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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Dec 12. 2020

비주류 경제학에서 바라본 경제학 역사

E.K. 헌트·마크 라우첸하이저(2015),「E.K. 헌트의 경제사상사」

장하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비주류 경제학자일 것이다. 그가 있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는 조앤 로빈슨, 피에로 스라파 등 비주류 경제학의 거성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 장하준이 2013년 파이낸셜 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나를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최악의 모욕인 '사회학자'라고 부른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왜 장하준을 사회학자라고 부르며, 그게 왜 최악의 모욕일까? 장하준의 독특한 관점 및 방법론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는 시장을 사회 속 제도의 일부라고 본다. 즉 경제분석에 있어서 시장에 절대적 우선성을 부여하지 않으며, 역사, 정치, 사회 등과 함께 다룬다. 따라서 장하준의 저작에는 복잡한 수식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사회정치적 여건들이 경제행위와 어떻게 상호작용 했는가를 탐구한다. 그래서 그의 저작은 경제학이 아니라 역사학이나 사회학 책과 같은 느낌을 준다.


반면 주류 경제학자들은 시장 탈역사적, 탈사회적 대상으로서 엄밀한 수학적 논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경제학은 물리학, 수학과 같은 자연과학의 위상을 갖는다. 자연과학은 연구자의 주관이 배제되고 객관적 실험과 수치로만 표현된다. 경제학도 그렇다는 게 주류 경제학자들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들은 문과 학문 중 유일하게 경제학만이 과학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는 영어 표기만 봐도 알 수 있다. 학문의 영어 표기에서 ‘~ics’는 학(學), ‘~ology’는 론(論)을 의미한다. 전자는 객관적 법칙에 대한 과학이지만, 후자는 주관적 입장에 대한 이론이다. 경제학(economics)은 물리학(physics), 수학(mathematics)처럼 ~ics다. 반면 사회학(sociology)은 생물학(biology), 지질학(geology)과 같은 ~ology다.


그러니까 장하준이 사회학자라는 말은, 경제학자가 과학적이지 못하고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발언이나 일삼는다는 의미쯤 될 것이다. 수학적 방법을 쓰지 않는 장하준의 학문세계는 ‘과학으로서의 경제학’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다.

어느 학문에든 주류와 비주류가 존재한다. 하지만 경제학만큼 그 차이가 큰 학문도 없을 것이다. 사실 비주류 경제학은 개념적 통일성을 전제하는 용어가 아니다. 즉 어떤 명확한 분야를 뜻한다기보다는, 폴 새뮤얼슨이 체계화한 신고전파 종합(neoclassical synthesis, 신고전파 + 케인스주의) 이외의 분파들을 통칭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다양한 흐름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은 있다. 그것은 시장도 사회의 산물이며 불완전한 시스템이라고 보는 이론적 전제이다. 이 전제를 따르는 분야로는 마르크스주의, 포스트 케인스주의, 제도주의, 스라파주의, 역사학파 등이 있다. 이러한 조류들을 우리나라 제도교육에서는 배우기가 쉽지 않다. 일단 가르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없다. 비주류 경제학이 그래도 재생산은 되는 유럽에 비해, 우리나라는 명맥 유지조차 위태롭다. 2008년 교수신문 보도에 의하면 4년제 대학 경제학 교수 중 10% 정도가 비주류 전공자였다. 특히 이 비율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서울의 주요 대학일수록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마 최근에는 더 줄어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비주류 경제학을 공부하려면 해외 유학을 가거나 독학을 해야한다.

E. K. 헌트와 마크 라우첸하이저가 공저한 「E. K. 헌트의 경제사상사」(원제 : 「History of Economic Thought : A Critical Perspective」)는 그런 독학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줄 수 있는 책이다. 제목에서 보듯 이 책은 경제학의 역사를 다룬다. 그런데 일반적인 경제학사 책에서 보이는 백화점식 구성과는 사뭇 다르다. 이 책의 차별성으로는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선 주류 경제학(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토머스 맬서스, 신고전파,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과 비주류 경제학(칼 마르크스, 제도주의, 포스트 케인스주의, 스라파주의 등)의 대립 구도를 구축하고, 후자의 관점에서 전자를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즉 전자의 공리주의‧효용가치론을, 후자의 갈등주의‧노동가치론으로 논박하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목적이다. 따라서 이 책은 객관적 의미의 경제학사는 아니다. 오히려 비주류 경제학이라는 특정 입장에서 본 논쟁사에 가깝다. 그러므로 비주류 경제학 관점에서 경제학의 역사를 일람하고 싶다면 이 책만큼 좋은 길잡이는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경제사상의 배경을 이루는 사회사와 정치사의 서술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것이다. 경제현상은 진공 상태에서 수학으로 표현되는 순수한 그 무엇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의 격동 안에 위치한다는 게 저자들의 전제이다. 따라서 이 책은 사상이 형성되고 헤게모니를 획득한 사회정치적 맥락도 함께 다룬다. 이런 관점에서 보는 경제학사는 자본주의의 제 계급들이 벌이는 사상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무미건조한 이론적 서사뿐만 아니라, 근대자본주의 내내 이어진 계급투쟁의 역사를 생생하게 함께 그려냈다.


마지막 특징은 보통의 경제학사 책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사상가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네임드 좌파들은 물론, 다소 생소한 이름인 윌리엄 톰프슨과 토머스 호지스킨 같은 이들도 비중 있게 수록되어 있다. 특히 역자 홍기빈이 이 책을 번역한 중요한 이유라고 한, 16장의 케임브리지 자본 논쟁은 시중의 어떤 경제학사 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부분이다. 1960년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조앤 로빈슨, 피에로 스라파 등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미국 MIT의 폴 새뮤얼슨, 로버트 솔로우 등과 세기의 논쟁을 벌였다. 공교롭게도 양 대학이 있는 도시명이 ‘케임브리지’로 같았기 때문에 논쟁의 이름도 그렇게 붙었다. 그런데 대중들은 물론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저자들은 15장까지 주류경제학과 비주류 경제학의 논지를 번갈아가며 체계화한 후, 16장에 이르러 이 둘을 정면충돌시킨다. 역자도 강조하는 바와 같이, 이 논쟁을 다뤘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다른 경제학사 책들을 압도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일독할만한 책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우선 분량과 독해에 꽤나 압박이 있다. 1,000페이지가 넘는 후덜덜한 분량은 차치하더라도, 각론의 논리 흐름들을 비전공자가 따라가기가 많이 버겁다. 예컨대 발라의 일반균형이론이나 해러드와 도마의 성장모델을 수학적으로 보론하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비주류 경제학 파트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까지 마르크스 경제학의 난제로 남아있는 전형 문제를 설명하는 부분도 상당히 어렵다. 앞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소개한 16장의 케임브리지 자본 논쟁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는 수포자 출신에 경제학 비전공자인 나의 기준에 따른 것이다. 경제학을 배운 사람들이라면 이해하기가 훨씬 나을 것이다. 내 경우 책에서 다루는 중요하지만 어려운 논점들을 만날 때마다, 정말 이해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안타까운 경험을 했다. 결국 책을 띄엄띄엄이라도 다 읽는 데 6개월이 걸렸다. 물론 읽다가 지루해서 잠시 접어두기도 하고, 중간에 다른 책을 읽기도 하고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욕심을 좀 버리고(구체적인 논지와 수학적 논의는 포기하고), 큰 줄기들만 따라가도 의미 있는 독서가 될 수 있다. 1990년대에 유시민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이라는 경제교양서가 있었다. 비전공자인 내가 처음 접해본 경제학사 교양서적이라 그런지 꽤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데 유시민의 그 책도 이 책을 상당히 참조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구성이 비슷하다. 예컨대 효용가치론과 노동가치론의 대립 구도에 따라 서브 챕터들을 배치한 점이 특히 그렇다. 따라서 이 책은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의 몇 단계 위 심화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내공을 좀 더 키워 이 책에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또한 좌파나 비주류 경제학자들이 어떻게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는지 궁금하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읽어볼 만하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비주류 경제학의 영향력은 여전히 미미하다. 하지만 그 또한 엄연한 경제학의 한 흐름이며, 정치학이나 사회학 같은 인접 학문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오히려 더 넓은 시각을 제시해 줄 수도 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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