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대웅 May 28. 2021

소속이 어디냐고 묻는 것에 대하여

“고향이 어디에요?”


난감히 여기는 질문 중 하나다. 질문 의도에 맞는 답이 뭔지 잘 모르겠어서다. 태어난 지역을 묻는 것일까? 삶의 근거지를 묻는 것일까? 아니면 둘 다? 나는 일단 서울에서 태어났다. 11살에 대전으로 와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이후 서울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다. 직장 생활을 몇 년 하다가 부모님이 계시는 대전으로 이직해서 다시 왔다. 그러니까 태어나고 학습의 중요한 경험을 한 곳은 서울이다. 반면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지금 내 집과 본가가 있는 곳은 대전인 셈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서울에서 20년, 대전에서 21년을 살았다. 그래서 대강 ‘서울 반, 대전 반’이라고 대답한다.


나는 고향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내게는 서울이든 대전이든 당시 상황과 필요에 의해 살았던 곳일 뿐이다. 그래서 고향이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아련한 그리움이 전혀 없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친근함을 표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나도 눈치는 있는지라 그럴 때마다 적당히 맞장구친다. 하지만 솔직히 당혹스럽다. 우연히 서로 같은 지역에 살았다는 것이 왜 친근함의 이유가 될까.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지역에 대한 부심이나 그 지역 태생들은 성향이 어떻다는 식의 논평까지 들으면 할 말을 잃는다.


생각해보면 고향뿐만이 아니다. 모교와 가문도 그와 비슷한 인식의 대상이 된다. 일단 나는 ‘모교(母校)’라는 개념이 참 기묘하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와도 같은 나의 출신 학교’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졸업한 학교들을 어떻게 가게 됐나 돌이켜보면 그 이유가 좀 우습다. 집에서 가까웠거나, 시험 점수와 합격선이 비슷했거나, 아니면 학비가 싸서였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닌 학교들을 왜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처럼 생각해야 하는 걸까. 물론 학교에서 만난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있었다. 그들과의 기억은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 개인들이 좋은 사람들이었던 덕분이지, 학교가 훌륭해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문이나 집안도 마찬가지다. 학창 시절 가장 싫었던 숙제 중 하나가 본관과 파를 조사하고 선조 중 유명한 분에 대해 알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 쓸데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의 90%가 성씨가 없었다. 그러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대부분 성씨를 갖게 됐다는 것은 역사적 상식이다. 이러한 사실이 아니더라도,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 지금의 내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예로 든 고향, 모교, 가문 등은 개인에게 소속감을 준다. 그것은 곧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이 정체성의 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특정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강한 자부심이나 공동체 의식을 갖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게 나랑 뭔 상관이냐고 반문한다. 내가 이제껏 만나본 사람 중에는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는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흔히 보는 온갖 동문회, 향우회, 종친회, 전우회, 기타 어디 어디 출신 모임 등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3대 조직이 고려대 동문회, 호남 향우회, 해병대 전우회라는 말도 있었다. 그래서 ‘호남 출신에 해병대 전역해서 고려대 졸업하면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는다(...)’라고들 했다.


나는 후자의 극단에 속한다. 지금까지 연고와 관련된 모임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우연히 같은 학교나 고향 출신을 만나도 아무 감정이 들지 않는다. 물론 내게도 좋아하고 자주 교류하고픈 사람들은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연고적 동일성보다는 취향적 동일성에서 기인한다. 나는 사회적 오지랖의 경계를 지키고, 철학은 뚜렷하되 허세롭지 않으며, 좋아하는 콘텐츠에 공통분모가 있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러니까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에 나올 것 같은, 취향은 분명하되 삶의 방식은 담백한 개인주의자들이 좋다. 나와 타인의 교류도 집단의 틀이 아닌, 개인의 개성에 따라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소속과 정체성을 갖고 사는 것은 불가피하다. 회사나 가족은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최소한의 소속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외의 것들에는 가능한 한 소속되지 않고 싶다. 뒤늦게 아나키스트라도 되려는 걸까. 나이가 들수록 집단이나 조직이 성향과 안 맞는다는 걸 느낀다. 내 의지로 선택한 조직도 그렇다. 나는 10년이 넘도록 정당의 당원이거나 시민단체의 회원이었던 적도 있었다. 내가 지향하는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이라면, 개인이면서도 집단으로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소위 진보적인 조직에서도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존재하기는 어려웠다. 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가 본인의 과두제 이론을 ‘철의 법칙’이라고 한 것에는 다 그만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인가 보다.


집단은 개인에게 정체성과 안정감을 주지만 의무도 부여한다. 나는 개인에 앞서 규정되는 집단의 정체성이 싫다. 거기서 발생하는 의무는 더더욱 싫다. 내 성향과 맞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거나, 그들의 일상적 대소사를 챙기는 일은 피곤하다. 그래서 나는 집단의 일부가 아닌 선명한 개인이고 싶다. 어디 소속이냐는 확인보다는 너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고 싶다. 졸업한 학교나 출신 지역을 따지는 일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다. 좋아하는 작가나 밴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즐겁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우(書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