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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Aug 21. 2024

시대가 원한 부활

일본 이화학연구소 (4)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는 둘로 쪼개졌다. 두 승전국인 미국 편(자본주의)과 소련 편(공산주의)으로 말이다. 양 진영은 적대적이었으나 대놓고 무력을 쓰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핵무기까지 개발한 마당에, 무력을 잘못 쓰면 공멸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 무력 대결이라는 뜨거운 전쟁에서, 체제 경쟁이라는 차가운 전쟁으로. 이런 새로운 국제 질서를 냉전이라고 했다. 과학기술도 냉전의 한 부문이 되었다.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로 선빵(?)을 날리자, 자존심 상한 미국이 아폴로 11호를 달에 착륙시킨 사례가 대표적이다.

     

일본, 독일 등 패전국은 냉전의 수혜를 입었다. 원래대로라면 전범국으로 낙인찍혀서 숨죽여 지내야 했다. 그런데 공산주의 진영과 맞닿은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본래 미국은 일본을 농업국가로 만들어 다시는 전쟁을 꿈도 못 꾸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 계획은 전면 수정되었다. 전쟁 내내 일본은 물자와 인프라를 생산해내는 병참기지 역할을 했다. 이는 설비 확대와 기술 혁신으로 이어져 중화학공업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반도가 휴전되자 미국은 일본을 강력한 동맹으로 키우기로 마음을 바꿨다. 이것이 1950년대 일본의 산업이 부흥하는 토대가 되었다. 과학자들이 전쟁 이전에 쌓아둔 지식은 어디 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걸 바탕으로 1950년대 후반 일본의 과학기술은 금세 선진국 수준에 오를 수 있었다. 특히 전후 자본주의의 총아로 떠오른 전자산업의 혁신이 돋보였다. 1955년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필두로 세탁기, 냉장고, TV 등이 개발되어 수출의 성장세를 이끌었다.

한국전쟁 중 일본의 군수공장에서 전투기를 생산하는 모습(왼쪽)과 1950년대 경제부흥기의 일본(오른쪽).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로 산업기술이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되찾은 영광

     

이러한 변화는 RIKEN에도 기회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민간 기업이 된 RIKEN의 운영은 여러 모로 불안정했다. 역시 정부 지원이 중단된 것이 치명적이었다. 페니실린을 개발하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재원 조달에 한계가 있었다. RIKEN이 페니실린으로 재미를 보자 비슷한 상품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1952년 RIKEN은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000명에 가까운 인원을 줄여야 했다. 불과 3년 전에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연구소치고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1958년 반전이 일어났다. 일본 의회가 RIKEN을 특수법인으로 바꾸는 법을 의결한 것이다. 이로써 RIKEN은 다시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국가 연구소가 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시대적인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바로 전해인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국도 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하여 아폴로 계획에 나섰다. 이것은 냉전 시대에 과학기술과 국가의 결합을 상징하는 사건들이었다. 이념과 체제 경쟁에 있어 과학기술만큼 국격을 드높이는 수단도 없었다. 일본 정부도 과학기술의 국가화라는 관점에서 RIKEN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이제 주식회사 과학연구소는 다시 특수법인 이화학연구소가 되었다. RIKEN으로서는 과거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10년 만에 되찾은 셈이었다.

     

특수법인화는 RIKEN에 채워진 족쇄들을 풀어줬다. 풍부한 재정 지원은 물론, 연구의 제한도 사라졌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1948년 미군정은 무기와 관련된 모든 연구를 금지한다는 조건으로 RIKEN을 살려줬다. 도쿄만에 던져버린 사이클로트론은 그 상징과도 같았다. 그런데 특수법인이 되면서 이 조건은 유명무실해졌다. 1966년 RIKEN은 니시나 요시오가 만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했다. 마침 세계 물리학계에서 기본입자와 기본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표준모형이 정립되는 때이기도 했다. 일본은 이 사이클로트론으로 전쟁으로 끊긴 핵물리학의 대를 잇고, 세계 물리학의 전성기를 따라잡을 수 있게 됐다.

1943년 니시나 요시오가 개발했던 사이클로트론(왼쪽)과 현재 RIKEN이 운영 중인 중이온가속기 RIBF(오른쪽). RIKEN의 핵물리학은 패전으로 20년의 단절기를 겪었다.

     

이렇듯 1960년대는 RIKEN의 중흥기였다. 이 시기를 이끈 소장은 8대 나가오카 하루오다. 그는 초창기 RIKEN 물리학의 대부였던 나가오카 한타로의 아들로서, 역대 소장 중 유일한 문과 전공자였다. 세계 연구소의 역사를 보면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리더가 종종 뜻밖의 성과를 내기도 한다. 나가오카도 그런 경우였다. 1958년 소장에 취임한 나가오카는 특수법인이 된 RIKEN이 국가 연구소로서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 할 시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RIKEN과 비슷한 해외 연구소들인 독일 막스 플랑크 협회와 덴마크 닐스 보어 연구소를 돌아봤는데, 귀국하자마자 연구소 부지부터 옮겨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미 50년 가까이 쓴 도쿄 고마고메의 건물로는 새로운 트렌드에 맞춰 연구의 확장을 도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960년 나가오카는 RIKEN을 사이타마현 와코시로 옮겨 달라고 일본 정부에 건의했다. 23헥타르에 이르는 와코시의 부지는 본래 1964년 도쿄올림픽을 위한 선수촌 후보지였다. 그러나 나가오카는 이 금싸라기 같은 땅을 올림픽보다는 과학을 위해 쓰자는 논리를 폈다. 이러한 끈질긴 로비가 먹혀서 결국 연구소 이전이 확정되었다. 덕분에 RIKEN은 사이클로트론을 비롯한 첨단 시설을 짓고 많은 과학자를 데려올 수 있게 되었다. 1967년 RIKEN은 와코시의 새 컴퍼스로 이전했고, 현재까지도 그 자리에 있다.

     

1965년에는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두 번째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수상 근거는 1948년 발표한 재규격화 이론. 양자역학이 특수상대성이론과 불일치하는 난점을 해결한 성과였다. 이때 공동 수상한 인물이 유명한 리처드 파인만이다. 파인만은 자신보다 앞서 이론을 제창한 도모나가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그의 이름을 수상 기록의 가장 앞에 올렸다. 이로써 RIKEN은 양자역학의 핵심 공로자 2명을 배출하게 됐다. 유카와는 중간자 개념으로 핵력을 이해하는 길을 열었고, 도모나가는 재규격화 이론으로 양자역학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연결했다. 현대물리학에서 양자역학은 상대성이론과 함께 독보적 위상을 갖는 패러다임이다. 이를 고려할 때 유카와와 도모나가는 RIKEN이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한 학자들이다.



     

생명과학의 부상

     

RIKEN은 이름(이화학연구소)에서 보듯 태생이 물리학과 화학 연구소였다. 화학자들이 기획과 설립을 맡았고, 물리학자들이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에 변화가 생겼다. 생명과학이 새로운 주력 분야로 떠오른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는 패전으로 물리학, 특히 핵물리학 연구가 활기를 잃었다는 점이다. 물리학자인 니시나 요시오조차 페니실린 개발로 눈을 돌릴 정도였으니 그 침체된 분위기가 짐작된다. 둘째는 세계 과학계에서 생명과학이 급부상했다는 점이다. 1950년대 DNA 구조가 규명되면서 분자생물학이 태동했고, 그것은 물리학자들마저 흡수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RIKEN 역시 이 흐름을 탈 수밖에 없었다.

    

그 기원은 스즈키 우메타로로 거슬러 올라간다. 1874년생으로 RIKEN 설립에도 참여한 그는 인류사에 남을 발견을 했다. 바로 비타민이다. 일찍이 스즈키는 일본인이 서양인보다 체격이 작은 이유를 연구한 농학자였다. 일본인의 왜소한 체격은 근대화를 내세운 메이지 시대에 많은 지식인이 고민한 문제이기도 했다. 스즈키는 그 원인이 쌀 중심의 식문화에 있다고 보았는데, 실험 과정에서 쌀겨에서 나온 추출물이 각기병의 치료 효과가 있음을 발견했다. 당시 각기병은 아시아 지역에서만 매년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낼만큼 무서운 질환이었다. 스즈키는 이 추출물에 오리자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각기병 치료는 물론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영양소라고 확신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비타민 B1이다.

오리자닌의 발견을 알리는 신문 기사(왼쪽)와 발견자 스즈키 우메타로(오른쪽).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출신인 스즈키는 의학부와의 파벌 싸움 때문에 업적을 널리 알리지 못했다.

     

다만 스즈키의 발견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에서도 그랬다. 과학사에 기록된 비타민의 발견자는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에이크만이다. 그런데 에이크만은 이론적 예측을 했을 뿐, 1910년 처음 추출에 성공한 건 스즈키다. 이렇게 된 이유는 스즈키가 임상 실험을 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도쿄제국대학 의학부가 임상 실험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인데, 그 이유가 황당하다. 스즈키는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의학부 교수들은 각기병이 전염병이라고 했고, 그래서 (의사도 아닌) 스즈키의 연구는 엉터리라고 비난했다. 노벨생리의학상 후보로도 스즈키의 라이벌인 영국의 프레데릭 홉킨스를 추천했다. 이런 파벌 문제가 없었다면, 스즈키가 유카와보다 20년은 빨리 일본의 첫 노벨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스즈키의 실용적 연구는 RIKEN의 여러 히트 상품을 만들어냈다. 비타민 A를 개량한 리켄 비타민은 물론, 일본인들이 즐겨 마시는 전통주 사케의 인공적 합성에도 성공했다. 이 발명품들은 1930년대 RIKEN의 수익 증대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43년 스즈키가 사망한 뒤에도 그의 연구는 지속되었다. 특히 4대 소장 니시나 요시오는 스즈키가 구축한 사케 합성 시설을 이용해 페니실린을 생산했다. 이는 민간 기업으로 전환한 RIKEN의 주력 상품으로써 큰 재정적 보탬이 되었다.

     

1970년대를 거치면서 RIKEN의 생명과학 연구도 대형화했다. 특히 2000년은 기념비적인 해였다. 6년간 미국 국립보건연구원(NIH)이 주도한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무려 15년 동안 30억 달러가 투입된 이 프로젝트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생명과학 공동연구로 기록된다. 프로젝트가 워낙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이다 보니 NIH 말고도 20개에 달하는 연구기관들이 참여했다. RIKEN도 그 일부로서 전체 염기서열 분석의 5%를 수행했다. 그리고 <네이처>에만 5편의 논문을 내는 성과를 올렸다.

RIKEN 본원이 있는 와코 캠퍼스 전경(왼쪽)과 본부 연구동 건물(오른쪽). 본래 1964년 도쿄올림픽 선수촌 부지였던 땅을 로비를 통해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RIKEN은 독자적인 프로젝트들도 추진했다. 3,000종에 이르는 단백질의 구조를 규명하려는 Protein 3,000이 대표적이다. 이 과업을 위해 일본 정부는 RIKEN에 5년간 100억 엔이 넘는 예산을 추가로 투입해야 했다. 다만 그것은 투자한 만큼의 성과를 냈는데, 여기서 확인한 다양한 단백질의 기본 패턴을 신약 개발로 연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FANTOM이라고 불린 국제 컨소시엄도 구성했다. 이것은 쥐를 이용해서 그때까지 베일에 싸여 있던 RNA의 유전적 기능을 밝히려는 시도였다. RIKEN은 해외 과학자들까지 동참한 FANTOM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서, 국제적 리더십이 뛰어난 연구소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초창기만 해도 화학과 물리학의 들러리에 가까웠던 생명과학이 명실상부한 RIKEN의 대표 분야로서 위상을 확고히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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