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가졌던 직업이 서너 개 정도 된다. 그중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중요한 직업은 다름 아닌 학원강사다. 17년 전 나는 서울에 유학 온 지방러 대학생이었고, 제일 큰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일단 등록금은 이런저런 장학금들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월세, 식비, 교통비 등 서울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모은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졸업을 1년 앞둔 무렵, 알바 사이트를 뒤지다가 학원강사가 가성비가 좋아 보여 무작정 시작했다. 알바라고는 해도 내게는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처음 강사로 일한 곳은 이문동의 한 보습학원이었다. 첫 월급 액수를 아직도 기억한다. 중학교 사회 과목을 주 4일 가르치고 월 70만 원을 받았다. 시험 기간에는 거의 두 배로 강의하고 10만 원을 더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착취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때 내게는 아주 큰돈이었다. 그 월급으로 월세 내고 책 사고 여자친구와 데이트하고 후배들 술 사주고, 할 거 다 했다. 이때를 생각하면 돈이란 정말 상대적임을 깨닫는다. 지금은 몇 배는 더 벌지만 늘 쪼들린다.
그런데 대학원에 입학하자 그 정도 벌이로는 택도 없었다. 첫 학기 등록금, 기숙사비, 책 구입비 등으로만 최소 천만 원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더 큰 시장으로 나아가야 했다. 대입 사교육의 빅마켓은 예나 지금이나 수학과 영어다. 그러나 태생적 수포자이며 수능 이후 영어책을 펴본 적도 없는 나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논술을 선택했다. 전공이 사회과학이기도 하고, 당시 기업형 논술학원들은 코스닥 상장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운이 좋게도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선배의 소개로 쉽게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무렵 논술 사교육은 오갈 데 없는 운동권 낭인들의 대피처였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 소수자운동 등 대한민국에서 반정부 활동하는 온갖 꿘들을 거기서 만날 수 있었다. 한 가지 웃긴 것은, 그 바닥에서 최대 정파는 PD였다는 점(연배 좀 되는 아재 중에는 무려 CA 출신도 있었다)이다. 이는 NL이 평정해버린 실제 운동권 판세와는 정반대였다. 아마 논쟁에 목숨 거는 PD들이 책 안 읽는 NL보다 훨씬 논리적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몇 년간 대치동, 명일동, 상계동, 목동 등을 보따리장수처럼 오가며 논술을 가르쳤다. 동네 공부방 같은 학원부터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형 학원까지, 많은 곳들을 전전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마지막으로 일했던 대치동 은마아파트 앞의 모 학원이었다. 여기는 해마다 SKY에 몇백 명을 보내는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그런데 다른 학원들과는 달리 시스템이 상당히 정교했다. 일단 입사부터 쉽지 않았다. 보통 나 같은 파트타임 강사들은 알음알음으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학원은 대기업처럼 몇 단계의 채용심사를 거쳐서 강사를 뽑았다. 1차는 이력서와 자소서, 2차는 주어진 논제에 대해 본인이 작성한 답안, 3차는 현직 강사들 앞에서의 시강과 토론이었다. 그 과정들을 다 거쳐서 겨우 원장 면접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원장은 평소에 책 한 권 안 읽을 것 같은 강남 아줌마였다. 그래서인지 이전 단계에 비해 면접은 쉬웠다. 그저 인적사항만 간단히 확인하고 끝났다.
어렵사리 들어가 보니 동료 강사들의 스펙이 엄청났다. 서울대 학부 출신은 기본에, 석사나 박사까지 마친 사람들이 다수였다. 로스쿨과 의전원 출신들도 적지 않았다. 무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유학하면서 방학 중 한국에 들어와 알바를 뛰는 사람도 있었다. 대체 나는 어쩌다 뽑혔는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전에도 여러 학원에서 일해봤지만, 동료들과 그렇게 경력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신기한 경험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11월 개강 직전 열린 입시설명회가 시작이었다. 이 행사에서는 학부모들에게 그해의 입시전략과 커리큘럼에 대해 설명하고 강사진을 소개한다. 내가 참석했던 해는 강남구민회관에서 열렸다. 처음에는 뭘 이렇게 큰 곳을 빌려서 하나 싶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자리가 없어서 학부모들이 통로에 서서 듣고 있었다. 모든 강사들은 이 행사에 예외 없이 정장을 입고 참석해야 한다. 그리고 한 명씩 단상 위로 올라가 사회자의 소개를 받는다. 마치 NBA 경기에서 장내 아나운서가 홈팀의 선수들을 요란스럽게 소개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런데 휘황찬란한 수사들로 도배된 다른 강사들과 달리, 나는 다음의 멘트와 함께 10초 만에 소개가 끝나고 머쓱하게 내려와야 했다.
“배대웅 선생님은 00대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 중이시구요. 음... 어... 아무래도 전공이 전공인만큼 인문학 쪽 논제에 강하실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박수~”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수업의 수준이었다. 과장 좀 보태면, 이 학원의 논술 수업은 웬만한 대학원 세미나는 가볍게 바르는 수준이었다. 일례로 ‘사회 인식과 객관성’이라는 수업에서는 가다머의 해석학, 포퍼-하버마스의 실증주의 논쟁까지 다루었다. 그래서 나도 전공과 거리가 있는 주제에 대해서는 며칠 전부터 바짝 긴장해서 수업을 준비해 가고는 했었다. 그러다 크게 실수한 적도 있었다. 언젠가 「맹자」를 교재로 수업을 했었는데, 다음 날 한 학생의 어머니가 교무실로 컴플레인을 걸어온 것이다. 모 대학의 중문과 교수라는 그분은 내가 「맹자」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한참 동안 강의해주었다. 장시간 통화를 하면서 진땀 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거의 자리에서 일어나 굽신거리며 통화했다). 당연히 나는 그 학부모와 원장에게 잘못을 빌어야 했다.
많은 강사들이 가명을 쓴다는 것도 특이했다. 사실 가명 사용은 논술강사를 시작할 때부터 종종 봐 왔던 일이다. 그런데 이 학원에서는 가명의 강사가 유독 많았다. 자기들이 무슨 아이돌도 아니고, 사교육 강사가 뭘 그렇게 가명까지 쓰는지. 하지만 그들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많은 강사들이 평생 직업보다는 잠깐의 돈벌이 수단으로 일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나중에 학계(정확히는 교수)로 간다. 학계란 워낙 좁고 명성이 중요한 곳이 아닌가. 주류 인사들이 보기에 사교육 강사는 아무래도 격 떨어지는 직업일 것이다. 교수 채용에 있어서도 마이너스가 되면 되었지 플러스 요인이 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를 고려한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그렇게 가명들을 썼을 것이다.
실제로 잘한다는 강사 중에는 박사과정까지 마쳐도 딱히 갈 곳이 없는 순수학문 전공자들이 많았다. 내 사수 중에 서울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까지 받았던 분이 있었다. 이분이 나중에 철학 이론서를 냈는데, 책 감사의 말에 학원 원장도 언급했었다. 어려웠던 시절에 자기를 경제적으로 지원해줘서 감사하다고. 철학 연구와 입시교육 일을 동시에 했어야 하는, 어떤 짐작할만한 사연이 이분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잠깐 일하러 왔다가 엄청난 돈을 벌면서 말뚝을 박는 강사들도 있었다. 대표강사이자 부원장이었던 모 선생님이 그랬다. 이 분은 유학자금 모으려고 일 시작했다가 스타강사로 뜨는 바람에 학원의 지분을 받으며 눌러앉았다. 동료 강사들과 친해져서 술자리에서 알게 되었지만, 화려해 보이는 스펙들 이면에는 의외로 이런저런 인생사 굴곡들이 있었다.
처음에 강남에서 가르치기 시작할 때는 학생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아무래도 부잣집 자제들이라 버릇없고 이기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직접 가르쳐보니 아니었다. 우수한 성적은 물론, 심성이 착하고 예의 바르며, 교양도 풍부했다. 무엇보다 상대방 말을 경청하고 이해할 줄 알았다. 반면 신림동에서 잠깐 가르쳤던 아이들은 훨씬 거칠고 버릇없었다. 수업은 고사하고 내가 뭐라 하든 듣지 않고 아니라고 부정부터 했다. 이 아이들은 맞벌이 부모가 돌볼 시간이 없어 학원으로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부모의 여유로운 삶이 자식들의 성적은 물론 인성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내가 가르쳤던 잘 사는 집 아이들은 입시 공부에만 몰입하지 않았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학교 생활 외에도 폭넓은 경험을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은 외국은 물론, 전시회와 음악회, 시민교양강좌, 독서모임 등에도 곧잘 다녔다.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어 재능기부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고등학생 같지 않은 성숙한 사고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꽤 만날 수 있었다. 개중에는 비판적 사고가 과한 나머지, 저놈 대학 가면 데모질깨나 하겠구나 싶은 녀석들도 많았다.
그런 아이들과 수업하고 토론하는 것은 내게도 즐거운 일이었다. 보통의 성인보다도 대화가 잘 통했기 때문이다. 대선이 있던 2007년, 지루한 고전 텍스트 대신 연세대 김호기 교수가 제시했던 ‘욕망의 정치, 가치의 정치’라는 개념을 주제로 수업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수업 당일 갑자기 논제를 바꿨지만 아이들은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인간성의 상실과 같은 중후한 단어들도 난무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토론은 웬만한 성인들의 술자리 정치논평보다 훨씬 수준이 높았다.
그렇게 3년여를 일하고, 더 이상 학원강사라는 직업은 갖지 않기로 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미래의 불안정성이 너무 컸다. 일을 하면서도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선배 강사들이 종종 전업으로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했지만, 나는 모 아니면 도인 일에 인생을 걸 만큼 배포가 크지 못했다. 그런데 (결과론이지만) 이 판단은 크게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 교육정책이 바뀌면서 논술 사교육 시장이 급속히 해체됐기 때문이다. 둘째로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자꾸 들어서다. 학원강사로 일했던 무렵은 내가 진보정당 활동을 열심히 할 때다. 진보를 역설하면서 사교육으로 밥먹고 사는 내가 인지부조화는 아닌지 고민이 많았다. 그때만 해도 나한테 순수함이 조금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하고 있던 강의들을 정리하고 계약직이나마 새로운 직업을 찾았다. 그리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평범한 회사원으로 생활해오고 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학원강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내 힘으로 대학원까지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직업 특성상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보람과 낭만도 있었다. 내가 가르친 아이들의 성적이 올랐을 때의 보람은 회사 업무에서는 얻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아이들의 토론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이어질 때도 가르치는 이로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능력에 비해 많은 것을 얻게 해 준, 여러모로 고마운 직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