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대웅 Oct 03. 2024

조반유리(造反有理)

지적질에 대처하는 작가의 자세

살면서 칭찬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뭐 하나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 없었으니. 그래서 어릴 때 들은 칭찬은 대부분 “착하다”였다(…). 이게 대학에 가서는 “성실하다”로 바뀌었다. 이건 그래도 이유가 있었다. 나는 운동권의 필수 업무인 ‘아침 선전전’을 거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 선전전이란, 8시쯤 정문으로 나와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총학생회의 유인물을 나눠주고 구호도 외치는 일을 말한다. 밤에 술 퍼먹느라 바쁜 운동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새벽까지 마셔도 7시에는 눈이 떠져서 이것만큼은 잘했다.

     

이렇듯 칭찬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었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칭찬이 있다. 몇 년 전 직장 선배가 해준 말이다. 꼰대 성향이 다분해서 좋아하는 선배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양반이 뜻밖에도 이런 칭찬을 해줬다. 

    

“너는 기분 나쁠 만한 말인데도 합리적이면 받아들일 줄 알아서 좋아” 

    

생각해보니 그랬다. 과학적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나는 일할 때 감정을 결부시키지 않는다(물론 T발 C냐는 욕도 자주 듣는다). 그래서 인신공격이 아닌 이상, 나에 대한 지적질에도 무덤덤한 편이다. 만약 그게 내 업무에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 냉큼 수용하기도 한다. 이게 내가 대인배라서가 아니다. 뭐든 좋은 건 취하고 보겠다는 이해타산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방법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인가. 결과적으로 나한테 좋으면 그만이지.

     

이런 성향이 작가를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듯하다. 글을 잘 쓰려면, 내 글에 대한 비판과 지적에도 열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피드백을 반영해서 꾸준히 고쳐 써야 글이 좋아진다. 물론 모든 지적이 100% 유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 1%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걸 끄집어내서 내 문장으로 흡수해야 한다. 지적질이 기분 나쁘다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자기만 손해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에게는 “트집 잡힌 부분은 무엇이 어찌 됐건 고친다”라는 원칙이 있다. 비판에 수긍할 수 없어도, 어쨌든 지적받은 부분이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쓴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원고를 재차 읽어보면 대부분은 이전보다 좋아진다는 이유에서다. 대표작인 『해변의 카프카』의 경우 초고를 6개월 만에 완성했지만, 퇴고는 1년이 걸렸다고 한다. 업계 1황 하루키조차 그러고 있다.

     

돌이켜 보면 나도 『최소한의 과학공부』를 쓸 때 그랬다. 야심차게 쓴 첫 원고에 출판사가 보인 반응은 “응 아니야~ 다시 써”였다. 지적 사항이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아무튼 요는 너무 딱딱하고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 번을 다시 썼는데, 피드백은 늘 비슷했다. 까임이 반복되자 나도 이해가 안 되기 시작했다. “아니 이 정도면 됐지, 어떻게 더 쉽게 쓰라는 거야?”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쌩무명작가였고, 출판사는 베스트셀러를 몇 권이나 낸 곳이었으니까. 이걸 부정할 근거는 없었다. 결국 출판사가 OK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 뭐가 됐든 나보다는 출판사가 맞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런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야 『최소한의 과학공부』가 완성될 수 있었다. 한 가지 웃긴 점은, 그때는 수긍할 수 없었지만 지금 보니 출판사 지적이 다 맞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왜 더 쉽게 쓰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하고 있다. 책을 한 권 완성해보니 나도 철이 든 모양이다.

     

중국 문화대혁명 때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말이 있었다. “모든 반란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라는 뜻이다. 1960년대 초 대약진운동 실패로 2선 후퇴했던 마오쩌둥이 권력을 되찾고자 홍위병을 부추기면서 쓴 말이다. 어린 홍위병들은 마오쩌둥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당권파를 무차별 공격했고, 이것이 광기의 숙청과 파괴로 이어진 것이 문화대혁명이다. 오늘날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이자 중국을 몇십 년은 후퇴시킨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이런 부정적 평가와 별개로, 조반유리는 좌파의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용어로 후대에도 자주 쓰였다. 고백하자면 내가 다니던 대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안이 있든 없든,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보는 운동권에게 이것만큼 유용한 구호도 없었다(나도 결의문 쓸 때 자주 써먹었다).

     

그러나 작가에게 조반유리는 긍정적으로 쓰일 수 있다. “글에 대한 모든 지적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라는 의미에서다. 아무리 잘 쓰는 작가도 자신의 글에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따라서 누군가는 작가의 사각지대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알아보고 지적해주어야 한다. 이때 지적하는 의견이 완결성까지 갖춰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뭔가 이상하다는, 추상적인 의심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걸 구체화해서 더 나은 문장으로 고쳐나가는 건 작가의 몫이다. 다만 그러려면 지적을 수용하는 자세부터 갖춰야 한다. 하루키가 그러하듯, 지적을 받으면 타당성을 따지기기보다는 어떻게든 고친다는 태도가 중요하다.

      

오래전 유행했던 조반유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문화대혁명기의 중국에는 철저히 실패한 정치 슬로건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에게라면 다르다. 그것은 마땅히 체화해야할 작가정신일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