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을 살면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이 풍진 세상에 무작정 아이를 내놓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아이를 싫어했다. 지인들이 (보여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아이 사진을 신나서 보여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억지로 예쁘다는 리액션을 했던 기억이 숱하다.
이런 생각을 바꾼 것은 조카들이었다. 재작년 2월 쌍둥이 조카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바쁘다는(+ 귀찮다는) 이유로 미루다가 돌잔치가 돼서야 처음 봤다. 그때 생각했다. 세상에 천사가 있다면 그건 얘들이겠구나.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핏줄 탓인지, 나이가 든 탓인지, 애들이 정말 예쁘게 생겨서인지. 나보다도 아내가 더 했다. 돌잔치 후 아내는 출산의 의지를 강력히 드러냈다. 나는 그 기세에 눌려 소극적으로 반응했다. 그런데도 단번에 아이가 생겼다. 그토록 바랐던 ‘딸’로 말이다.
2021년 1월 26일 아이는 무사히 세상으로 나왔다. 아이와 처음 마주했던 순간 많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이걸 대체 뭐라 묘사하면 좋을까. 감사함, 신기함, 뭉클함, 흥분됨, 사랑스러움 등등. 다소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만감(萬感)이라고 해두자. 아이를 갖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만감이 교차하는 그 순간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아이는 효녀의 DNA를 가진 듯하다. 처음 만들어지고, 엄마가 열 달 동안 품고, 마지막에 나오기까지 한 번도 부모를 걱정하게 하지 않았다. 그간 난임과 유산 등으로 고통받는 부부들을 많이 봐 왔다. 즐겨 보던 ‘다큐멘터리 3일’의 난임센터 편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때 난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며 그 방송을 봤다. 이렇게 무탈하게 아이를 갖고 또 낳는 것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나는 무신론자지만 아이가 태어난 날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무사히 태어난 아이와 평온히 회복 중인 아내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감사하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전생에 못 이룬 사랑은 다음 생에 아빠와 딸로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운명이나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갓 태어난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유치하다고 넘겼던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믿지 않을 수 없다. 이 아이는 전생의 내게 한으로 남았던 아픈 사랑의 환생일 것이다. 그래서 다짐한다. 우리 이전 생에서 다 주지 못한 사랑을 이번 삶에서 다 줄 것이라고.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너를 가장 잘 이해하는 너의 편이 될 것이라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불태워 너의 인생에 꺼지지 않는 불빛을 비추어 줄 것이라고.
2021년 1월 26일, 나의 세상이 바뀐 날이다. 나는 이제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세상사 옳고 그름의 기준도 아이에게서 찾는다. 내 삶의 무게중심은 그렇게 아이에게로 옮겨 갔다.
아가야, 엄마와 아빠에게 무사히 와 줘서 고맙구나. 아무 재능이 없어도 좋고 아무 것도 되지 않아도 상관없단다.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만 자라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