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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Nov 13. 2020

전통적 과학 관념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토머스 쿤(1962), 「과학혁명의 구조」

철학은 근적 질문과 탐구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연다. 역사 속 철학자들은 이런 일을 해냈기에 이름을 남겼다. 이성의 독자성을 통해 근대의 정신적 기초를 세운 데카르트, 인식은 객관적 대상에 근거하는 것이 아닌 주관적 구성물임을 보인 칸트, 계급투쟁으로 역사 발전을 설명한 마르크스, 근대는 계몽이 아닌 폭력의 시대였음을 고발한 푸코 등이 그렇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이렇게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영역에서 사유를 전개하며 지성의 신기원을 열었다.


「과학혁명의 구조(이하 「구조」)」를 쓴 토머스 쿤도 그중 하나다. 쿤은 과학발전의 동학을 기존 통념에서 벗어나면서도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그의 주된 관심은 근대과학혁명이 역사적으로 어떤 요인들과 관계를 맺고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이론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입론이 당시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과학계에 큰 충격을 주고 엄청난 논쟁을 촉발했다. 나아가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하나의 학문체계로 정립하는 데도 기여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쿤이 얼마나 중요한 사상사적 위치를 점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쿤의 대표작인 「구조」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책에서 다루는 르네상스 이후 과학사나, 이미 유명한 ‘전 과학(pre-science) - 정상과학(normal science) - 변칙현상(anomaly) - 위기(crisis) -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 - 또 다른 정상과학’의 논지를 재검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신 쿤이 어떤 논점을 제기하여 전통적 과학 관념을 반전시켰는가에 집중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구조」의 중핵을 이루는 다섯 가지 논변을 되짚어 봄으로써, 「구조」가 형성하는 논의의 지형과 맥락을 살펴볼 것이다.




1. 과학은 지식의 ‘축적 과정’이 아닌, 패러다임 폐기·승인의 ‘단절 과정’에 의해 발전한다.


쿤 이전 주류 철학자들(예컨대 칼 포퍼 등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과학 과학자들이 발견한 지식들이 쌓인 결과라고 생각했다. 즉 과학자들은 선배들의 이론적 유산을 물려받아, 그 체계를 더욱 풍부히 해나가면서 과학을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쿤은 과학발전의 메커니즘이 ‘축적’ 이 아닌 ‘단절’에 있다고 보았다. 과학의 권위는 누적된 지식의 역사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패러다임이 그 시대 과학자 사회에 수용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마저도 잠정적이다. 지배적 패러다임(정상과학)은 내적 결함과 모순으로 인해 또 다른 패러다임의 도전을 받게 된다. 이 도전에 자기방어가 불가능해지면 결국 패러다임 폐기와 교체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쿤은 이것이 곧 과학발전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여기서 기존 패러다임은 교체될 패러다임과는 연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구조」에서 쿤이 자주 언급하는 코페르니쿠스가 대표적 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천년이 넘게 정상과학으로 기능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과 어떠한 연계지점도, 이론적 계승도 없었다.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불연속성과 체계의 완전한 재편에 주목하여, 쿤은 이를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음의 문장은 쿤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과학혁명이란 보다 옛 패러다임이 양립되지 않는 새것에 의해서 전반적이거나 부분적으로 대치되는, 누적적이지 않은 발전의 에피소드이다.

- 9장 과학혁명의 성격과 필연성
쿤이 패러다임 교체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하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로부터 어떠한 이론적 계승점도 없었다.




2. 자연에 대한 설명력이 높아지는 정상과학의 안정화 시기가 오히려 과학이 보수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학자들은 기존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고, 관찰과 실험을 통해 설명력을 높여나간다. 이는 자연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예측 범위를 늘려준다. 우리는 보통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과학이 발전하고 있다고 느낀다. 기존 지식체계가 풍부해지고 과학적 예측의 정확성도 늘어, 설명 가능한 범위가 확대되고 있음이 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쿤은 이런 일련의 활동을 ‘퍼즐 풀이’에 비유한다).


그런데 쿤은 오히려 이 과정이 과학의 보수화를 뜻하며, 과학발전에도 역행한다고 보았다. 쿤에 따르면 이는 정상과학 체계의 재정식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즉 ‘패러다임의 새로운 응용을 제시하기 위해 서거나, 또는 이미 이루어졌던 응용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것(3장 정상과학의 성격)’이다. 1의 논변과 연관 짓는다면, 이는 어차피 폐기될 패러다임을 붙잡고 열심히 수정·보완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래 서술은 쿤이 지적하는 정상과학의 보수성을 잘 드러낸다.


역사적으로든 또는 현대의 연구 실험실에서든 간에, 자세히 검토해보면 이런 활동은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미리 만들어진, 상당히 고정된 상자 속으로 자연을 밀어 넣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정상과학의 목적은 새로운 종류의 현상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 상자에 들어맞지 않는 현상들은 종종 전혀 보이지도 않는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의 창안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으며,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서 창안된 이론을 잘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오히려 정상과학 연구는 패러다임이 이미 제공한 현상과 이론을 명료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 3장 정상과학의 성격


실제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연구활동은 정상과학이 지배적 권위를 누리는 시기에 이루어진다. 일반의 시선에서는 과학이 꽃피우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쿤의 통찰에 의하면 이는 기존 패러다임이 헤게모니를 공고히 하는 보수화 과정이다. 과학발전은 이러한 공고화 과정이 아니라, 패러다임 안팎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균열이 일어남으로써 비로소 시작된다. 쿤은 이렇게 갈파했다.


한 과학 분야가 패러다임과 그것이 허용하는 보다 비전적(秘傳的, esoteric) 연구 형태를 획득했다는 것은 그 분야의 발전에서 성숙의 징조이다.

- 2장 정상과학에로의 길




3. 공약불가능성을 가지는 패러다임들의 경쟁은 이론적 검증보다 과학자 집단 내 설득과 수용을 통해 종결된다.


과학 이론들은 같은 규준과 방법론을 따르고 동일한 기호를 사용하므로 비교 가능하다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다. 그래서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이론들 중에, 상호 검증을 거쳐 가장 타당하다고 증명된 것이 과학으로서 권위를 획득한다. 과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론들은 서로 경쟁하고, 그 결과는 객관적 기준에 의해 판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쿤은 이 명제도 부정한다. 이 대목에서 그가 제시하는 개념은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다. 즉 패러다임들은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호 검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쿤은 '그러기에는 패러다임을 놓고 논쟁하는 두 집단이 공유하는 전제와 가치가 충분히 넉넉하지 못하다(9장 과학혁명의 성격과 필연성)’고 못 박는다. 


그렇다면 패러다임의 폐기와 승인을 가능케 하는 기반은 무엇인가? 쿤은 (다소 어이없게도) 과학자 집단을 향한 ’설득을 통한 수용‘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과학혁명이 어떻게 달성되는지를 알아내려면, 자연과 논리의 충격뿐만 아니라 과학자 공동체를 구성하는 상당히 특이한 집단 내에서의 효과적 설득을 위해서 도입되는 테크닉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 9장 과학혁명의 성격과 필연성


그런데 쿤에 따르면 이 설득의 과정도 그렇게 합리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에는 이론적 명료함보다는 체계의 미적 단순함(간단함) 또는 아름다움과 같은 과학 외적 요인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앞서 과학혁명의 예로 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코페르니쿠스가 받아들인 지동설은 관측과 실험의 결과라기보다는 철학적 직관에 따른 것이었다. 즉 천동설로 행성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것보다 지동설을 따르는 것이 복잡성이 줄어들어, 간명한 행성 궤도의 체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쿤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종교적 개종에 비유한다.


그들 사이에서 충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려면, 한 그룹 또는 다른 그룹이 우리가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불러온 개종을 거쳐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경쟁적인 패러다임 사이의 이행은 공약불가능한 것들 사이의 이행이기 때문에, 논리나 가치중립적 경험에 의해서 추동되어서 한 번에 한 걸음씩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 12장 혁명의 완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정밀한 관측이 아니라,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 복잡성도 줄어들고 간명한 행성궤도 체계가 만들어져서 채택된 것이다.

따라서 새 패러다임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과학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 쿤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막스 플랑크의 「과학적 자서전」을 예로 든다. 즉 새 패러다임의 수용은 생각보다 어려워서, 기존 패러다임 고수자들이 모두 죽고 새 패러다임에 익숙한 신진세대가 성장하고 나서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과학지식보다는 정치이데올로기를 더 연상시킨다.


공약불가능성 문제는 「구조」에 대해 특히 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논지를 좀 더 밀고 가면 과학 지식도 결국 상대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과학 지식이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는 과학의 본질 규정에 대단히 근본적인 문제이다. 특히 사회구성주의자들이 이런 상대론적 입장을 극단으로 끌고 갔다. 이들에 의해 과학 지식은 관찰과 실험의 객관적 결과물이 아닌, 사회적 권력관계의 산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다만 쿤은 이러한 사회구성주의의 입장을 자신을 오해한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공약불가능성을 짤로 표현하면 대략 이쯤 될 것이다. 사람에 따라 오리로 볼 수도 있고 토끼로 볼 수도 있다. 누가 타당한지 비교는 불가능하다.




4. 과학혁명과 정치혁명은 유사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이 논변도 전통적 과학 관념과 배치된다. 얼핏 생각하면 과학과 정치에는 별 다른 연관성이 없을 것 같다. 전자가 이론적 명료함, 입증 가능성, 자연에 대한 설명 능력에 의해 움직인다면, 후자는 집단 간 권력투쟁의 논리가 지배할 것이다. 


그런데 쿤은 양자가 서로 유비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혁명과 정치혁명의 메커니즘은 원천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정치혁명은 기존 제도가 사회적 불만들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할 때 단초가 만들어진다. 결국 새로운 제도(또는 이데올로기) 도입을 주장하는 집단들에 의해 추동된다. 쿤에 의하면 과학혁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즉 기존 패러다임이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데 더 이상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증대되면서 일어난다. 요컨대, ‘정치적, 과학적 발전의 양쪽에서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는 기능적 결함을 깨닫는 것은 혁명의 선행 조건’(9장 과학혁명의 성격과 필연성)이다.


양자의 공통점은 보다 심오한 차원으로 이어진다. 정치혁명 국면에서 이데올로기 양극화가 발생하면 정치적 문제 해결은 실패한다. 특정 쟁점에 대한 두 진영은 상호 차이의 조정에 필요한 초제도적 틀을 알지 못한다. 결국 무력을 포함한 대중 설득의 기술에 호소할 수밖에 없게 된다. 쿤에 따르면 과학혁명도 이와 같다. 정치제도와 마찬가지로, 경쟁하는 패러다임들 사이의 선택은 양립 불가능한 공동체적 삶의 양식들 사이에서의 선택이 되고 만다.




5. 과학발전은 특정한 목표와 방향 설정 없이 이루어진다.


보통 우리는 과학발전을 ‘어딘가 존재하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이 발전하는 만큼 삼라만상의 어두운 부분들을 밝힐 수단들이 많아진다. 이것들이 쌓일수록 우리는 진리에 더 가까워진다고 여긴다.


하지만 쿤은 이러한 선형적·목적지향적 인식을 배격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등장하는 것이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다. 종의 진화는 단순한 경쟁과 자연선택에 의한 우연의 산물일 뿐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진 활동이 아니다. 과학혁명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패러다임 교체는 특정한 목적성이 개입한 결과가 아니다. 그저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의 단순한 변화에 불과하다. 쿤의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그가 「구조」에서도 역설한 것처럼, 진화·발전·진보와 같은 개념들은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지금까지 논의했던 것이나 앞으로 더 이야기할 내용의 어느 것도 과학의 발전이 무엇인가를 행한 진화의 과정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불가피하게도 이 공백이 많은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과학을 자연에 의해서 미리 설정된 어떤 목표를 향해서 부단히 다가가는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에 그런 목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인가? 과학의 존재와 그 성공 모두를, 어느 한 시점에서 과학자 공동체의 지식 상태로부터의 진화의 관점에서 모두 설명할 수는 없는가? 과학에는 자연을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진리에 부합되게 하는 하나의 설명이 있으며, 과학적 성취에 대한 합당한 측정이란 우리를 그 궁극적 목표에 얼마나 근접시켰는가를 나타내는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도움이 되는가?

- 13장 혁명을 통한 진보
쿤 이론의 한 짤 요약. 즉 과학 발전은 사이클로 돌고 도는 것이지, 진리나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목적지향적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1~5의 논변들을 종합하면 다음의 결론에 이른다.


'과학은 과학자들이 설득(과학 외적 요소의 개입 포함)에 의해 받아들이는 패러다임 교체에 따라 혁명을 겪는다. 그런데 패러다임 교체는 상대적이고 공약불가능한 것들 사이의 이행일 뿐이다. 따라서 객관적 검증보다는 정치혁명과 비슷한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이는 진리나 진보와 같은 특정한 목적이나 방향을 담지하지 않는다.'


「구조」는 출판 이후 커다란 충격과 변화를 야기했다. 쿤이 주창한 단절적, 상대론적, 탈목적적, 우연적 과학 관념은, 수백 년 동안 과학이 누리던 권위에 일격을 가했다. 이로써 과학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서 벗어나, 과학적 지식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 권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은 과학사와 과학철학이라는 학문체계가 정립되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과학의 연구경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과학은 객관적, 실증적, 절대적이라는 인식이 흔들리면서, 전통적 과학 관념을 대변하던 원자물리학, 소립자물리학 등의 분야가 권위를 잃었다. 원자물리학은 은연중 우주 물질을 지배하는 근본적 법칙과 구성요소를 알게 되면 만물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들어 절대적 진리의 과학 관념이 흔들리면서, 원자물리학 등이 내세운 통일과학의 이념도 추진력을 잃었다. 대신 복잡성과 다변성으로 상징되는 생명현상, 나노세계, 복잡계 등의 분야가 부상하게 되었다.

물리학자였던 토머스 쿤은  단 한 권의 책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했고, 자연의 근본법칙을 밝히려는 과학의 연구경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구조」가 현대 지성사에 미친 파급력은 지대하다. 그것은 쿤이 과학혁명의 사례로 자주 인용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교될 만하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패러다임 교체는 천문학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는 중세 신학적 세계관의 근대적 과학주의로의 재편을 상징한다. 이에 따라 다양한 정치, 사회, 문화적 연쇄효과들이 뒤따랐다. 쿤이 제시한 전통적 과학 관념에 대한 반전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쿤의 이론이 어디까지 맞았고, 어디서부터 틀렸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절대적 권위를 갖던 과학의 본질에 근본적 물음을 제기했다. 이로써 역사와 과학, 사회와 과학의 관계를 재고하고 과학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는 쿤 이론에 대한 지지와 비판 여부를 떠나, 위대한 철학적 업적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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