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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Dec 24. 2020

직장 생활에서도 꿈을 꿀 수 있을까

해가 바뀌면 직장 생활 13년 차가 된다. 2009년 봄 시작한 모 연구소의 사업 계약직 자리가 내 첫 직장이었다. 꽤 오래 일했던 논술학원을 그만두고, 당장 생계가 급해서 선배의 도움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뭘 하는 연구소인지도 모른 채 어리버리 면접을 보고 일을 시작했다. 한글, 파워포인트, 엑셀, 뭐 하나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보던 사수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 어설펐던 시작이 이렇게 오랜 시간을 이을 줄은 몰랐다. 이후 두 번 이직했지만 지금 업무의 성격이 처음 그때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팀 막내에서 팀장으로 상황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시간의 힘은 위대하다. 나 같은 사회부적응자도 어엿한 직장인으로 만들어줬으니 말이다. 내가 다녔던 대학원 사회학과는 학과 이름과 달리 사회성 떨어지는 사람이 많았고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연구자나 프리랜서 외에는 없을 줄 알았다(근데 그것도 학문적 역량이나 전문성이 뛰어나야 할 수 있는 일이더라).


직장 생활 10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적응 안 되는 일들은 있다. 첫 번째는 '9 to 6'다. 극강의 야행성인 내게 아침 9시 출근은 예나 지금이나 힘들다. 대학원 연구실 생활과 논술학원 강사를 하면서 ‘오후 출근 – 새벽 퇴근’ 패턴이 몸에 익숙해져서 그런 듯하다. 나의 집중력은 심야에 최고조에 이른다. 자료를 읽든 글을 쓰든 한 밤중에 가장 일이 잘 된다. 할 수만 있다면 1시까지 출근해서 10시쯤 퇴근하고 싶다. 


두 번째는 인간의 다양성이다. 좁은 회사 안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인간 유형이 있음을 늘 깨닫는다. 마치 드래곤볼 캐릭터들이 파워업을 하면서 등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들을 보면 어릴 때 좋아했던 「수호지」 같은 군상극이 곧잘 떠오른다. 회사에 가득한 인간들은 108 두령이고 여기는 양산박인가 싶다. 좋게 말하면 개성 넘치고, 나쁘게 말하면 탑재한 개념의 거리가 안드로메다만큼 먼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이 지겨우면서도 새롭다. 


세 번째는 시스템의 힘이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상대와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일을 하는데, 어느새 일이 마무리되어 있는 놀라운 체험을 한다. 그만큼 회사라는 시스템의 힘이 강고해서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나와 같은 부품들은 회사 시스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부품 몇 개쯤 빠지거나 문제가 생겨도 시스템은 잘 돌아간다.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몇 달 부재했음에도 회사가 그럭저럭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직장 생활의 진리 하나는 깨우쳤다. “내가 한번 없어봐야 이것들이 정신 차리지”만큼 대단한 착각은 없다는 것이다. 직장인의 불행은 많은 경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직장 생활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을까. 혹은 직장 생활에서도 꿈을 꾸는 것이 가능할까. 주위를 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꿈을 갖고 회사를 다닌다. 재테크에 올인하는 어떤 사람들은 직장 생활을 종잣돈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으로 여긴다. 이들은 현대자본주의에서 자본소득이 항상 노동소득보다 우위에 있다는 토마 피케티의 지론에 충실하다. 그래서 회사의 노동소득을 부동산이나 주식 등 자본소득으로 전환하여 직장 생활을 떠나려 한다. 직장 생활의 목표가 직장 생활을 빨리 떠나는 것이 되는 희한한 논리다. 이런 분들은 대개 업무에는 1도 관심 없기 때문에 배울 것은 별로 없다. 대신 부동산과 주식 정보에는 아주 기민하다. 하지만 그 정보 좀 얻겠다고 이야기해보면, 내가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 


또 지위와 명예에 올인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분들은 존경스러울 만큼 일에 몰입하며, 대부분 사생활 따위는 포기한 경우가 많다. 흔히 말하는 ‘밤에 잘 때도 회사 꿈을 꾸는’ 분들이다. 이 분들에게는 업무적으로 배울 부분이 많다. 하지만 권력의 풍향계에도 그만큼 민감해서, 가까이 있으면 피곤해진다. 이 분들은 상사들이 하는 무언의 행동에서도 메시지를 읽어내는 해석학의 본좌들이다. 극단적인 이 두 부류에 속하지 않는 중간지대 사람들은 대개 별다른 꿈이 없는 경우이다. 즉 적당히 돈 밝히고, 적당히 명예욕 있고, 적당히 일하는 분들이다. 아마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나는 셋 중 어떤 부류에도 해당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일단 직장 생활에서 꿈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생활이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테크나 명예에 관심이 가지도 않는다. 나처럼 셈법에 약하고 배짱이 없는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대 부를 축적할 수 없음을 스스로 잘 안다. 명함에 박히는 00장과 같은 지위에도 별 관심이 없다. 그것을 얻기 위해 회사 이상으로 소중한 내 사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능력에 대한 인정은 받고 싶다. 한 마디로 ‘업무 능력은 최고이면서, 사내 정치와는 무관한 사람’으로 인식되기를 바란다. 현실주의자인 나는 시스템 속 부품이라는 내 상황을 아주 잘 안다. 하지만 그래도 여타의 몰개성적 부품과는 다른, 나만의 철학을 가진 부품이었으면 한다. 요컨대 조직의 일부이지만 개인으로서의 가치도 잃지 않고 싶다. 그 밸런스를 잡아나가는 것이 내 직장 생활의 과제이다. 


그러려면 업무에 대한 철학과 능력을 갖춰야 한다. 마치 장인과 같은, 그 분야에서 누구도 따라올 생각조차 못하는 이론적 깊이와 실무적 역량 말이다. 나는 그렇게 내 분야의 철학과 능력을 가진 최강의 실무자를 꿈꾼다. 회사에서 정년의 순간까지 어떤 신입과 겨뤄도 지지 않는 실무자가 되고 싶다. 이는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에 나오는 다음의 문구와 비슷할 것이다.


나는 학생 때부터 공부를 하기 싫어해서 성적이 그다지 신통치 않았던 편이지만, 그래도 ‘영문 일역’ 참고서를 읽는 것만은 예외적으로 좋아했다. ‘영문 일역’ 참고서의 어떤 점이 그렇게 재미있느냐 하면, 거기에는 예문이 잔뜩 실려 있기 때문이다...(중략)...

나는 그 무렵에 외운 예문을 지금도 몇 가지 기억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서머셋 몸의 ‘어느 면도사에게나 철학은 있다”고 하는 말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 앞 뒤 문장이 상당히 긴데, 그건 잊어버렸다. 요컨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매일 계속하다 보면, 거기에서 자연히 철학이 생겨난다고 하는 취지의 문장이다. 여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어떤 립스틱에도 철학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고교시절에 서머셋 몸의 이 문장을 읽고, ‘으음, 인생이란 그런 거로구나’하고 상당히 순진하게 감동했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술집을 경영하면서도, ‘어떤 온더록에도 철학은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8년 간 매일 온더록을 만들었다.

그런데 온더록에 정말로 철학이 있느냐 하면, 대답은 틀림없이 ‘있다’이다. 물론 이 세상에는 맛있는 온더록과 맛없는 온더록이 있겠지만, 맛있는 쪽의 온더록에는 확실히 철학이 있다. 온더록이란 얼음 위에 위스키를 따르는 것뿐이지 않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얼음을 쪼개는 방법 하나로도 온더록의 품위와 맛이 확 달라지는 것이다. 얼음도 커다란 얼음과 작은 얼음의 녹는 방식이 다르다. 커다란 얼음만 사용하면 투박해서 모양이 보기 싫고, 그렇다고 해서 작은 얼음이 많으면 금세 물이 많아진다. 그래서 크고 작은 얼음을 잘 배합한 뒤에 거기에 위스키를 따라야 한다. 그러면 위스키가 잔 속에서 호박색의 조그만 소용돌이를 그리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그런 식으로 몸에 익힌 조그만 철학은 나름대로 나중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무라카미 하루키(1996),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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