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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Sep 07. 2024

국가 과학기술을 지휘하는 사령탑

일본 이화학연구소 (5)

세상에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정부 산하로 재편입된 RIKEN도 마찬가지였다. 민간기업일 때는 수익만 내면 됐다. 그러나 정부의 돈, 즉 세금을 지원받는 연구소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거기다 RIKEN은 올림픽에 쓰려했던 와코시의 넓은 부지까지 얻었다. 그만큼 국가와 사회에 책임을 다해야 했다. 나가오카 소장은 직속 자문위원회를 꾸려서 그 실행 방안을 강구하게 했다.

     

결론은 이러했다.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형 프로젝트에 연구를 집중한다.” 3대 소장 오코치 마사토시 이후 RIKEN의 중추는 주임연구원들이었다. 주임연구원은 장인의 권위를 인정받았고, 정년 퇴임할 때까지 연구실을 운영했다. 이 방식은 호기심과 자율성에 기초한 장기 연구에 강점이 있었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자원을 집중시켜서 목표를 달성하는 연구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주임연구실은 규모가 작고, 분산적이며, 고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규모이면서도 유연한, 새로운 조직이 필요했다.



      

전국적 조직 확대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RIKEN은 1986년 프런티어 연구시스템을 도입했다. 그 형태는 이렇다. 우선 RIKEN이 해결에 앞장서야 할, 국가적 문제들을 선별한다. 그리고 각 주제에 대응하는 연구센터를 구성하고 연구원과 시설들을 투입한다. 다만 목표를 달성하면 조직도 해소한다. 따라서 프런티어 연구원들은 정년을 보장하지 않았다. 매년 계약을 갱신하되, 프로젝트가 끝나면 자동 종료되었다. 이러한 기획에 따라 1997년 뇌과학연구센터를 필두로, 유전자연구센터, 식물학연구센터, 발달생물학연구센터 등이 생겼다. 기존의 주임연구실과는 철학과 거버넌스를 완전히 달리하는 것이었다.

     

RIKEN의 확대는 연구 분야에만 그치지 않았다. 일본의 각 지역에도 분원을 설치했다. 이는 독일 MPG를 벤치마킹한 것이기도 했다. 1960년 나가오카 소장은 MPG 8대 회장이자 아버지 나가오카 한타로의 친구였던 오토 한과 회동했다. 이 만남에서 RIKEN의 비전에 대한 시사점을 얻었는데, 전국적 조직 확대가 그중 하나였다. 당시 MPG도 독일 곳곳에 연구소들을 확장하던 중이었다. 적어도 국가 연구소라면, 전국의 연구자들이 필요에 따라 공동연구를 수행하고 시설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했다. RIKEN이 지역에 흩어져 있는 대학, 기업 등을 서로 이어주는 연구 거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공적 목적을 달성코자 프런티어 연구시스템과 연계한 분원들이 각 지역에 들어섰다.

     

특히 대학이나 기업에서 운영하기 힘든 대형 실험시설에 큰 투자가 이루어졌다. 마침 일본 경제도 역대 최고의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일본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떠오른 1980년대에는 R&D에도 엄청난 돈이 쏟아졌다. RIKEN도 그 혜택을 톡톡히 보았다. RIKEN의 첫 분원은 1984년 츠쿠바에 만든 생물자원연구센터다. 츠쿠바는 우리나라의 대덕연구단지처럼 R&D에 특화된 연구‧학원도시다. 그중에서도 RIKEN 생물자원연구센터는 당시 막 도입되던 유전자 재조합 기술의 안전성을 평가하고자 설립되었다. 즉 생명을 다루는 실험에 필수인 생물자원을 수집하여, 국내외 대학, 연구소, 기업 등에 매년 15,000개 이상 제공했다. 1990~2000년대 RIKEN의 생명과학이 급성장한 중요한 이유다. 이 밖에도 하리마의 방사광 시설, 요코하마의 핵자기공명 시설, 고베의 슈퍼컴퓨터 등도 들어섰다. 첨단 실험이 이루어지는 이 복잡하면서도 큰 규모의 시설들을 다루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구축 비용이 몇천억 원을 훌쩍 넘는 것은 물론, 운영에도 상당한 노하우가 필요하다. RIKEN은 이 시설들이 최고의 실험 효율을 내도록 관리하고, 다양한 주체들과 공동연구를 조직하는 임무도 맡게 되었다. 그 또한 국가 연구소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RIKEN 츠쿠바 생명자원연구센터(왼쪽 위)와 하리마 방사광연구센터(오른쪽 위). 현재 RIKEN은 전국적 거점을 가진 국가 연구소로 성장했다(아래).

     

113번 원소의 발견

     

2003년 RIKEN은 조직의 명운을 건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바로 주기율표에 없는,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원소는 특성에 따라 번호를 부여받아 주기율표에 나열된다. 2003년에는 총 112개 원소가 올라 있었다. 그중 자연계에서 발견된 원소는 1번 수소부터 92번 우라늄까지다. 93번부터는 인공적인 합성을 통해 만들어졌다. 입자가속기 내에서 원소들을 빛의 속도로 충돌시키면, 이제껏 확인되지 않은 원소들이 생성된다. 이렇게 발견한 새 원소들에는 지명을 붙여서 기념하기도 한다. 95번 아메리슘(아메리카), 97번 버클륨(버클리), 98번 캘리포늄(캘리포니아) 등이 그렇다.

      

RIKEN도 이런 원소들의 ‘이름’에 주목했다. 주기율표의 112개 원소는 죄다 서양에서 발견 또는 합성되었다. 당연히 이름도 서양식이었다. RIKEN의 목표는 113번째 원소를 발견해서 일본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과학적 호기심뿐만 아니라, ‘국뽕’의 동기도 작용한 프로젝트였다. 이런 불순한(?) 이유로 과학연구를 시작해도 되냐고? 어차피 현대의 과학과 국가는 서로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다. 게다가 일본은 이미 국격의 척도인 노벨상에서 괄목할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러니 과학의 다른 영역에서 신기원에 도전해보자는 발상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초기에 이 프로젝트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모리타 고스케 연구팀은 아연 원자핵을 비스무트 원자핵에 충돌시켰고, 원자 1개가 0.000344초 동안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걸 확인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다만 원소 명명권을 가진 국제순수‧응용화학연합(IUPAC)이 실험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원소의 붕괴 과정이 이론적 예측과 어긋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연구팀으로서는 추가 검증이 필요했다.


그런데 두 번이나 성공했던 원소 합성이 그때부터 계속 실패했다. 세 번째 합성에 성공한 것은 첫 실험으로부터 9년 뒤인 2012년이다. 연구팀은 이 기간 무려 400조 번이나 똑같은 실험을 했다. 그만큼 도전한 뒤에야 겨우 재검증을 받을만한 실험 결과를 확보할 수 있었다. IUPAC은 3년여의 검증과 타당성 검토를 거친 끝에, 2016년 6월 113번 원소를 승인했다. 원래 113번 원소의 이름으로는 RIKEN을 상징하는 리케늄, 니시나 요시오의 이름을 딴 니시나늄도 제안되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일본의 국호(니혼)를 따서 니호늄으로 결정되었다.

      

RIKEN으로서는 100주년을 앞두고 국가 연구소의 명성에 걸맞는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실제로 다음 해 열린 100주년 행사에 아키히토 천황 부부를 비롯한 황실과 내각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도 니호늄은 지난 세기 RIKEN을 대표하는 발견으로 조명되었다. 지금도 와코 본원의 정문 앞에는 113번 니호늄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있다.

113번 원소 니호늄을 발견한 모리타 고스케 연구팀(왼쪽)과 와코시 본원 앞의 기념 조형물(오른쪽).



     

새로운 종합연구소를 향하여

     

2016년 일본 의회는 RIKEN을 산업기술총합연구소(AIST), 국립물질재료연구소(NIMS)와 함께 국립연구개발법인으로 지정하는 법안을 의결했다. 이는 RIKEN이 국가 연구소로서 역할과 책임을 강화해온 역사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국립연구개발법인의 지정 목표는 “국가 전략과 연계해 세계 최고의 성과를 내는 연구소를 만든다.”라는 데 있다. 이로써 정부는 3개 연구소에 더 많은 재정 지원을 할 근거를 마련했다. 특히 세계적인 연구자의 유치에 있어서 공공기관의 제약을 깨고 파격적인 예산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에 화답하듯, RIKEN도 2018년 중장기 발전계획을 통해 새로운 비전을 밝혔다. 이 계획은 향후 집중할 9개 연구 주제와 그 실험 인프라의 운영 방안을 제시했다. 9개 주제에는 RIKEN이 연구해온 가속기, 생명, 물질은 물론, 인공지능과 머신러닝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분야도 포함된다. 특히 고베의 슈퍼컴퓨터 시설을 활용한 연구는 RIKEN의 핵심 미래 먹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전통적인 기초과학을 벗어나는 첨단 공학 분야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일본 정부도 RIKEN의 계획과 연계하여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터 분야에 전략적 투자를 늘려오고 있다.

RIKEN의 주력으로 떠오른 고베의 슈퍼컴퓨터연구센터. 향후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팅 분야에 대한 전폭적 지원이 기대된다.

      

100년이 넘는 RIKEN의 역사를 추적하면 두 가지 흐름이 눈에 띈다. 첫째는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도 국가 연구소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초창기 RIKEN은 산업기술을 사업화하여 예산을 충당하고 연구소로서 자립할 수 있었다. 다만 군수산업이 시장을 독점한 전시에는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하는 역설을 겪어야 했다. 이 때문에 RIKEN은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했으나, 그간 사회에 환원한 기술 덕분에 폐쇄만큼은 면하는 또 한 번의 역설을 경험했다. 이후 RIKEN은 일본의 고도성장과 함께 국가 연구소로 전환되었다. 이는 국가 전략 R&D를 중시하는 일본의 과학기술정책을 반영한 결과인데, 앞으로도 RIKEN의 지도적 역할은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과학의 프런티어로 연구소를 확장해왔다는 점이다. RIKEN은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기초 중의 기초학문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현대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생명과학, 컴퓨터공학, 인공지능 등 핫하고 융합적인 분야도 꾸준히 흡수했다. 이것은 RIKEN이 기초과학에 특화된 연구소이지만은 않음을, 국가 기관답지 않게 변화에 능동적인 조직임을 함의한다.

      

이제 과학은 기초와 응용‧개발의 경계가 무색해지는 거대한 신천지로 나아가고 있다. 일례로 수학은 가장 역사가 오래된 전통 학문이지만, 향후 인공지능 개발을 주도할 분야로 그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RIKEN은 세계의 연구소 중에서도 이런 흐름을 가장 빨리 따라잡고 있는 곳이다. 그런 만큼 100년 연구소 RIKEN이 갖춰갈 미래 모습이 궁금해진다. 다만 어떤 분야와 주제를 다루든, RIKEN이 지향해온 국가의 과학기술을 지휘하는 사령탑 역할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RIKEN 100주년 연구성과 모음집(왼쪽)과 기념 사진전(오른쪽). 미래의 과학 세대를 키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렇게 연구소를 오래도록 운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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