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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l 20. 2024

국민과학연구소를 만들자

일본 이화학연구소 (2)

1913년 6월 도쿄 츠키지의 한 레스토랑. 12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업가, 고위 관료, 지식인 등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이었다. 일본에서 가장 바쁜 이들이 모인 이유는 누군가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강연자가 나타나자 관객들이 일제히 환호를 보냈다. 당시 세계적 명성을 떨치던 일본인 과학자이자 사업가, 다카미네 조키치였다. 1854년생으로 메이지유신 직후 영국에서 유학했던 그의 이력은 화려했다. 유학 중 습득한 기술로 도쿄에 대규모 비료회사를 창업한 뒤, 미국으로 가서 기존보다 500배 강력한 소화 효소를 발견해 다카디아스타제라는 소화제로 상품화했다. 세계 최초로 아드레날린 추출에 성공한 것도 그였다. 이렇게 히트상품을 연이어 출시한 다카미네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대부호가 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성공한 R&D 벤처사업가였던 셈이다.



     

순수기초연구의 중요성

     

이날 강연에서 다카미네는 의외의 이야기를 했다. “국민과학연구소를 만들자”라는 것이었다. 즉 국가로부터 독립되어, 당장의 수익 창출에 연연하지 않는 장기‧순수기초 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다카미네는 도쿄제국대학 공대를 졸업한 응용화학자로, 이론연구보다는 기술사업화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런 그가 자기가 성공해온 경로와는 다른 방식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제안한 것이다.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다카미네 조키치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과학자였다. 이러한 '멀티플레이어'로서의 통찰력이 RIKEN 설립의 원동력이 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화학공업의 불황이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일본은 영일동맹을 핑계로 참전했다. 열강의 다툼을 틈타 동양에서 세를 넓혀 보려는 목적이었다. 그러자 독일이 대일본 수출을 끊어버렸는데, 수입의존도가 높은 화학공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이참에 생산기술을 국산화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2021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었던 이른바 소재‧부품‧장비 사태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셈이다. 둘째는 선진국의 연구소 설립 유행이다. 20세기 초반은 파스퇴르 연구소, 카네기 연구소, 록펠러 의학연구소, 카이저 빌헬름 협회 등이 만들어졌던 시기다. 이는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는 대학으로는 과학 발전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과학자들을 연구에만 전념시키자는 계획에 따라 곳곳에서 연구소 설립 붐이 일어났다.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한 다카미네도 이 흐름을 정확히 포착했다. 원천기술과 특허로 큰돈을 번 그는 미래 산업은 단순 기계공업보다는 물리학과 화학의 기초지식이 좌우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당시 일본의 산업혁명은 성공적이었으나, 서양에 확실한 우위를 점할 만한 기초과학적 지식은 부족했다. 다카미네는 새로운 연구소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지속가능한 산업발전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일본인의 폐단은 성공을 너무 서둘러 금방 응용 쪽을 개척해 결과를 얻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이화학 연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반드시 순수 이화학의 연구 기초를 다져야 한다.”



     

과학계와 정·재계가 합심해서 만든 연구소

     

이것은 다카미네만의 비전은 아니었다. 경제관료 출신으로 재계의 큰손이었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도 동참했다. 그는 도쿄증권거래소, 제일국립은행, 히토쓰바시대학, 제국호텔 등 500개가 넘는 기업 설립에 참여한 원로였다. 다카미네와도 1886년 도쿄인조비료회사를 창업하며 인연을 맺었다. 이런 경력 때문에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며, 2024년 새로 바뀐 1만 엔 지폐의 주인공이 되었다. 연구소 설립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돈이다. 다카미네는 여기에 시부사와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다만 다카미네가 제시한 2천만 엔의 연구소 예산은 시부사와로서도 부담이었다. 결국 그는 총리인 오쿠마 시게노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쿠마는 정치인 이전에 와세다대학의 설립을 지휘한 교육행정가이기도 했다. 과학계와 재계에서 시작된 연구소 설립 논의에 정계까지 참여하게 된 것이다.

다카미네 조키치와 함께 RIKEN 설립에 앞장선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2024년부터 유통된 1만 엔 지폐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1915년 연구소 설립 계획이 확정되었다. 우선 예산은 다카미네의 안보다 절반을 줄인 1천만 엔으로 정해졌다. 그중 절반을 정부가 부담하고, 나머지는 민간에서 조달하기로 했다. 미쓰이와 미쓰비시 같은 대기업들이 50만 엔이 넘는 기부금을 내놓았다. 여기에 매년 10만 엔의 황실 하사금까지 받기로 했다. 다만 이렇게 예산 규모가 줄자 연구 범위도 축소할 필요성이 생겼다. 다카미네를 비롯한 설립 위원들은 최초의 ‘국민과학연구소’를 ‘국민화학연구소’로 바꾸는 안을 고려했다. 화학이 산업발전에 직결되기도 하고, 설립 위원들도 모두 화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리학자 나가오카 한타로가 합류하면서 변수가 생겼다. 나가오카는 일본 최초의 물리학 박사인 야마카와 겐지로의 제자로 도쿄제국대학 교수였다. 후일 유카와 히데키를 노벨물리학상 후보로 추천할 정도로 세계적 명성을 인정받는 석학이었다. 이런 나가오카가 들어오기로 했으니 물리학부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연구소의 이름은 ‘이화학연구소’로 최종 결정되었고, 1917년 제국의회가 설립을 의결했다. 1대 소장은 일본에 근대 수학을 처음 도입한 수학자 기쿠치 다이로쿠가 맡았다.

     

다만 초창기 RIKEN의 운영은 여러 악재가 겹쳐서 불안정했다. 일단 정부가 약속한 예산을 온전히 받지 못해 4년 동안 건물도 없이 지내야 했다. 그래서 RIKEN의 과학자들은 겸직 중인 대학에 각자의 연구실을 꾸려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21년 화학 연구동이 지어졌지만, 계속되는 재정난으로 물리 연구동은 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물리학부장 나가오카는 연구에서 중요한 건 연구자이지 시설이 아니라며 별 신경을 쓰지 않기는 했다. 설상가상으로 1대 소장 기쿠치가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뒤이어 도쿄 지하철을 설계한 토목공학자 후루이치 코이가 2대 소장이 되었지만, 그 또한 지병으로 4년밖에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물리학부와 화학부 간의 반목이었다. 두 부서는 연구소 운영의 주도권을 두고 사사건건 부딪쳤다. RIKEN의 초대 화학부장은 이케다 기쿠나에로, 오늘날 인공조미료로 널리 쓰이는 MSG(글루탐산나트륨)의 개발자이다. 이케다는 다시마에서 힌트를 얻은 감칠맛을 상품화해서 어마어마한 부를 쌓았고 그 업적으로 화학부장을 맡았다. 이렇듯 물리학부장과 화학부장이 일본을 대표하는 석학들이다 보니, 두 부서의 기싸움이 곧잘 극단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 2대 소장들마저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으니 연구소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도쿄 고마고메에 있던 RIKEN의 첫 건물. 초창기 재정난으로 인해 건물을 짓는데만 8년이 걸렸다.



     

젊은 소장의 과감한 개혁

     

결국 RIKEN은 설립 4년 만인 1921년에 세 번째 소장을 맞이했다. 도쿄제국대학 물리학 교수였던 오코치 마사토시로, 취임 당시 42세에 불과했다. 그는 비록 젊었지만 연구소를 이끌 장기 비전만큼은 명확했다. 오코치는 부임 직후 RIKEN의 문제점을 면밀히 파악하고, 두 가지 방향에서 구조개혁을 추진했다.

     

첫째로 주임연구원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헤쳐 모여’ 전략이었다. 물리학부와 화학부 간 힘겨루기가 갈수록 심해지자, 두 거대 부서를 해체하여 14개의 수평적 주임연구원실로 쪼갠 것이다. 주임연구원은 RIKEN이 수행하는 각 프로젝트의 책임자이자 최상위 등급 연구자이다. 이 제도는 소장이 주임연구원의 권위와 리더십을 인정하고, 그에게 연구의 모든 권한을 일임하는 형태를 취했다. 주임연구원은 이러한 자율권을 기반으로 독창적 연구를 기획‧이행하고, 휘하에 젊은 인재들을 키워냈다. 후일 RIKEN의 명성을 높이는 과학자들 – 니시나 요시오, 유카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치로 – 이 모두 주임연구원 출신이다. 이는 장인에 대한 존중과 도제식 교육이 보편화된 일본의 전통문화와도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주임연구원 제도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RIKEN의 근간으로서 유지되고 있다.

     

둘째로 기업과 적극적으로 연계하였다. 앞서 언급했듯 초창기 RIKEN의 재정난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양대 수입원인 정부 보조금과 민간 기부금이 늘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이에 오코치는 RIKEN이 개발한 기술을 기업에 팔아서 운영자금을 확보한다는 자구책을 마련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RIKEN 기술의 사용권을 이전받은 기업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기업집단을 ‘RIKEN 콘체른’이라고 했다. 그 업종은 실로 다양했다. 일본 전통주 사케, 자동차에 들어가는 피스톤 링, 알루미늄의 부식을 막는 알루마이트 처리, 먹는 비타민 등이 RIKEN 연구진에 의해 상품화되었다. 1935년 8개였던 RIKEN 콘체른 기업은 1939년 39개로 급증했으며, RIKEN은 예산의 75%를 이러한 기술료 수입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요컨대 연구소가 자생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확립한 것이라 할만했다.

1930년대 RIKEN의 기술로 개발한 비타민 건강식품. 이 리켄 비타민은 아직까지 운영 중이다.

     

이로써 RIKEN은 최초 설정했던 순수기초연구소에 산업연구소의 정체성을 더하게 되었다. 일본은 1930~40년대 RIKEN의 이러한 R&D 기술사업화, 벤처 창업 모델을 통해 산업기술 역량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이는 현대 일본의 산업경쟁력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복사기‧카메라 제조업체 리코(RICOH), 건강식품 업체 리켄 비타민(Riken Vitamin)도 RIKEN 콘체른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의 물리학자였던 보웬 디즈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비록 미국의 비슷한 연구소들이 더 오래 존재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약 30년 동안 RIKEN이 이룬 성과에 비견할만한 곳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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