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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Apr 21. 2022

태안의 일몰

40여 년을 서울과 대전에서만 살았다. 그러니 바다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가는 곳이었다. 1년에 손에 꼽았던 아버지의 휴가 때 온 가족이 큰맘 먹고 갔던 해남과 강진이 그랬다. 대학 입학 후에는 총학생회 연중 최대 행사인 새터(신입생 수련회)의 개최지가 속초였다. 대학 다니면서 새터만 다섯 번(...)을 갔다. 그때 말고 엠티든 여행이든 바다로 놀러 갔던 기억은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바다에 대한 로망이 생겼다. 자주 갈 수는 없지만, 마음의 정돈이 필요할 때는 먼 길을 달려서라도 가 보고 싶은 곳. 삶을 괴롭히는 번민들에 맞설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곳.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고 쓴 시인도 있었다. 그이의 생각도 아마 나와 같았을 것이다.

     

고교 시절 최초로 가슴에 품었던 나만의 바닷가는 강릉이었다. 그 무렵 음악 좀 듣는다는 우리 반 리스너들의 취향은 핑클(아이돌)과 너바나(모던록)로 극단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특이하게도 포크와 어쿠스틱 음악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동물원이나 여행스케치를 듣는 애는 우리 반에 나밖에 없었다. 특히 동물원의 김창기 씨가 만든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을 살께’라는 곡을 좋아했다. 가사가 이렇다.  

   

변함없는 나의 삶이 지겹다고 느껴질 때
자꾸 헛돌고만 있다고 느껴질 때
지난날 잡지 못했던 기회들이 나를 괴롭힐 때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을 살께

언젠가 함께 찾았었던 그 바다를 바라볼 때
기쁨이 우리의 친한 친구였을 때
우릴 취하게 하던 그 희망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을 살께

나는 그곳으로 떠날 수 있는 용기조차 없어
그저 수첩 속에 그 차표들을 모을 뿐
어느 늦은 밤 허름한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마음속에 숨은 바다를 찾아볼께

- 김창기,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을 살께’

    

술 한번 마셔본 적 없던 고딩이 뭘 안다고 이런 노래를 좋아했을까. 어쨌든 이 곡은 나의 야간자율학습 플레이 리스트에 늘 들어 있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언젠가 삶이 힘들 때 홀연히 강릉으로 떠나 쓴 소주를 들이켜는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하지만 로망을 넘어서 실천으로 옮긴 적은 없다. 가사 속 화자가 실제로 떠나지 못하고 애꿎은 차표들만 모은 것처럼 말이다.

    

어른이 되고 난 이후 바다는 더 이상 특별한 곳이 아니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일하다 말고 휴가를 내고서라도 얼마든지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직장인이 된 내게 새롭게 나만의 바닷가가 된 곳이 바로 태안이었다. 태안은 직장이 있는 대전에서 불과 130km 정도 떨어져 있다. 차로 두 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이제 나는 바다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태안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태안이 나만의 바닷가가 된 이유는 일몰이 아름다워서다. 나는 바다에 일몰을 보기 위해 간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힘을 얻고자 일출을 보러 간다. 하지만 나는 일몰이 더 좋다.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시간대를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바다의 일몰을 바라보면 위안을 받는 느낌이 들어서다. 황금색, 코랄색, 주황색으로 번져가는 일몰의 색감은 바다를 바라보는 모두에게 공평한 위로를 전한다. 어떤 삶의 무게를 짊어졌든, 오늘 하루 어떤 기막힌 일들을 견뎌야 했든 말이다.

      

일몰은 ‘너는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담지하지 않아서 더 좋다. 일출은 어스름하던 빛이 환해지며 밝음의 절정에 이른다. 많은 사람들이 일출에서 용기와 희망을 보는 이유가 이 드라마틱한 빛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반면 일몰은 황금색 빛이 붉게 내려앉으며 이내 어둠 속으로 파묻혀 버린다. 나는 이것이 꼭 위안은 주되 굳이 희망까지는 강요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진다. 삶의 고난에 대해 그저 괜찮다는 말 한 마디로 충분한 경우가 다. 내게는 일몰이 딱 그런 이미지다.

     

전국의 수많은 일몰 명소 중에서도 태안이 좋은 이유로는 다음의 세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첫째로 태안을 향해 운전해서 가는 길이 환상적이다. 대전에서 차로 가면 당진-대전 간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예산에서 빠져나와 홍성을 지난다. 거기서 천수만을 건너면 바로 태안으로 진입한다. 일관되게 서쪽을 향해 달려가는 코스다. 태안의 일몰 시간에 맞춰 대전에서 오후 늦게 출발하면, 이미 차가 향하는 서쪽으로는 저 멀리 붉게 노을이 번지고 있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차가 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쯤 되면 차 안에 깔리는 음악도 중요하다. 다음의 두 곡을 추천한다.

     

우선 Sun Rai의 ‘San Francisco Street’이다. 편안한 멜로디와 간결한 반주가 매력적이다. 이 곡의 킬링 포인트는 통통 튀는 리듬 파트 편곡이다. 운전자의 귀를 즐겁게 해준다. 비록 태안은 샌프란시스코가 아니고 천수만을 건너는 다리도 골든게이트 브릿지는 아니지만, 뭐 어떠랴. 눈으로는 충남을 보지만 머릿속으로는 캘리포니아를 떠올리면서 이 멋진 곡을 듣자.


또 하나는 Van Morrison의 ‘Into the Mystic’이다. 이건 40대인 내 또래 사이에서도 생소한, 그야말로 아재들의 올드팝이다. 발매년도가 무려 1970년이다. 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곡의 제목인 ‘Into the Mystic’과 잘 어울린다. BBC 조사에 의하면, 조용히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 때문에 영국 외과의사들이 수술할 때 가장 즐겨 듣는 곡이라고 한다. 리드미컬한 어쿠스틱 반주 위에 올려진 Van Morrison의 따뜻한 목소리는 늦은 오후의 드라이브에 잘 어울린다.

     

둘째로 관광지도 아닌 평범한 어촌도 아닌, 어중간한 느낌이 좋다. 이 지역의 정식 명칭은 ‘태안해안국립공원’이다. 그런데 자세히 둘러보면 여기가 국립공원이 맞나 싶다. 해운대처럼 으리으리한 오션뷰 레스토랑들도 없고, 강릉처럼 힙한 카페들도 없으며, 포항처럼 네임드 수산시장도 없다. 곳곳에 늘어선 펜션들이 여기가 관광지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어째 하나같이 2000년대 초반에 인테리어 수준이 멈춰 있다. 도무지 묵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싶어도 카페가 없다. 대표적 일몰 스팟인 꽃지해수욕장 근방에 호텔과 겸한 카페가 한 곳이 있다. 비싸고 맛도 없는 데다 그마저도 일찍 문을 닫는다.


그래도 차분히 일몰을 감상하기에 태안만한 곳이 없다. 언제 가도 사람들의 북적거림이 덜하다. 태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몰 스팟은 꽃지해수욕장과 운여해변이다. 나무와 바위가 이루는 독특한 지형이 아름다운 빛의 구도를 연출하는 곳들이다. 꽃지해수욕장은 서해안에서도 손꼽히는 일몰 명소다. 두 개의 바위 사이로 낙조가 질 때의 풍경이 이곳의 시그니처다. 바위가 만들어내는 구도가 워낙 멋져서 아무렇게나 사진을 찍어도 작품이 나온다.


운여해변은 꽃지해수욕장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풍경은 더 아름답다. 이곳의 상징은 방풍림 역할을 하는 작은 솔섬이다. 이 섬은 홋카이도 비에이의 마일드세븐 언덕을 떠올리게 한다. 소나무들 위로 붉은 하늘빛이 내려와 서로 겹치면, 은은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솔섬 옆으로는 길고 큰 방파제가 있다. 탁 트인 바다 위로 아주 장쾌한 일몰 풍경이 펼쳐진다.


운여해변은 은하수 촬영 명소로도 유명하다. 최근 캠핑하면서 은하수를 촬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워낙 아름다운 곳이니 세간에 안 알려질 수가 없다. 그래도 사람이 급격히 많아지는 것 같아 조금 아쉽다. 얼마 전 혼자 갔을 때의 일이다. 대학생들로 보이는 이들이 클럽 음악을 틀어놓고 요란스럽게 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것도 캠핑의 재미겠지. 하지만 다른 데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굳이 이렇게 고요한 곳까지 찾아와서 해야 하는 일일까 싶었다.


아무튼 태안은 유명 관광지라 하기에는 사람이 적다. 그렇다고 무명의 어촌이라 하기에는 사람이 많다. 일몰 풍경을 즐기는 데 이보다 좋은 조건이 없다. 관광객이 너무 많으면 감상에 방해가 될 것이다. 반대로 너무 없으면 그나마 있는 인프라도 줄어들 것이다. 뭐든지 적당한 것이 좋다.

     

셋째로 돌아오는 길이 긴 여운을 남긴다. 일몰이 끝나면 태안은 급격히 어두워진다. 8시만 되어도 거리에 사람을 찾기 힘들다. 도로에 가로등도 거의 없다. 그래서 태안에서 대전으로 돌아가는 길은 자동차 헤드라이트에만 의지해서 운전해야 한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태안은 일몰로 위안받은 마음을 그대로 유지시켜 준다. 어둠이 깔린 길을 운전하며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어 좋다. 특히 이런 음악을 배경에 깔고서.

 

  


패닉의 ‘미안해’와 짙은의 ‘해바라기’는 어둑한 밤길 운전에 잘 어울린다. 사운드가 두드러지지 않으면서 읊조리는 듯한 보컬이 인상적이다. 태안의 어두컴컴한 길을 배경으로 깔고, 이 곡들을 실마리로 삼아, 평소에 생각해왔던 것들을 다른 맥락에서 들여다보곤 한다.

    

언제 처음 태안에 일몰을 보러 갔었나. 정확히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최소한 10년은 넘은 것 같다. 언젠가 누군가와 함께 예정에 없던 길을 나섰다. 그리고 일몰을 보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때 그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와 대화 내용은 다 잊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졌던 일몰은 여전히 기억한다. 며칠 전 나 혼자 태안에 찾아갔을 때 보았던 풍경과 거의 똑같은 것이다. 사물과 사람은 모두 변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그래도 태안 바다의 일몰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오래도록 거기 남아있기를 바란다. 언제 찾아가도 그 모습 그대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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