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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Aug 04. 2024

전쟁과 연구소 해체의 위기

일본 이화학연구소 (3)

RIKEN은 어떤 의미에서는 특이한 연구소였다. 그때까지 선진국의 연구소는 두 유형으로 나뉘었다. 민간이 하는 자선사업(미국)이거나, 정부가 하는 국책사업(독일)이거나. RIKEN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개발한 기술을 팔아서 수익을 내고, 운영의 재원을 확보했다. 1930년대 일본에서 등장한 거대한 기업집단의 배경에는 이러한 RIKEN의 기술력이 있었다. 이를 ‘발명의 공업화’라고 했다. 발명의 공업화로 성장한 RIKEN 콘체른 기업들은 특히 일본의 중화학공업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 기업이 1934년과 1935년 연달아 출범한 리켄 피스톤링과 리켄 특수철강이다. RIKEN의 기술로 만든 피스톤링과 철강 제품은 성능이 아주 좋았기에 자동차, 항공기 등의 생산에 널리 쓰였다. 1940년대 일본 경제를 군수 산업이 주도하면서 이 기업들은 전성기를 맞았다. 후발 산업국가 일본이 미국, 영국 등과 세계대전을 벌일 만한 산업적 역량을 갖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업과의 긴밀한 연계는 양날의 칼이기도 했다. RIKEN에 재정적 자립을 가져다주었지만, 거꾸로 운영을 종속시키는 측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이 경향이 심해졌다. 온 국가가 전쟁을 준비하면서 산업계 연구의 절대다수도 군사기술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같은 이유에서 RIKEN의 오코치 소장도 도조 히데키 내각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육군은 RIKEN을 무기체계 고도화를 위한 하부조직처럼 활용했다. 그리고 1941년,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바로 원자폭탄 개발 의뢰가 RIKEN에 주어진 것이다.



     

동양 최초의 사이클로트론

     

오코치는 이 임무를 니시나 요시오에게 맡겼다. RIKEN 역사에서 니시나 요시오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그는 일본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추앙받는다. 오늘날 RIKEN이 운영하는 가속기 연구조직(니시나센터)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본래 도쿄제국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니시나는 앞날이 보장된 대기업 대신 물리학을 택했다. 그래서 모교 대학원에서 나가오카 한타로를 사사하고 유학을 떠났는데, 그 은사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바로 20세기 물리학의 슈퍼스타인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닐스 보어다. 특히 보어가 이끈 코펜하겐 학파는 양자역학을 현대 물리학의 핵심 패러다임으로 올려놓은 장본인들이다. 니시나 또한 그 일원이었다. 이곳에서 니시나는 스웨덴 물리학자 오스카 클라인과 함께 지금도 물리학 교과서에 실리는 클라인-니시나 공식을 만들었다. 이 성과를 인정한 보어는 자신의 이름으로 여기저기 추천서를 써줄 정도로 니시나를 신임했다.

      

덕분에 니시나는 일본으로 돌아와 41세에 RIKEN의 최연소 주임연구원이 되었다. 그의 연구실에 훗날 일본의 노벨상 1, 2호가 되는 유카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니시나의 연구실에서 닐스 보어, 폴 디랙,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의 ‘저자 직강’을 들을 수 있었다. 스승 니시나의 초청으로 세계적 석학들이 연이어 일본에 방문한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이미 1930년대에 일본은 세계 물리학의 중심지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RIKEN을 방문한 과학자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922년, 왼쪽),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폴 디랙(1929년, 오른쪽). 1920년대 일본은 이미 세계 물리학계의 일원이었다.


니시나는 이론과 실험 모두 뛰어났지만,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핵물리학이었다. 그가 RIKEN에 연구실을 연 때는 이제 막 입자가속기의 시대가 열린 무렵이었다. 1932년 미국의 어니스트 로런스는 전자기력으로 전하를 띤 입자를 가속해 서로 충돌시키는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했다. 이 장비 덕분에 과학자들은 각종 방사성 동위원소를 손쉽게 분리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특히 원자핵 연구를 급진전시켰으며, 로런스는 이 공로로 193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렇다 할 논문 없이 실험 장비를 만들어서 노벨상을 받은 건 그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사이클로트론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실생활에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 이걸로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의 재료로는 지구상 우라늄의 약 0.7%만을 차지하는 방사성 동위원소 우라늄-235나 플루토늄이 쓰인다. 이것들을 분리하려면 사이클로트론이 필요했다. 그래서 로런스도 맨해튼 계획에 투입되었고,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플루토늄을 분리해서 원자폭탄 개발에 큰 공을 세웠다. 로런스를 이어서 동양 최초로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한 이가 니시나였다. 1940년 로런스는 니시나의 소형 사이클로트론을 대형으로 개조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로런스가 일면식도 없었던 적국의 과학자를 도운 데에는, 학문적 이상보다는 과학계에서 자신의 사이클로트론의 영향력이 커지기를 바라는 현실적 이유가 한몫했다.

     

이런 배경에서 니시나가 원자폭탄 개발 책임자로 낙점되었다. 세계적 핵물리학자이자 사이클로트론까지 직접 제작한 그만큼 이 일에 어울리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니시나의 전망은 비관적이었다. 일찍부터 서양에서 유학한 그는 미국의 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참전은 미친 짓”이라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머지않아 미국에 패배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방침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니시나는 육군과 RIKEN의 명령에 따라, 100여 명의 연구원을 데리고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니까 미국에 줄리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독일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니시나 요시오가 있었던 셈이다.

1943년 니시나 요시오가 개발한 대형 사이클로트론.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니고연구의 핵심 장비였다.



     

니고연구의 전개와 실체

     

육군과 RIKEN에서는 이 비밀 프로젝트를 ‘니고연구(ニ号研究)’라고 불렀다. 한자로 풀이하면 2호, 두 번째 연구라는 뜻이다. 니시나의 앞글자인 니와 숫자 2의 발음이 같아서 중의적으로 붙인 이름이다. 니시나는 연구원들을 아홉 팀으로 나누어 RIKEN, 육군항공본부, 오사카제국대학에서 프로젝트를 하게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난관의 연속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폭탄의 재료인 우라늄-235를 충분히 분리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역량으로는 그만큼의 우라늄을 확보하지도 못했고, 거기서 0.7%에 불과한 우라늄-235를 분리‧농축하는 건 더욱 어려웠다. 이제 막 존재가 알려진 플루토늄의 생산 역시 쉽지 않았다. 니시나의 팀은 이론 검토 끝에 열확산법을 사용해 우라늄-235를 분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알려진 다른 분리 방법들도 있었지만, RIKEN 과학자들이 할 줄 아는 건 이것뿐이었다. 다만 이 방법만으로는 폭탄에 필요한 임계 규모의 우라늄-235 확보에 턱없이 부족했다. 연구팀은 1945년 2월이 되어서야 겨우 극소량만 분리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사이에 미국이 앞서나갔다. 미국은 1942년 맨해튼 계획에 착수해서 단 3년 만에 원자폭탄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우라늄-235와 플루토늄으로 만든 폭탄 2방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져 인류 역사상 최악의 지옥도를 만들어냈다. 일본 군부는 그 강한 섬광을 보고 처음에는 마그네슘 폭탄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미국이 그렇게 빨리 원자폭탄을 만들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현장 조사에서 강력한 방사선을 확인한 니시나가 원자폭탄임을 보고했다. 조사 직후 니시나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두 개의 폭탄이 전대미문의 파괴력을 갖는 원자폭탄임을 온 국민에게 설명했다. 뒤이어 전시 최고 통수기관인 대본영에서 항복이 결정되었다.

     

사실 니고연구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 투입된 자원의 규모부터 맨해튼 계획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니고연구의 수행 인력은 RIKEN 니시나 연구실의 100여 명이 전부였다. 반면 맨해튼 계획은 박사급 인력 4천여 명을 비롯해 총 10만여 명을 동원했으며, 20억 달러가 넘는 예산을 썼다. 이것은 양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독일을 탈출한 유대인 과학자를 비롯해 노벨상 수상자만 20명 넘게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20세기 물리학의 전성기를 이끈 올스타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역대급 천재들이 미국 곳곳에 실험 시설을 짓고 물량을 쏟아부었으니, 일본이 당해낼 재간은 애초에 없었다. 일례로 우라늄-235의 분리만 하더라도, 일본은 열확산법만 시도했지만, 미국에서는 전자기분리법, 기체 확산법까지 쓰였다. 거기에 플루토늄까지 생산했으니 일본으로서는 그야말로 상상 초월의 일이었다.

     

니고연구의 실체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완전한 실패로 끝난 데다 일본의 핵 개발에 대한 공론화가 금기시되다 보니, 그 전모를 밝히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니시나를 비롯한 연구진이 폭탄 개발에 소극적이었다는 의혹이다. 이 문제를 제기한 야마자키 마사카츠에 따르면, 니시나가 정부에 제출한 핵분열 연쇄반응의 계산 결과는 원자폭탄 개발에 충분치 않았다. 야마자키는 이를 근거로 니시나가 니고연구를 RIKEN의 인력과 조직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즉 폭탄 개발보다는 자신들의 사이클로트론 연구를 지속하려는 의도가 더 컸을 거라는 해석이다.

야마자키 마사카츠 도쿄공업대학 교수는 저서 『일본의 핵개발 : 1939 ~ 1955』에서 니시나 요시오가 폭탄 개발에 소극적이었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실제로 니시나는 일본의 참전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해왔으며, 연구원들이 징병 검사에서 탈락하도록 은밀히 조치하기도 했다. 니시나의 지도로 열확산 작업을 했던 다케우치 마사와 기고시 후니히코의 회고도 이와 일치한다. 이들에 의하면 처음부터 RIKEN의 과학자들은 원자폭탄 개발에 협조적이지 않았으며, 훗날 노벨상을 받는 유카와와 도모나가는 아예 연구에서 배제될 정도였다. 물론 이러한 해석들이 도의적 책임을 면하려는 사후 변명일 가능성도 있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경우에서 보듯, 당사자 증언만으로는 존재 자체가 기밀이었던 원자폭탄 개발에서의 역할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패전과 새 출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RIKEN은 그야말로 폐허가 되었다. 건물의 3분의 2가 폭격으로 소실되었고, 실험 장비의 절반 이상이 망가졌다. 소장 오코치는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여기에 연구소 명의로 2,300만 엔의 부채도 떠안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군정은 원자폭탄 개발에 깊이 관여한 RIKEN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RIKEN에 진주하자마자 사이클로트론을 해체해 도쿄만에 던져버리고, 무기개발과 연결될 수 있는 모든 연구활동을 금지했다. RIKEN의 기술로 성장한 콘체른 기업들도 모조리 해체했다. 미군정은 이 과정을 감시하기 위해서 본토에서 과학자들도 데려왔다. 이제 RIKEN의 해체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1945년 RIKEN에 진주한 미군은 가장 먼저 사이클로트론을 해체해서 도쿄만에 던져버렸다.

     

그런데 감시단의 일원이었던 MIT 교수 해리 켈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RIKEN의 해체보다는 일본의 재건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니까 전쟁에 복무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취지에서, 전후 복구에 필요한 기초연구를 해야 한다는 논지였다. 그 무렵 니시나는 어떻게든 연구소를 유지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럴 때 발표된 켈리의 전향적 견해는 니시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니시나는 켈리와 손잡고 RIKEN의 역할 전환 계획을 수립했다. 그것은 RIKEN이 축적한 과학지식을 사회 문제 해결에 사용함으로써, 평화 시대에 부합하는 연구소로 재탄생시킨다는 것으로 요약됐다. 결국 미군정도 이러한 계획에 동의했고, RIKEN은 해체를 겨우 면할 수 있었다.

     

다만 조직의 형태와 명칭은 바꿔야 했다. 1948년 재단법인 이화학연구소(RIKEN)는 주식회사 과학연구소(KAKEN)로 새 출발했다. 소장은 니시나 요시오가 맡았다. 이는 RIKEN이 정부의 비호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순수 민간 기업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다만 그 운영은 쉽지 않았다. 미군정 치하에서는 더 이상 정부 보조금을 받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민간의 기부금이나 투자를 받기도 어려웠다. 전쟁으로 온 국토가 폐허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재출범한 RIKEN은 곧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했다.

     

니시나는 고민 끝에 페니실린 개발이라는 돌파구를 찾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페니실린이 항생제로서 상용화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대량생산된 페니실린은 전 세계로 퍼지며 인류의 건강과 수명 연장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긍정적 이미지는 평화 시대의 RIKEN을 상징하는 연구로서도 적합했다. 니시나는 페니실린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페니실린으로 5개월간 벌어들인 수익만 10만 엔이 넘었다. 이는 RIKEN의 재건에 요긴한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위기를 극복하자 기회도 찾아왔다. 1949년 유카와 히데키가 일본의 첫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것이다. RIKEN 니시나 연구실 출신인 유카와는 순수 국내파로서 노벨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루었다. 패전 이후 실의에 빠져있던 일본인들은 이 수상 소식에 크게 환호했다. 덩달아 RIKEN의 위상도 올라갔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전범 취급을 받으며 폐쇄 위기에 몰렸던 연구소의 일대 반전이었다. RIKEN에는 유카와와 비슷한 수준의 연구자들이 이미 많이 있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사회와 경제는 여전히 어려웠지만, 이 과학자들로 인해 일본의 미래만큼은 밝아 보였다.

RIKEN 4대 소장 니시나 요시오. 그는 일본의 물리학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두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키워냈으며, 패전 이후 RIKEN을 해체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51년, RIKEN의 4대 소장 니시나 요시오가 사망했다. 그는 양자역학과 핵물리학에서 세계적 업적을 쌓은 천재 물리학자였다. 그의 시대에 일본의 물리학은 발전을 거듭하며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그가 키워낸 두 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그 훌륭한 예시일 것이다. 하지만 연구자 못지않게 경영자로서의 면모도 조명되어야 한다. 니시나는 패전 후 해체 직전까지 몰린 연구소를 멱살 잡고 끌어올린 난세의 리더였다. 그것은 시대의 요구를 읽어내는 통찰력과 미래를 준비하는 비전 덕분에 가능했다. 그런 훌륭한 리더가 타계했으니, 이제 RIKEN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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