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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Feb 13. 2021

미국 자유주의 정치의 환상적 극화

애런 소킨(1999~2006), ‘웨스트윙(West Wing)’

미드 ‘웨스트윙’은 내 인생 최고의 영상 콘텐츠다. 이제껏 접한 모든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을 다 포함해서 그렇다. 이 작품을 지금까지 모두 몇 번을 봤는지 모르겠다. 결말을 다 알지만 볼 때마다 탄탄한 스토리, 정교한 연출, 개성 강한 캐릭터에 빠져든다. 이전에 모르고 지나쳤던 복선과 미장센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크다. 심지어 DVD 플레이어가 없는데도 전 시즌 박스 세트를 구매했다.(말 그대로 소장용이다. DVD 세트를 사놓고 왓챠로 본다;;)

웨스트윙 전 시즌 박스 세트. 나름 30만 원 가까운 거금을 주고 구입했는데, DVD 플레이어가 없어서 고이 소장만 하고 있다.

웨스트윙은 미국 백악관을 다루는 정치 드라마다. 가상의 민주당 대통령 제드 바틀렛이 서사의 중심이 된다. 바틀렛 대통령과 참모들(비서실장 및 부실장, 홍보수석, 대변인, 개인비서 등)이 국가를 운영하면서 마주하는 문제들이 각 에피소드들을 구성한다. 이 에피소드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정부의 철학과 비전이 드러난다. 비록 픽션이지만, 이들이 다루는 정치의 문제는 매우 현실적이고 그 범위도 넓다.




정치 드라마의 레전설


웨스트윙은 평범한 드라마가 아니다. 조금 과장한다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수준이다. 이 세계는 총 7개 시즌과 156편 에피소드를 통해 구현된다. 주무대인 웨스트윙이 미국을 넘어 실제 세계를 경영하는 곳이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현대 미국이 고민하는 대부분 이슈들이 등장한다. 정치와 행정은 물론, 사법, 외교, 총기, 노동, 테러, 여성, 인권, 마약, 심지어 전쟁까지.


그런데도 수박 겉핥기로 흐르지 않는다. 에피소드별로 다루는 이슈들의 밀도가 매우 높다. 주제를 관통하는 다양한 관점들은 물론, 나름의 해법도 제시한다. 지루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수준 높은 정치 담론을 다루면서도 박진감과 재미를 절묘하게 배합시킨다. 웨스트윙이 역대 정치 드라마 원탑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비슷한 정치물인 ‘하우스 오브 카드’와 ‘지정생존자’도 나름의 개성과 재미가 있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진지한 탐구라는 점에서는 웨스트윙에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답답하고 짜증만 나게 하는 것이 정치인데, 그걸 흥미진진하게 극화해서 심지어 희망도 주는 희한한 드라마다.

웨스트윙은 정치라는 현실의 시궁창을 이상의 영역에서 재창조한다.




이상적 메시지, 현실적 작법


웨스트윙의 정치적 메시지는 이상적이다. 대부분 등장인물들이 정치를 신념의 공적 실현 방법으로 여기기에 그렇다. 주인공인 대통령과 참모들은 물론이고, 반대편의 야당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정치 드라마라고 하면 연상되는 권모술수, 공작, 뒷거래 같은 음험한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토론과 논쟁이다. 웨스트윙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면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며 상대방을 설득하는 모습일 것이다.

웨스트윙은 권모술수와 음모보다는, 토론과 논쟁에 기초한 이상적 정치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상적 메시지를 실제로 구현하는 방식은 매우 현실적이다. 정치적 의사결정을 구성하는 제도와 절차들을 거의 완벽히 영상으로 옮겨 담았다. 백악관 참모진 회의는 물론, 당정협의, 기자회견, 인사검증, 법안발의, 예산조정, 선거 등 정치활동의 제 요소들이 등장한다. 그 리얼리티는 드라마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특히 시청자를 현실정치의 스펙터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 같은 연출이 압권이다. 


바틀렛 행정부의 차기 대선 과정을 다룬 시즌 6, 7은 이러한 리얼리즘의 백미이다. 후보 출마, 예비선거(프라이머리 및 코커스), 전당대회, 본선에 이르는 미국 대선의 전 과정이 세밀하게 묘사된다. 미국 대선은 복잡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두 시즌만 봐도 대략 어떤 원리와 절차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양당제 미국의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치철학도 파악할 수 있다. 

시즌 7 에피소드 7 'The Debate'의 한 장면. 오른쪽 하단에 Live 표시는 폼이 아니다. 진짜로 생방송으로 두 후보의 대선 토론 장면을 연출했다.




웨스트윙의 주인공, 자유주의 정치


이 드라마의 주인공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여러 인물들이 각자의 스토리를 갖고 등장하는 군상극의 성격을 갖고 있기에 그렇다. 물론 비중은 바틀렛 대통령과 참모진이 가장 높다. 좀 더 넓게 보면,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정치하는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을 ‘자유주의 정치’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특정인이라기보다는 이념이라는 것이다. 영어의 ‘liberal’로 표현되는 자유주의는 현실정치에서는 미국 민주당의 이념으로, 미국식 진보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실제로 드라마에서 liberal은 자유주의와 진보주의의 두 가지로 번역된다). 유럽에서 진보 포지션은 사회민주당, 노동당 등의 좌파들이 점한다. 그런데 미국에는 이런 좌파 정당이 없다. 세이무어 마틴 립셋이 정치학의 고전 「미국 예외주의」에서 설파했듯, 미국의 독특한 사회‧문화적 토양에서는 사회주의가 정치이념으로서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립셋은 미국인 고유의 가치체계를 자유, 평등, 개인주의, 포퓰리즘, 자유방임주의가 구성한다고 본다. 이러한 성향은 사회복지 및 중앙집권과 친화력이 있는 사회주의와는 양립하기 어렵다.

미국 정치학의 대가 세이무어 마틴 립셋은 이 책에서 좌파정당이 존재할 수 없는 미국 정치문화의 예외성에 대해 설파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진보 포지션을 좌파가 아닌 자유주의자들이 점유했다. 다만 이 자유주의는 시장이 절대선이므로 국가 역할은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자유방임주의, 시장만능주의는 아니다. 국가가 평등, 복지, 노동, 인권 등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본다. 1930년대 대공황을 민주당 정권이 수습하면서 이러한 진보적 자유주의 이념을 정립했다. 그전까지 민주당은 딱히 진보적인 정당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정치 영화 ‘링컨’에서도 나오지만, 오히려 민주당은 지주들을 대변하는 기득권 정당으로서 노예제 폐지에 반대한 흑역사를 갖고 있다.

스필버그의 정치 영화 '링컨'의 한 장면. 여기서 민주당은 노예제 폐지를 위한 헌법수정(안)에 격렬히 반대하는 반동적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기점으로 이념이 바뀐다. 루스벨트는 뉴딜을 통해 노동권 증진, 사회복지 확충, 반독점, 소득세 인상 등의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미국 전통의 시장만능주의, 주 자치주의와는 전혀 다른 노선이다. 이로써 민주당은 노동자, 지식인, 소수인종, 여성 등 진보성향 유권자들과 함께 ‘뉴딜연합’이라는 지지기반을 확보했다. 루스벨트의 후임들인 해리 트루먼,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등도 이같은 노선을 이어나갔다. 최근에는 조지프 스티글리츠, 폴 크루그먼, 로버트 라이시 같은 학자들이 자유주의의 대표적 이론가로 꼽힌다.

뉴딜연합(노동자와 빈민층의 민주당 지지)을 상징하는 포스터.

웨스트윙에서 등장하는 대통령과 참모진도 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다. 양당제라는 미국의 정치구조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 입장(버니 샌더스 수준은 아니지만)을 대변한다. 드라마상에서 바틀렛 행정부의 정책 기조도 연방정부 역할 확대, 부유층 증세, 사회복지 강화, 소수자 권리 보장, 총기 규제 강화, 국제사회 중재 역할 중시 등으로 요약된다. 그래서 국가 역할 최소화를 총론적 기조로 삼는 공화당과는 이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민주당 이념으로서 자유주의가 전하는 메시지는 드라마 전 시즌을 통해 드러난다. 특히 시즌 7의 에피소드 7 ‘The Debate’에서, 대선 토론 중 민주당 후보 매튜 산토스의 다음 발언에 잘 요약되어 있다.


“왜 공화당은 자유주의자들을 그렇게 싫어할까요? 제가 알려드리죠. 자유주의자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었습니다. 자유주의자는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었습니다. 자유주의자는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어 수백만의 노인들을 기아에서 구해냈습니다. 인종차별제도를 철폐하고 자유주의자들이 민권법과 투표권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의료보험제도를 만들었고 대기오염방지법과 수질오염방지법을 통과시켰죠. 보수주의자들은 어땠나요? 그 모든 안건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니 자유주의란 말을 더럽고 추한 것인 듯, 부끄럽고 한심한 것인 듯 제 발 앞에 던져버리신다면, 저는 그걸 주워 자랑스럽게 가슴에 달겠습니다.”
역대 민주당 대통령들이 추진해온 대표적 사회복지정책.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민주당은 진보적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웨스트윙 방영 시기의 정치적 상황


이렇게 대놓고 민주당을 홍보했지만, 1999~2006년 방영 당시 실제 민주당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때는 빌 클린턴 대통령 말기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중반부에 해당한다. 이 기간 동안 민주당은 행정부는 물론 상‧하원에서도 만년 야당에 머물렀다. 공화당에 두 번의 대선과 세 번의 상‧하원 선거를 연달아 내줬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2000년 대선부터 묘하게 일이 꼬이면서 암흑기로 돌입했다. 직전 클린턴 정권은 역대 최고의 호황을 이끄는 등 인기가 나쁘지 않았다(클린턴이 지퍼게이트로 개망신을 당했지만, 지지는 탄탄했다). 대선에 나선 부통령 앨 고어도 IT 산업 중심의 신경제를 이끌면서 인기가 높았다. 자연히 민주당의 승리 전망이 우세했고, 실제 득표율도 고어가 더 높았다. 그런데 선거인단에서 5석 차이로 부시에게 밀려 패배한 것이다(이런 경우는 2016년 대선에서도 반복된다). 특히 세 번째로 선거인단이 많은 플로리다(29석)에서 불과 500여 표 차이밖에 안 나는데 그 이상의 엄청난 무효표가 나왔다. 당연히 재검표가 필요했는데, 연방 대법원 판결로 재검표가 무산됐고 고어도 그대로 승복했다.

2000년 대선 민주당의 앨 고어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민주당의 우세가 예견됐고 실제 득표도 고어가 더 많이 했지만, 선거인단에서 간발의 차로 앞서면서 부시가 승리했다.

이듬해에는 9.11. 테러가 터지면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가 만연했다. 테러 위협은 부시 정권의 애국주의를 더욱 강화했다. 국익을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네오콘들이 주류를 차지하였다. 실제로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고, 테러 방지를 이유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안들이 줄줄이 통과한 것이 이 무렵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의 자유주의 정책은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대선이든 의회 선거든, 선거만 하면 공화당에 발리던 시절이었다.


웨스트윙의 방영 시기는 이 민주당 암흑기와 일치한다. 암흑기를 보내던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이 드라마는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바라는 이상적 정치를 시궁창 현실에서 벗어나 마음껏 감상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반면 공화당 지지자들은 대놓고 민주당 만세를 외치는 웨스트윙을 ‘레프트윙(Left Wing)’이라고 깠다. 종영 시점도 꽤 절묘하다. 2006년 부시 2기 정권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해 상‧하원을 탈환하자, 웨스트윙도 마치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막을 내렸다.


이 과정이 또 드라마틱했다. 드라마상에서 바틀렛 후임으로 히스패닉 매튜 산토스가 당선되는데, 그게 당시 버락 오바마를 모델로 했기 때문이다. 연방 상원의원에 입후보한 오바마를 전국에 알린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지지연설을 보고 제작진이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웨스트윙은 미국의 첫 유색인종 출신 대통령과 함께 민주당의 부활을 예견하며 막을 내린 것이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존 케리 후보 지지연설을 하는 버락 오바마. 그는 이 한 번의 연설로 단숨에 전국적 지명도를 얻었다.




주요 캐릭터


7 시즌이나 되는 드라마인 만큼 정말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다음의 4명이다.

제드 바틀렛(대통령). 드라마 세계관에서 미국의 43대 대통령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원래 신부가 되려고 했었다. 가톨릭 계열의 세계적 명문대인 노트르담대학교에 간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대학에서 미래의 영부인을 만나 진로를 바꿨다고 한다(...). 이후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다트머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노벨경제학상까지 수상한다. 진보적 사상과 이론을 이때 확고히 한 듯하다(사회주의자 조지 버나드 쇼가 설립에 참여한 LSE는 진보적 학풍으로 유명하다). 


에피소드 중에 노벨경제학상 공동 수상자인 일본인 학자를 백악관으로 초청하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이 일본인 학자는 바틀렛과는 정반대로 (바틀렛 말로는 밀턴 프리드먼도 온건해 보일 정도의) 시장만능주의자로, 바틀렛에게 드디어 복지국가의 대통령 꿈을 이루었냐고 빈정거린다. 이에 발끈한 바틀렛이 복지정책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보수적 경제학을 까는 장면이 재미있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대통령의 요건을 고루 다 갖춘 먼치킨(사실 이 드라마 등장인물이 다 그렇다)이기도 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역대 민주당 대통령의 특징들을 조합하여 만든 캐릭터 같다. 우드로 윌슨(박사학위, 교수 출신), 프랭클린 루스벨트(진보적 사회경제정책), 존 F 케네디(가톨릭 신자, LSE 수학), 빌 클린턴(달변, 강경한 대외정책) 등이 합쳐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하여 이론적 깊이, 정치적 경륜, 인간미 등에서 모두 만렙을 찍는, 현실에서 과연 볼 수 있을까 싶은 이상적 대통령이 되었다.


샘 시본(홍보부수석, 하원의원 후보, 비서실 부실장). 초반부에 가장 많은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그러나 중도하차했기 때문에 아까운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상주의 메시지가 강하게 흐르는 웨스트윙에서도 가장 이상주의적인 인물이다. 프린스턴대학교 학부와 듀크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엘리트 변호사 출신이다. 이후 대형 로펌에서 일하다가 존경할만한 정치인을 위해 함께 일하자는 조쉬 라이먼의 제안에 바로 로펌을 그만두고 따라나섰다. 잘 생긴 데다 능력도 뛰어나지만, 의외로 허당에 바람둥이 기질도 있는 개그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러나 본업인 연설문 작가로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압도적 문재를 보여준다. 웨스트윙에서 등장하는 많은 명연설들이 이 사람의 손에서 탄생했다. 성경, 문학, 역사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힘차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을 표현해낸다. 드라마에서 그가 쓴 연설문들을 따로 모아서 읽고 싶을 정도다.


조쉬 라이먼(비서실 부실장, 매튜 산토스 선대위원장, 비서실장). 드라마 후반부에 주인공급 역할을 한다. 원래 바틀렛의 정적이었던 존 호인스 상원의원의 참모였으나, 바틀렛의 연설에 감화되어 이적한다. 바틀렛 행정부에서는 비서실 부실장으로서 의회와 협업하는 정무 업무를 담당했다. 바틀렛의 두 번째 임기 말기에는 무명에 가까웠던 3선 하원의원 매튜 산토스를 대선에 출마시켜 끝내 당선시키는 대파란을 일으킨다. 그러니까 선거 컨설턴트로서도 최고 수준의 전문가인 셈이다. 


웨스트윙 참모진 대부분이 그렇듯, 이 사람도 하버드대학교 학부와 예일대학교 로스쿨이라는 명문학교 출신이다. 이 드라마가 레프트윙이라고 욕먹지만, 엘리트주의로 떡칠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딱히 좌파적인 것 같지도 않다. 그만큼 명문대 출신 전문직 엘리트들이 정치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매우 낭만적으로 조명한다.


아놀드 비닉(상원의원, 대통령 후보, 국무장관). 민주당에게 최종 보스처럼 등장하는 공화당 정치인이다. 탁월한 식견, 대쪽 같은 신념, 대중을 매혹시키는 연설 능력까지,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완전체다. 게다가 공화당 주류 꼴보수가 아니라, 민주당 지지자도 호감을 가질 정도의 리버럴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람의 무서운 점은 이렇게 전통적 공화당 지지층에 기반을 두면서도 민주당 지지자 일부를 뺏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대선 레이스에서 민주당 매튜 산토스를 여유 있게 앞서 나갔으나, 막판에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가 터지면서 역전당했다. 사고난 발전소가 하필이면 의원 시절 압력을 넣어 자기 주에 유치한 것이었고, 마지막 승부를 가른 네바다주에도 원자력발전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닉 캐릭터는 민주당 지지자인 제작진이 생각하는 이상적 공화당 정치인상이 아닐까 하는 해석이 있다. 이 해석이 맞다면, 웨스트윙의 크리에이터 애런 소킨이 차차기작 ‘뉴스룸’에서 만들어낸 윌 맥어보이는 비닉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치킨 제작진


이 걸작의 리뷰에 제작진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몇 번씩 정주행하다보면 도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들었을까 궁금해진다. 할리우드의 성향이 그렇듯, 웨스트윙 제작진도 강력한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하긴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노골적인 친 민주당 드라마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제작진의 이력을 살펴보면 캐릭터들만큼이나 먼치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웨스트윙은 이 바닥에서도 한 데 모으기 힘든 능력자들의 집단적 창작물이다.


우선 크리에이터 애런 소킨은 제작진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다. 시즌 1~4의 대부분 기획, 대본, 제작 등을 총괄했다. 그는 이전에도 능력을 인정받은 극작가였지만, 웨스트윙의 대성공으로 넘사벽 지위로 올라선다. 웨스트윙에서도 극작가로서 소킨이 즐겨 쓰는 기법들을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인물들 간 빠른 속도로 대사를 치고받는 장면, 두 인물이 함께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등장인물이 (변호사가 최후변론을 하듯) 일장연설을 하는 장면 등이 소킨의 시그니쳐다.

애런 소킨의 시그니쳐인 walk and talk. 웨스트윙은 물론 그의 대부분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소킨은 이전에도 백악관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든 경험이 있다. 1995년에 나온 ‘대통령의 연인(원제 American President)’이라는 작품이다. 그렇게 대박 흥행작은 아니었지만 웨스트윙의 효시가 된 영화이다(빌 클린턴의 재선을 위한 홍보영화가 아니냐는 욕도 꽤 먹었다). 주인공인 대통령은 마이클 더글러스지만, 비서실장 역의 배우가 웨스트윙에서 제드 바틀렛으로 분한 마틴 신이다.

제드 바틀렛 역의 배우 마틴 신은 '대통령의 연인'에서 충성스러운 비서실장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그런데 웨스트윙이 한창 방영되던 중에 소킨은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시즌 5부터 소킨이 하차한다. 그 때문인지 이렇다 할 극적 이슈가 없어서인지, 시즌 5는 전체 시리즈에서도 가장 노잼으로 꼽힌다. 시즌 5는 바틀렛 재선 이후 2기 임기를 다루기 때문에 몰입도를 높이는 요소가 적다. 하지만 시즌 6부터 차기 대선 캠페인이 벌어지면서 다시 유잼 모드로 돌아온다.


시즌 6, 7의 총괄 프로듀서가 존 웰스다. 웰스는 시즌 1부터 소킨과 함께 총괄 프로듀서를 맡아왔다. 하지만 소킨 하차 이후에는 단독으로 제작을 총괄하며 후반부의 대선 레이스를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이 사람은 또 하나의 레전드 미드 ‘ER’의 프로듀서로 유명하다. 응급실 의사들의 삶을 다루는 ER은 서사의 결이 웨스트윙과 많이 닮았다. 업무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전문직들의 일상적 부대낌과 이상주의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웰스는 시즌 6, 7의 제작은 물론 연출과 각본에도 참여하며, 소킨 하차 이후 힘이 빠질 뻔한 웨스트윙에 다시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이밖에도 현실정치 경험이 있는 제작진들이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킨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컨설턴트였던 패트릭 캐들,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핸 상원의원의 참모였던 로렌스 오도넬 주니어, 앨 고어의 연설문 작가였던 엘리 아티 등이 그들이다. 특히 초기 스태프로 참여했다가 시즌 6, 7에서 프로듀서 지위에 까지 오른 엘리 아티는 차기 대통령 매튜 산토스의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버락 오바마에 영감을 받아 취재를 한 것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이렇게 정치의 최전선을 누볐던 프로페셔널들이 제작에 참여했기에 웨스트윙의 리얼리티가 살 수 있었다.

정치 드라마로서 웨스트윙의 리얼리티는 실제 정치의 최전선을 누빈 프로페셔널들이 제작진으로 참여한 덕분이다.




명연설, 명대사


정치 드라마인 만큼 많은 명연설과 명대사가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널리 회자되는 연설 몇 가지를 추려봤다.


바틀렛이 대선 후보이자 뉴햄프셔 주지사였던 시절, 유권자들과 나눈 질의‧응답.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지역적 이해관계를 희생해서라도 더 큰 가치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시즌 2 에피소드 1, ‘In the Shadow of Two Gunmen Part 1’ 중에서)


웨스트윙 전체에서도 가장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히는 바틀렛의 연설. 이날 대학 수영장에서 있었던 폭탄 테러의 희생자들과 생명을 구하려 불길에 뛰어들었던 이들을 추모하는 내용. ‘오늘 밤 천국의 거리는 천사들로 붐빌 것이다’는 비유적 표현이 인상적이다.(시즌 4 에피소드 2, ‘20 Hours in America Part 2’ 중에서)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산토스가 한 연설. 유권자의 후보 선출 권리는 그 어떤 전략적 목표나 가치와 바꿀 수 없음을 강조한다.(시즌 6 에피소드 22, ‘2162 Votes’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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