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세상살이는 어렵다. 물론 세상은 공평하지 않기에 타고나는 조건의 유·불리는 있다. 그래도 쉽게 세상을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크든 작든 각자 짊어진 삶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생후 한 달이 넘은 내 딸도 마찬가지이다. 딸은 지금 모유를 소화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어려움이다(트림을 잘 못한다;;). 그러나 앞으로 더 큰 고난들이 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좌절하고 포기하는 순간들도 많을 것이다. 딸을 못 믿어서가 아니다. 세상의 현실이 그만큼 냉엄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자책하는 딸에게 이 말만큼은 늘 해주고 싶다. “괜찮아. 그건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야.” 돌이켜보면 나도 예전부터 자주 듣고 싶었던 말이다.
딸의 이름을 지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이 이 ‘삶의 고난’이었다. 고난에 대한 인생의 철학을 이름에 담고 싶었다. 요즘 작명 트렌드처럼 액세서리 같은 느낌으로 짓고 싶지는 않았다. 평생 간직할 가르침을 새기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자 조합을 만들고 싶었다. 수많은 글자들을 쓰고 지운 끝에 글 서(書) 자에 짝 우(偶) 자를 골랐다. 한 마디로 ‘글과 단짝이 되어라’라는 뜻이 된다. 확장해서 해석하면, ‘지식을 얻는 수단으로서의 글을 늘 가까이 두고, 지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갖추라’는 의미다.
나는 세상살이의 많은 어려움이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올바로 이해 또는 예측하지 못하는 부분들에서 잘못된 판단이 모여, 불행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따라서 사고와 인식의 지평이 넓을수록 인생을 큰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다. 인생이란 결국 의사결정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주한 문제의 본질을 냉정히 통찰하고, 관련 정보들을 분석‧조직하여 합리적 결론으로 나아가는 사유가 중요하다.
이렇게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만 갖춰도 인생에서 크게 실패할 일은 없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의외로 중요한 결정에 대해 이성적 접근, 합리적 판단을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이성보다는 감정적 관성에 휘둘리거나, 정보의 정확성을 판별하지 못하거나, 올바른 인과관계를 파악하지 못하는 등의 이유에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이 실패하는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주로 남의 탓을 하거나, 운이 나빴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합리적 사고의 결여는 냉정한 자기 객관화도 어렵게 만든다.
지식은 합리적 사고의 가장 중요한 토대이다. 합리적 사고란 지식이라는 재료들을 용도와 목적에 맞게 쌓고 이어서 만든 건축물이다. 양질의 자재가 있어야 견고한 건축이 가능하듯, 정확하고 체계화된 지식들은 합리적 판단의 필수 요건들이다. 이것은 학술 연구처럼 고도의 지적 작업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의 모든 활동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예컨대 악기 연주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악기를 다루는 테크닉만 몸에 익혀서는 좋은 연주자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악기의 세부 구조와 작동 원리, 악기가 변천해온 음악사적 맥락, 연주법의 최근 경향 등의 지식을 갖춘 연주자와는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지식을 얻으려면 독서는 필수다. 지식인 사회에서 검증이 된 텍스트만이 지식의 매체로서 기능할 수 있다. 엄격한 학문적 법규에 의해 조직된 문자들만이 지식의 권위를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아무리 인터넷이 일상화되고 유튜브가 대세가 되어도, 책을 대체할 수는 없다. 1982년 발간된 월터 J. 옹의 저작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분석을 제시한다.
전자기술은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에 의해서 우리를 ‘2차적인 구술성’의 시대로 끌어넣었다. 이 새로운 구술성은 예전의 구술문화와 놀랄 만큼 유사하다. 즉, 2차적인 구술성은 그 속에 사람들이 참가한다는 신비성을 가지며, 고유한 감각을 키우고, 현재의 순간을 중히 여기는 한편, 나아가서 정형구를 사용하기조차 한다.
즉 커뮤니케이션의 진화가 역설적으로 전근대의 구술문화 특징(첨가적, 장황함, 보수적, 비체계적 등)을 더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터넷은 문자정보보다는 구술정보에 더 가깝다. 논리적 담론보다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표현들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SNS에 넘쳐나는 잡담성 정보들(짧지만 많은 이목을 끄는 것이 목적인)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지식을 얻고 체계화하려면, 여전히 문자문화의 정수인 책에서만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있다.
딸 서우가 무엇을 업으로 삼을지는 모르겠다. 본인이 행복해하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뭘 하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름처럼 지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지적이라는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태도를 의미한다. 지식을 접하고 얻는 일에 적극적이고, 거기서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역사 속 사상가들의 사유에서 새 길을 찾고, 작가들의 문장에서 위로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글을 평생의 단짝으로 삼아 인생의 고난을 슬기롭게 극복해나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