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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an 17. 2021

좋아하는 좌파들의 명언

나는 좌파가 아니다. 그들의 이론을 공부하며 좌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긴 했다. 그런데 좌파는 사상보다 실천이 규정하는 존재들이더라. 계급적 대의보다는 나 개인의 삶을 우선하는 나는 그래서 좌파일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좌파를 지지하고 심지어 좋아한다. 그 이유는 정치적 당위성보다는 가치지향성에 있는 것 같다. 좌파 특유의 인간에 대한 연민, 냉철한 비판, 세상을 바라보는 섬세함, 저항할 줄 아는 용기가 좋다. 이건 어쩌면 부러움의 감정일 수도 있겠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들을 볼 때 드는 느낌과 비슷하다.


좌파들 중에 그런 가치관을 명징한 글로 풀어내는 이들이 많다. 하긴 좌파는 대중들을 각성시켜 투쟁에 나서게 꼬셔야 하니, 뛰어난 필력은 필수 역량일 것이다. 옛말에 ‘말 잘하면 빨갱이’라 했는데, 역시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없다. 유명한 좌파들의 빛나는 어록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문장들을 몇 개 소개해보고자 한다.




1. 안토니오 그람시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산다는 것은 지지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탈리아의 혁명가 그람시는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의 사상적 혁신은 좌파 내에서도 꽤나 평가가 갈린다. 그러나 문필가로서 그가 남긴 문장들은 진영을 뛰어넘어 널리 사랑받는다. 이 문장도 마찬가지다. 그람시는 1920년대 초 파시즘이 득세하던 시기에 이 문장을 썼다. 비슷한 시기 독일이 그랬듯, 이탈리아에서도 극심한 경제난 중에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이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며 대중들의 환심을 샀다. 그런데 그람시가 보기에 파시스트들의 부상은 열성 지지자 덕분이 아니었다. 침묵하는 다수의 무관심이 (설령 그들이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람시는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의 '입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시민들은 사회적 의사결정에 있어 옳고 그름에 대한 뚜렷한 판단 기준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특정 이념에 대해 ‘편드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념 논쟁을 사회적 병폐로 치부한다. 그러나 논쟁이 소모적으로 흐르는 것이 문제이지, 논쟁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민주주의는 이념 논쟁을 필요로 한다.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를 대변하는 각 이념들이 활발히 경쟁하고 의사결정의 대상이 될 때 민주주의는 올바로 작동한다.


이념 논쟁이 부재한 민주주의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특정 계급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수단이 된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무관심, 냉소주의, 무입장의 입장, 중도주의에 대한 맹신 등과 강한 연관을 갖는다. 무관심 또는 무입장은 어떤 당파도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배 계급 권력강하게 작용하는 현실 사회 안에서는, 그 또한 기존 체제를 승인하는 보수적 방향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다수결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꿰뚫는 촌철살인의 문장이다.




2. 체 게바라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갖자.”


대학 시절 체 게바라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위의 베레모 쓰고 수염과 장발 차림으로 강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미지 말이다. 이것이 찍힌 티셔츠, 배지, 가방 등을 당시 쉽게 볼 수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유행도 학생운동 정파에 따라 달랐다는 것이다.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거나 가방에 배지를 달고 다니는 학생들은 십중팔구 PD였다(NL들은 주로 하늘색 한반도가 그려진 촌스러운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 또 PD들은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체 게바라 평전」도 열심히들 읽었다. 나는 (NL이어서 그랬는지) 체 게바라에 대해 1도 몰랐지만, 독서 트렌드에는 민감했던지라 한번 읽어보았다. 하지만 재미가 정말 없었고, 지금은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중 유일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문구가 위의 저것이다. 하지만 체 게바라는 저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발언의 실재 여부와 무관하게 간지 넘치는 문장임에는 틀림없다. 이 문장은 좌파가 갖춰야 할 삶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좌파는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다. 이 문장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원대한 이상은 가슴에 품되, 현실의 문제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타도하려고 부르주아 경제학을 샅샅이 공부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파에도 이와 비슷한 명언을 남긴 사람이 있다.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으로 유명한 앨프리드 마셜이다.


20년 전 스쳐 지나간 저 문구가 다시 떠오른 것은, 엉뚱하게도 직장 생활의 어느 날이었다. 다들 그렇겠지만 회사를 10년 넘게 다니니 권태와 허무함이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 회사 생활을 할수록 나는 시스템 속 부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회사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저 소모될 수밖에 없다. 또 내가 더 이상 부품이기를 거부한다 해도, 시스템은 잠깐 영향받을 수는 있겠지만 결국 아무렇지 않게 작동할 것이다.


이는 내가 어쩌지 못하는 냉엄한 현실이다. 그래도 가슴속에 이상적 목표 하나는 남겨두기로 했다. 회사 시스템의 여러 부품들 중에서도, 나는 뚜렷한 개성을 가진 부품이 될 것이다. 다만 회사 밖에서는 나만의 철학과 사유를 가진 주체이고 싶다. 그래서 꾸준히 책을 읽고 글을 쓸 것이다. 브런치 작가도 이 목표를 위한 일 중의 하나다. 꼭 전업 작가만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회사원 작가더라도 글을 통해 누군가에게 지식과 깨달음을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3. 도쿄대 전공투


“연대를 구하되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힘 미치지 못해 쓰러짐은 개의치 않으나, 힘 다하지 않고 꺾이는 것은 거부한다.”


대학 시절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노트 속표지에 적어뒀던 문장이다. 사실 그때는 누가 한 말인지 몰랐고, 어떤 책에서 읽고 인상에 남아 기록해뒀었다. 한참 뒤에 이것이 1968~69년의 도쿄대 전공투를 상징하는 테제임을 알았다. 지금 상상하기 어렵지만, 한때 일본에도 과격한 반체제 학생운동이 존재했었다. 전공투는 반전평화주의와 반권위주의를 모토로 유럽‧미국에서 일어난 68운동의 일본 버전이었다. 현재 일본 문화‧예술계의 주요 인사들 중에 이 운동의 참여자들이 꽤 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뮤지션 사카모토 류이치가 대표적이다.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 댄스 댄스」 등의 작품에서 전공투를 모티브로 한 듯한 이야기를 종종 다룬다(그런데 그 논조가 상당히 시니컬한 경우가 많다). 류이치도 반우익적, 사회참여적 정치 성향과 작품 활동으로 유명하다.


1960년대 초 미일안보조약 반대 투쟁을 잇고, 1960년대 후반 세계적으로 퍼진 진보적 사회분위기에 따라 각 대학에서 전학공투회의라는 조직들이 만들어졌다. 초기 전공투의 투쟁은 등록금 인하나 학내 민주화 등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그러나 나중에는 대학해체를 주장하고 일본 공산당을 보수파라 규정할 정도로 급진화되다. 1968년 도쿄에서만 55개 대학이 바리케이드로 봉쇄될 지경이었는데, 도쿄대와 니혼대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특히 도쿄대 전공투는 이해 6월 학교의 상징인 야스다 강당을 점거해버렸다. 점거농성은 이듬해 1월 경찰기동대가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킬 때까지 이어졌다.


위 문구는 점거농성 당시 전공투 학생들이 야스다 강당 벽에 쓴 것이다. 다만 전공투의 창작은 아니고, 타니가와 간이라는 시인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알던 문장과 실제 원문은 한 글자가 달랐다. 원문은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였던 것이다. 내가 읽었던 책에는 ‘연대를 구하여’가 ‘연대를 구하되’라고 쓰여 있었다. 실제로 저렇게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비록 한 글자 차이지만 어감은 꽤 다르다. 원문은 ‘많은 이들의 힘이 모일 것을 믿으니, 지금 당장 고립되더라도 두렵지 않다’라는 의미로 읽힌다. 반면 내가 알고 있던 버전은 ‘많은 이들의 힘을 모으고자 노력하겠지만, 그들이 외면한다고 해서 신념을 굽히지 않겠다’로 읽힌다. 나는 여전히 원문보다는 내가 기억했던 문장이 더 마음에 든다. 그 시대를 살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전공투 세대의 지향도 후자의 해석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저 오타문장으로 계속 기억하려 한다.




4. 베르톨트 브레히트


“영웅이 없는 나라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가 불행하다.”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브레히트는 폭력적인 현실을 고발하는 섬세한 작품세계로 유명하다. 그가 쓴 희곡과 시들은 많은 좌파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차가운 사회과학 이론보다, 인간의 따뜻한 피가 흐르는 그의 작품들에 감화되어 학생운동에 입문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브레히트가 꼭 좌파들만의 뮤즈인 것은 아니다. 뉴스앵커였다가 보수정당의 기수로 변신한 배현진도 정치 참여의 변을 브레히트의 시에서 인용했던 적이 있다. 1980년대 말까지 브레히트의 대다수 작품들이 금서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다.


위 문장은 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에 나오는 안드레아와 갈릴레이의 대화 중 일부이다. 작중에서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는다. 갈릴레이의 제자들은 재판 결과를 기다리며, 스승이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진리를 수호하기를 바란다. 오후 다섯 시에 종이 울리면 갈릴레이가 죄를 인정하고 변절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후 다섯 시가 되었어도 종이 울리지 않자 제자 안드레아는 환희에 차서 고함을 지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결국 갈릴레이는 교회의 권위에 굴복한 것이다. 환멸을 느낀 안드레아는 재판에서 돌아온 갈릴레이를 찾아가 비난한다. 목숨을 걸고 진실을 지키려는 자가 없는 현실을 개탄하며, 안드레아는 이렇게 외친다. “영웅이 없는 불행한 이 나라여!” 그러자 갈릴레이는 안드레아의 말을 되돌려주며 오히려 한탄한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불행한 이 나라여!”


영웅은 초인적 능력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영웅이 될 수 없고, 한 사회에서 영웅이 나타날 확률은 한없이 낮다. 따라서 영웅을 바라는 마음은 일확천금을 기대하는 도박의 심리와 비슷하다. 움베르토 에코도 이 대사를 인용하며, ‘영웅에게 호소하는 것은 언제나 무능력의 증상을 드러내며 영웅이 있다는 믿음은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개인보다 시스템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만약 사회가 일상의 시스템이 아닌 아주 가끔 나타나는 초인적 능력자에 의해 유지된다면, 기나긴 혼란과 갈등의 시간을 보내야만 할 것이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위대한 개인의 능력만을 기대하는 사회는 행복할 수 없다. 일상의 시스템을 기반으로, 누가 통치하든 일정 수준 이상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더 좋은 사회인 것이다.


브레히트의 이 문장은 특히 한국정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유독 좌우를 막론하고 메시아주의적 정치관이 강하기 때문이다. 특정인에게 과도하게 감정이입해서 그가 모든 걸 다 해결해주리라 믿는 성향이 있다. 박정희, 노무현, 황우석,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등을 둘러싸고 드러나는 빠 문화는 그러한 성향의 반영이다. 따라서 시스템에 대한 이성적 모색보다는, 다음과 같은 격정적 레토릭만 난무한다. : “MB가 다 해주실 거야.” “박근혜는 나라 위해서만 살잖아.”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해.” 등등. 브레히트의 통찰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영웅을 갈구하고 그에게 열광을 몰빵하는 불행한 나라이다.




5. 김기문(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속 캐릭터)


“때로는 질문이 생길 수도 있을 거야. 과연 역사란 발전하는 것일까. 나와 이 역사는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왜 이 자리에 서 있을까. 그러나 후회를 해서는 안 돼. 자네도 나도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나? 우리 같은 사람이 있어서 역사는 발전하는 거야. 그럼 후회할 게 뭐 있어. 질문 같은 건 몇 십 년 뒤에 편안한 세대에 사는 후세들이 하면 되는 거야."


앞에 소개한 네 명은 실존 인물이지만, 이 을 한 사람은 가상의 인물이다. 정확히는 드라마 속 등장인물다. 국내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은 아닌데, 이제껏 인상적으로 본 몇 안 되는 드라마 중 하나가 ‘여명의 눈동자’다. 이 드라마를 처음 본 것은 30년 전인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년 뒤 재방송을 보면서 어렴풋이나마 이 드라마의 배경과 캐릭터들에 대해 알게 됐다. 작중 많은 명장면과 명대사가 등장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은 공산주의자 김기문(이정길 분)의 저 대사이다.


극중 김기문은 주인공 최대치(최재성 분)의 스승이자 투철한 공산주의자로 그려진다. ‘계급과 착취가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목표에 평생을 바쳤고 그 과정에서 죄 없는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이념지상주의자인 셈이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 하고, 혁명 과업의 후배 최대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 최대치는 김기문의 삶 막바지 순간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김기문은 단호하게 후회하지 않는다며 위와 같이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개인의 상황과 무관하게 언제나 도도하다. 그만큼 냉정하고 계산에 공짜가 없다. 격동을 일으킬 만큼의 에너지가 모이지 않고서는 변화의 낌새조차 느끼기 어렵다. 따라서 역사의 흐름에 맞서 개인이 갖는 고민과 질문은 어쩌면 무의미하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옳다고 믿는 바를 열심히 실천하는 게 전부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택했다. 쉽지 않았을 결정을 내리면서 그들도 김기문처럼 스스로를 다독였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편안한 세상은 어쩌면 그들의 선택 덕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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