석학이었다. 하지만 나치는 플랑크가 소신에 따라 운영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플랑크도 대부분의 독일 지식인이 그랬듯 나치의 정책에 별로 동조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대놓고 나치에 반발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1933년 나치는 직업공무원 재건법을 발표하여 유대인 과학자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704명의 KWG 직원 중 비(非) 아리안족은 55명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여기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프리츠 하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두 명은 인류사에서 비교대상조차 없는 천재들이었음에도, 과학에 앞선 이데올로기 때문에 연구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흔히 하는 우스갯소리로 ‘막스 플랑크의 두 가지 위대한 발견’이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이라고 한다. 특허청 공무원으로 일하던 아인슈타인의 재능을 알아보고 연구원으로 발탁한 것이 플랑크이기 때문이다.
하버는 플랑크의 동료로서 같은 해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수상 업적이 저 유명한 질소를 농축해 암모니아로 합성하여 인공 질소 비료를 만들어내는 방법(하버-보슈법)이다. 덕분에 식량 생산량이 몇 배는 더 증가했고, 상시적 기아 위기로부터 인류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 즉 하버는 당시 정설로 인정받은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의 암울한 예언(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을 무너뜨린 장본인인 것이다. 하버는 유대인이었으나 오래전 개신교로 개종했고 조국 독일에 엄청난 애국심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1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의 승리를 위해 독가스 개발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치는 유대인은 뭘 해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하버를 퇴출시키려고 했다. 하버의 천재적 능력을 높이 산 플랑크는 그를 지키기 위해 여러 차례 탄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프리츠 하버(왼쪽)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오른쪽) 막스 플랑크에 의해 중용된 그들은, 인류사에서 비교대상조차 없는 천재들이었으나 나치의 탄압 때문에 연구소를 떠나야 했다.
나치 집권이라는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플랑크의 리더십은 크게 제약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한계 속에서도 플랑크는 하르낙이 만들어 놓은 KWG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다.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치에 저항해서도, 순종해서도 안 되는 절묘한 정무적 감각이 필요했다. 플랑크는 나치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면서 하버를 지키고자 했고, 뛰어난 유대인 과학자들도 계속 고용했다.
하지만 KWG의 나치화를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수년에 걸친 나치와 플랑크의 갈등은 1938년 나치의 반대로 플랑크가 총재직 재선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플랑크의 노력으로 연구조직 유지에는 성공했고, 이는 전후 재건의 기틀이 되었다. 후대에 하버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이 플랑크를 위대한 리더로 칭송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치의 패망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플랑크는 다시 한번 총재로 선출되었으나 1947년 사망했다. 후배 과학자들은 위기의 시대를 견뎌낸 플랑크에 경의를 표하며 1948년 KWG를 그의 이름을 딴 막스플랑크연구회로 재탄생시켰다. 이후 서독 정부 수립과 함께 KWG 소속 연구소들이 MPG로 이동하였고, 1953년 베를린의 두 개 연구소가 최종 합류함으로써 통합이 완료되었다.
막스 플랑크는 나치 집권이라는 위기의 시대에 연구회를 지켜냈다. 후배 과학자들은 그의 노고를 기려 KWG를 그의 이름을 딴 MPG로 재탄생시켰다.
전후의 성장과 혁신
2차 세계대전 후 서독은 미국의 지원(마셜플랜)과 세계적 호황에 힘입어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룬다.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이다. 1950년대부터 본격화된 MPG의 성장도 라인강의 기적을 닮은 것이었다. 막스 플랑크를 이어 총재직을 맡은 오토 한(1944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이 재건을 진두지휘했다. 그가 재임한 14년 간 연구회 예산은 4배 가까이 증가했으며, MPI 수도 21개에서 40개로 늘었다. 또한 1960년 연구회 본부가 뮌헨으로 옮겨, 현재와 같은 운영체계가 마련되었다.
인프라 확대와 제도 혁신도 뒤따랐다. 1956년 생화학 연구소를 필두로, 1961~62년 뇌과학 연구소와 인간개발 연구소가 문을 여는 등 전후 새롭게 부상한 분야들로 조직이 확장되었다. 거대과학에 대한 투자도 본격화됐다. 1971년 에펠스버그에 설치한 전파천문연구소의 전파망원경은 지구에서 가장 큰(직경 100m) 완전 조종 망원경이다. 더불어 젊은 과학자를 위한 연구자금이 확대됐다. 1969년 신설된 튀빙겐의 프리드리히 미셔 연구소는 아예 젊은 과학자의 지원에 특화되었다. 1978년에는 뛰어난 젊은 과학자들에게 수여하는 ‘오토 한 메달’이 제정됐다. MPG 특유의 젊은 과학자 육성 노력은 이렇듯 50여 년 전부터 전통으로서 자리 잡아 온 것이다.
1990년 독일 통일은 MPG에도 중요한 전기가 됐다. 통일 직후 분단 50여 년 동안 벌어진 서독과 동독의 차이를 메우는 것이 국가적 과제가 되었는데, 과학기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에 MPG는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동독 지역에 MPI 신설을 집중하여 과학기술 역량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당연히 서독의 연구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사실 이는 과학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효율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MPG의 리더들은 통일 독일에 부합하는 새로운 연구회로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를 밀고 나갔다.
특히 1996년 총재에 취임한 당시 48세의 후베르트 마르클이 개혁을 주도했다. 첫 외부 영입 총재였던 그는 예산을 동독 지역에 집중 투입하여 1998년까지 18개의 MPI를 신설했다. 동시에 지속 필요성이 없어진 서독의 MPI들을 다수 폐쇄했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적으니 그랬나 보다 싶지만, 국가 지원을 받는 연구소를 폐쇄 또는 신설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명확한 기준을 설정하는 것도 어렵지만, 이해관계자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게다가 MPG는 독일 과학사를 대표하는 원로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기관이다. 이런 곳에 젊은 외부 인사가 들어와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으니, 아마 별의별 험악한 과정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결과 우리가 아는 전국적 연구소 집합체로서 MPG의 모습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인구 8천만 명의 강대국이자 EU의 리더인 통일 독일의 위용에 걸맞은 세계적 기초과학 연구기관은 그냥 얻어지지 않은 것이다.
독일 통일의 시대적 과제는 MPG에도 대규모 혁신을 요구했고, MPG의 리더들은 이에 충실히 부응했다.
그들이 성공한 비결
MPG의 철학, 운영체제, 조직구조,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이들이 성공한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이는 MPG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를 것이다. 그러나 다음 네 가지는, 누가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성공요인일 것이다.
먼저 자율성이다. 앞의 하르낙 원칙에서 살펴봤듯, 뛰어난 연구자를 선발하여 원하는 대로 연구하도록 지원한다는 철학이 MPG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하르낙은 국가의 지원을 얻어내면서도 운영에 있어서는 그 역할을 배제했다. 요즘 같은 민주주의 시대에도 쉽지 않은데, 황제가 절대권력을 갖는 제국주의 시대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그렇게 사람들의 철학과 관습에 스며든 전통은 쉽게 흔들리지 않음을 역사가 보여준다.
하르낙 원칙은 100년이 넘는 연구회 역사에서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연구회 구성원들의 강력한 의지 덕분에 이 원칙을 지켜낼 수 있었다. 나치 집권이라는 혼란 속에서도 연구자들이 이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잃지 않았기 때문에 MPG가 존속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단위에서는 퇴행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일시적 변화가 아닌 장기적 흐름이다. 연구소라는 조직은 한 두 해 해보고 안 되면 접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간의 변화에 휘말리지 않고 느려도 분명한 비전에 의거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MPG의 위대함은 완벽한 연구소라서가 아니라, 역사의 긴 호흡에서 자신들의 철학을 조금씩 현실로 옮겨나갔다는 데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지표가 총재들의 임기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부출연(연) 기관장 임기는 보통 3년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이마저도 못 채우는 경우가 있다. 반면 MPG 총재의 임기는 6년이고 연임하는 경우도 꽤 많다. 109년의 연구회 역사에서 12명의 총재가 있었고, 그중 5명이 10년 이상 총재직을 수행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직후 오토 한은 무려 14년 동안 총재직을 맡았다(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 세 명이 집권할 시간이다). MPG도 우리나라 출연(연)처럼 대부분 재정을 정부에서 지원받는다. 그럼에도 기관장이 길게 활동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부와 연구기관의 신뢰가 매우 굳건함을 시사한다. 이렇듯 독일 정부가 MPG에 부여하는 두터운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지원은, 연구자들이 오직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오토 한은 유대인 출신으로 나치 독일에서 도피한 과학자다. 1944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고, MPG 역대 최장 기간 총재직을 맡아 성장과 혁신을 주도했다.
두 번째는 역동성이다. MPG는 2만 3천 명이 넘는 직원들이 2조 원이 넘는 돈을 쓰는 초대형 연구기관이다. 워낙 대규모 조직인 데다 전국에 세분화되어 있다 보니, 거버넌스와 내부 체계가 복잡하다. 그야말로 관료주의와 무사안일주의가 암약하기 딱 좋은 조건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실제 운영을 보면 MPG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역동적이다. MPG는 신진급에서 석학급, 학생에서 명예교수까지, 다양한 연구자들이 역량을 극대화하며 참여할 수 있는 유연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MPG의 약 1만 5천 명의 연구인력 중 디렉터는 400명 안팎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박사후연구원, 대학원생, 인턴, 초빙연구원 등이 연구인력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MPG 본부는 이들이 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와 자원을 제공한다. 정규 연구부서(department) 외에도, 각종 연구그룹, 프로젝트, 그랜트 프로그램, 대학원 과정 등이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외부인이 MPG에서 연구하고 싶다면, 본인에 맞는 포지션을 골라서 진입하기가 자유롭고 편하다.
이런 특징 때문에 MPG에서 정년까지 재직하는 영년직 연구원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디렉터들과 디렉터가 정년보장을 대가로 채용하는 몇몇 인재들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조직도 학문적 필요에 따라 없애거나 만들 수 있다. MPG의 인재정책은 “여기서 오래 머무르면서 연구하세요”가 아니라, “여기서 얼른 좋은 성과를 쌓고 다른 곳으로 가세요”에 가깝다. 따라서 많은 연구직들이 MPG에 있는 동안 최상의 지원을 바탕으로 최고의 성과를 내고자 한다. 소수 영년직인 디렉터들은 이들이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지도한다. 그러니 성과가 안 나올 수가 없고, 성과를 낸 이들은 MPG라는 빛나는 경력을 바탕으로 쉽게 이직한다. 그리고 그 자리를 다시 외부의 신진인력들이 채우는 선순환이 이뤄진다.
우리나라 출연(연)과 MPG의 가장 큰 차이점이 이 부분이다. 국내 출연(연)은 대부분 연구직의 정년을 보장한다. 그래서 들어오기는 어렵지만, 일단 들어오면 나갈 가능성이 매우 적어 안정적이다. 본인이 속한 센터나 사업도 여간해서는 잘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MPG는 들어오는 것은 쉬워도, 들어오면 그때부터 성과에 대한 엄청난 압박이 가해진다. 여차하면 본인이 수행하던 프로그램 자체가 없어지기도 한다. 조직 특성이 이렇게 극과 극이니, 우리나라와 MPG의 연구자들은 연구를 대하는 태도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나라든 독일이든 사회의 특성에 따라 연구제도가 형성된 것이므로, 어느 것이 꼭 맞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MPG라는 모델을 벤치마킹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역동성 문제일 것이다.
세 번째는 다양성이다. MPG는 그 크고 아름다운 사이즈만큼이나 내부 스펙트럼도 넓고 다양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메커니즘이 대학 및 국제사회와의 협력이다. MPG의 연구분야는 대학과 차별성을 두지만, 연구소 운영은 대학과 공동으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협력 수준이 높다.
우선 MPI 건물 자체가 대학 내부 또는 인근에 있다. 일단 거리가 가까워야 협력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렉터 등 핵심 연구자들은 MPI 연구직과 대학 교수직을 함께 맡는다.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잘 설명이 안 되는 제도인데, 연구소와 대학에 모두 소속되어 연구와 교육 업무를 동시 수행한다. 이런 이중구조는 MPG와 대학에 윈윈 효과를 창출한다. MPG는 젊고 똘똘한 학생들을 연구에 동원하고 그중 싹수가 보이는 인재를 키울 수 있어서 좋고, 대학은 MPG 덕분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독일의 연구중심대학에 가보면 거의 반드시 인근에 MPI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튀빙겐대학 근처에는 MPI for Developmental Biology, MPI for Intelligent System의 2개 연구소가 있다. 뭔헨공대 근처에도 MPI for Quantum Optics, MPI for Astrophysics, MPI for Plasma Physics의 3개 연구소가 있다.
튀빙겐대학에서 두 MPI까지 거리는 2.2km 밖에 안 된다.
이는 MPG만의 특성은 아니다. 독일의 많은 연구소들이 대학과 협력하고 있으며, 연구와 교육의 시너지는 독일 지식체계의 가장 중요한 근간이다. 그래서 독일의 과학기술 주무부처는 교육 업무도 함께 관장하는 연방교육연구부(BMBF)이다.
또 외국에서 들어오는 인력들도 매우 많다. 약 1만 5천 명의 연구인력 중 외국인 비율이 52%를 넘는다. 그러니까 MPG에서 연구하는 사람의 두 명 중 한 명은 외국인이다. MPG 본부는 매우 적극적으로 해외 인재들을 유치하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국제대학원과정인 International Max Planck Research School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MPG 연구진의 지도로 박사과정을 밟는 학생 수만 2천 명이 넘는다. MPG는 최근 해외 주재 연구센터도 적극적으로 설치하는 중이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을 통해 세계 인재를 끌어들이는 두 축인 미국, 중국과 경쟁하고 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사회성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과학의 이미지는 연구자들이 상아탑 안에서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고 책 읽고 토론하며 실험하는 모습이다. 국내에도 MPG가 정치와는 무관하며 한 번도 학문적 자율성을 침해받은 적이 없다고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도 MPG처럼 정치성과 분리된, 순수하고 자율적인 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고고한 모습은 실제 MPG의 성장과정과는 거리가 멀다. 앞서 살펴봤듯 MPG 역사에는 현실과의 격렬한 상호작용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MPG 자체가 20세기 초 사회의 산물이었고, 그 발전 또한 사회와의 관계 맺음을 통해 진행돼 왔다. MPG 구성원들은 사회 속의 과학자로서 사회에 개입하고 그와 교감하며 연구소를 키워왔던 것이다.
일례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나치의 전쟁범죄 참회를 국가의 정체성으로 삼았는데, MPG 과학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9년 MPG 총재 오토 한은 와이즈만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이 방문은 서독 총리 콘라드 아데나워가 홀로코스트를 사죄하고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자 한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한은 서독 과학자 대표로서 총리의 사과에 힘을 보태고, 이스라엘과 연구교류를 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수 십 년 뒤에도 비슷한 노력이 이어졌다. 2001년 MPG 총재 후베르트 마르클은 나치 시절 KWG가 주도한 유대인 대상 생체실험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느낀다고 사과했다.
과학자는 그저 연구만 잘하면 된다는 우리 상식에서는 매우 특이한 일이다. 그러나 MPG의 과학자들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본인들의 연구를 늘 사회적 맥락 안에 두어 왔다. 1957년 독일 정부의 핵무기 개발에 반대(괴팅겐 선언)한 과학자들이나, 1990년대 동독 과학기술을 키운 리더들도 모두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사회와의 적극적인 교감을 통해 MPG는 국민적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연구소는 단지 인력과 예산만이 아닌, 사회와 함께 커나가는 것임을 실천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MPG의 네 가지 성장 비결을 정리했지만, 너무 지당한 이야기들이라 비결이라고 할 만한 것도 못 된다. 이는 연구소 생활을 조금만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식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다음의 첫 문장이 매우 유명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이를 연구소에 빗대어 바꿔 보면 이렇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잘 되는 연구소는 모두 비슷한 이유로 잘 되지만, 안 되는 연구소는 저마다의 이유로 안 된다.’ MPG 같은 연구소가 어떻게 세계 최고가 됐는지 시사점을 도출하는 작업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그 시사점이란 것은 모두가 아는 뻔한 가르침일 수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각자 다른 연구소의 현실에 맞게 적용하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