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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Oct 31. 2020

혁신의 이중성과 인간의 삶

언젠가부터 ‘혁신’이 지상명령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 최근 담론 시장에서 유통되는 수많은 용어 중에 혁신처럼 긍정성과 당위성을 내포하는 개념이 또 있을까 싶다. 예컨대 기술 또는 기업 앞에 붙는 혁신적이라는 수식어가 그렇다. 애플이 자본주의의 총아로 인정받는 것은 아이폰이라는 비교불허 상품을 만드는 혁신적 기업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공공부문도 예외가 아니다. 혁신성장으로 요약되는 현 정부 국정목표가 대표적이다. 그래서인지 과학기술혁신본부, 혁신행정담당관 등과 같은 정부조직 명칭도 많아졌다. 이렇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혁신을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그저 좋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혁신의 개념적 긍정성에 가장 큰 기여를 한 학자는 조지프 슘페터이다. ‘혁신의 경제학자’라는 별명답게 그는 자본주의 역사를 혁신의 과정으로 이론화했다. 슘페터가 말한 혁신은 곧 창조적 파괴였다. 즉 부단히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 것을 창조하여, 본래의 경제구조를 바꾸는 돌연변이 산업의 연속적 등장이 자본주의 발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혁신은 반드시 파괴를 전제로 한다. 요컨대 기존 산업을 지탱한 자원, 노동력, 사회제도 등이 해소된 뒤에,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하여 발전을 추동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똑같은 역사를 전혀 다르게 해석한 학자도 있다. 바로 칼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스는 슘페터가 창조적 파괴라고 본 과정을 수탈과 착취라고 규정한다. 그는 최초의 노동자들이 중세 영주의 땅을 경작하던 농노들이 도시로 쫓겨나면서 생겨났다고 본다. 그리고 산업의 부침과 연동하여 이 노동자들도 해고와 실업의 과정을 반복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설명이다. 혁신으로 산업이 되살아나는지 모르지만, 이는 일하는 사람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작동한다는 이야기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보면 슘페터가 강조하는 파괴에는 인간의 삶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혁신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두 경제학자, Karl Marx(왼쪽)와 Joseph Schumpeter.(오른쪽)

누구 말이 맞을까? 대부분 사회과학 이론이 그렇듯, 두 학자의 의견이 정답과 오답으로 칼같이 나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각자 일정한 진리와 오류를 동시에 담고 있을 것이다. 둘의 상반된 논의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혁신의 이중성이다. 혁신은 분명히 시대를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혁신의 반복이 산업 고도화로 이어졌고, 사회도 풍요로워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마르크스조차 이로 인한 자본주의의 역사적 성취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 역동적 에너지가 모두를 행복하게 하지도 않는다. 대표적 예로 지난 수십 년 간 진행되어 온 신자유주의화를 들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누적된 복지국가의 비효율을 전면 교정하려는 혁신 패러다임으로 도입되었다. 공공부문 민영화, 노동유연화, 규제완화, 자본자유화를 최우선 목표로 삼는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산업과 혁신기업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실업자를 양산하고 고용불안 위험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혁신의 또 다른 단면이었다.


처음의 의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혁신은 좋은 것인가?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일 것이다. 혁신은 절대선이나 목적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혁신을 지고의 가치로 받아들이며 이면에 존재하는 삶의 파괴를 시야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 화두인 4차 산업혁명도 이런 맥락에서 사고해야 한다. 기술혁신과 경제성장이라는 미명에만 주목해 인간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변화에 소홀히 대응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물인터넷이나 빅데이터 같은 유망기술만큼이나, 기본소득 등의 대안적 사회제도도 중요하게 연구해야 한다. 혁신을 ‘인간 삶의 질 향상’이라는 대전제 안으로 종속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그 좋은 개념의 본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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