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의 승리』, 그 이야기를 정리하며

1월 20일 온라인 북토크 요약

by 배대웅

1월 20일 아호파파B 작가님의 기획과 아름다운이란 작가님의 사회로 『연구소의 승리』 온라인 북토크를 진행했습니다. 연구소와 과학이라는 낯선 주제였음에도 50여 명의 독자들이 참석해 주셨어요. 행사를 준비해 주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북토크에서 한 이야기들을 제 브런치에도 정리해 봅니다. 함께한 분들께는 그날의 대화를 다시 꺼내보는 기록이 되길, 참여하지 못한 분들께는 『연구소의 승리』의 문제의식을 가볍게 맛보는 길잡이가 되길 바랍니다.




1. 작가님은 사회학자가 될 결심으로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취업이 녹록지 않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선배의 소개로 정부산하 연구소에서 계약직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언론사에 합격했지만 하루 만에 사표를 던지고 다시 연구소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15년이 넘는 시간을 연구소와 함께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가님이 현재 이 자리에 있기까지의 과정과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말씀 부탁드릴게요.


“하루 만에 사표를 던졌다”라고 하면 제가 뭔가 불의에 항거하고 나온 사람처럼 들리는데요. 그런 건 아니고요. 일단 사회학과 대학원에는 학문을 하려고 가긴 했어요. 그러니까 박사학위까지 받고 연구자로서 살 생각이었는데요. 석사 과정을 해보니까 저는 학문을 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어요. 대학원 수업은 대부분 원서로 하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그걸 쭉쭉 읽고 발표도 잘하는데, 저는 읽는 것부터 너무 힘들었어요. 학자를 할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더라고요.

그래서 취업으로 급선회했고, 사회과학 전공에다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해서 언론사 시험부터 준비했습니다. 실제로 모 경제신문사에 합격했는데, 딱 하루 다니고 나왔어요. 신입직원 교육을 받는데 기자는 글 쓰는 것보다는 광고 따오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때만 해도 순수해서 그 말에 굉장히 실망했고, 마침 비슷한 시기 시험을 봤던 연구소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한 상황이어서, 바로 그만뒀어요.

그 결과 지금은 16년 차 연구소 행정직원으로서 과학기술 정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자가 연구소의 주인공이라면, 저 같은 행정직원은 그들을 돕는 조연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만 ‘행정’이라고 하면 문서 처리로만 생각하기 쉬운데요. 제가 하는 일은 그것보다는 좀 더 복잡합니다. 과학자들이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연구가 가능해지는 제도와 자원을 설계하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연구소의 중장기 발전전략을 만들고, 연구비를 대주는 정부의 평가에 대응하고, 해외 연구소의 운영 시스템을 한국 현실에 맞게 가져오는 일 등을 합니다.

그렇게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떤 철학이 생겼어요. 혁신은 개인의 재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걸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만드는 시스템이 있다는 것. 『연구소의 승리』는 결국 그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 책을 쓰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 같아요. 2020년부터 브런치에 연구소에 관련한 글을 꾸준히 발행해 오셨는데요. 출판사에서 의뢰를 받기 전부터 책으로 출간한 계획이 있으셨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출판사에서 제안을 받기 전에는 책으로 낼 계획이 전혀 없었어요. 무엇보다 이런 글이 책이 될 수 있다는 기대 자체를 안 했어요. 이 책의 발단이 된 브런치 글을 2020년 12월에 3편에 걸쳐 발행했는데요. 당시에 아무도 안 읽는 글이었어요. 라이킷이 10도 안 됐고, 댓글은 아예 없었으니까요.

그러다가 2023년 7월에 출판사에서 이 글을 우연히 보고 출간 제의를 해왔어요. 대표님이 원래 연구소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었는데, 막상 책으로 만들려고 하니 적당한 필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일단 과학을 알아야 하고, 연구소를 직접 겪어본 경험도 있어야 하고, 그걸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하니까요. 아마 제가 연구소에서 오래 일한 실무자라는 점, 그리고 그걸 브런치 글로 쓴 점이 겹치면서 “이거다”라고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다만 그때는 제가 한창 『최소한의 과학 공부』를 쓸 때라 바로 시작은 못 했구요. 『최소한의 과학 공부』를 출간한 다음인 2024년 3월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집필에만 1년 반 정도 걸린 셈이네요.


3.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시면서 브런치 출판 프로젝트 입상이나 출판사 투고 없이도 2권의 책을 냈고, 또 2권을 낼 예정으로 알고 있어요. 출간을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비결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네, 저는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입상이나 출판사 투고를 거치지 않았어요. 제가 브런치에 발행한 글을 보고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을 해주셔서, 모두 네 권의 책을 내게 됐습니다. 물론 운이 좋았습니다. 출판사가 찾던 주제와 제 글이 마침 딱 맞아떨어진 거니까요. 그런데 운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왜냐하면 운은 한 번은 작용할 수 있어도, 반복되기는 어렵거든요. 돌이켜 보면 제가 출간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글은 무조건 잘 써야 합니다. 정말 단순하고 당연한 이야기죠. 그런데 이걸 제가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브런치에서 가끔 출간을 ‘기획’의 문제로 오해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에요. 출간 계획서를 잘 쓰면 된다, 콘셉트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면 된다, 이런 식이죠. 실제로 브런치에 그런 류의 코칭 글들도 많고요. 물론 기획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문장보다 기획에 더 치중하는 건 주객전도라고 생각해요.

출판사 편집자가 작가를 기용할 때 여러 가지를 보지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한 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최소 300페이지 분량의 책을 끝까지, 일정한 품질로 써낼 수 있는가.” 그걸 판단하는 가장 정확한 기준은 기획이나 아이디어가 아니라, 글의 완성도예요. 즉 도입-전개-결말의 구조를 갖추고, 문장이 흔들리지 않고, 논지가 무너지지 않고, 무엇보다 독자가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본적인 글쓰기가 안 되는 상태에서 출간 계획서만 그럴듯하게 써봐야, 출판사는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아요. 그건 편집자를 만만하게 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둘째는 자기만의 주제가 있어야 합니다. 이건 더 냉정한 이야기인데요. 출판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검증되지 않은 신인 작가를 굳이 써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잘 팔리는 작가들의 풀도 넓고, 유명인도 많고, 쓸 사람은 늘 넘쳐나요. 그런데도 출판사가 신인에게 연락한다는 건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이 주제는 이 사람이 아니면 못 쓴다”라는 판단이 설 때에요.

그러니까 출간이 목표라면, 내가 정말 좋아해서 깊이 파고들 수 있거나, 혹은 오랫동안 몸으로 겪어서 직업적 전문성이 쌓인 주제를 잡아야 합니다. 제 책인 『최소한의 과학 공부』나 『연구소의 승리』도 그 프레임에서 나온 책이에요. 문과생이 과학 글을 쓴다는 희소성, 그리고 연구소 실무 경험이 결합되면서, 출판사가 “아, 이건 이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얘기다”라고 판단한 거죠.

반대로 브런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이나 자기 계발 에세이는요. 취미로 쓰거나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출간을 목표로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왜냐하면 그 시장은 너무 레드오션이에요. 에세이는 누구나 쓸 수 있고, 서점에 가보면 비슷한 책이 정말 많이 깔려 있거든요. 그래서 출판사는 에세이를 낸다면 이미 검증된 인기 작가나 유명세를 이용할 수 있는 셀럽에게 우선 의뢰합니다. 저도 만약 브런치에서 평범한 일상 에세이를 썼다면, 지금처럼 출간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책 한 권을 버틸 만큼 글을 잘 써라. 둘째, 출판사가 ‘이 사람만 가능하다’라고 느낄 자기 주제를 가져라. 저는 이 두 가지가 출간의 가장 현실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4. 책의 첫 시작이 1887년 독일 제국물리기술연구소인데요. 1911년 카이저빌헬름협회의 발족으로 과학자들이 오직 연구에만 집중하게 되었잖아요. 초반부에 “국가는 과학을 지원했고, 과학은 국가를 움직였다. 과학이 국가와 손잡는 순간 역사의 흐름을 달라졌다”라는 구절이 임팩트가 굉장하던데요. 왜 이런 흐름으로 변화되었는지 쉽게 설명해 주시겠어요?


네, 그 구절이 사실 책 전체의 출발점이에요. 과학은 원래 개인의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국가 프로젝트로 격상됩니다. 그러면서 역사도 달라져요. 17세기 태동한 근대 과학은 지금처럼 거창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생업은 따로 있으면서, 남는 시간에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별을 관찰하고, 전기나 자석 같은 걸 가지고 놀았죠. 말하자면 퇴근 후 취미로 하는 연구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마추어들의 취미가 어느 순간 국가 입장에서 “이거 장난이 아니네?”가 됩니다. 왜냐하면 과학 발전으로 나타난 결과물들이 어마어마했거든요. 증기기관이 나오면 공장이 대규모화‧자동화되고, 화학이 발전하면 무기의 파괴력이 커지고, 전기가 발명되면 산업 전체가 업그레이드됩니다. 그러니까 국가가 깨닫는 거예요. “부국강병이 인구나 영토가 아니라, 지식 생산 능력에서 나온다.” 이게 굉장히 큰 전환입니다.

이렇게 과학이 중요해지니까, 국가는 이걸 개인의 취미에만 맡겨둘 수가 없었어요. 생산량도 떨어지고 속도도 느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면 국가는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 과학자들에게 월급을 주자.” “실험실을 지어주자.” “연구비를 주자.” “그리고 연구만 하게 만들자.” 이게 바로 연구소 시스템의 핵심이에요. 즉 연구소란 ‘과학 지식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공장’입니다. 그걸 가장 먼저 모델로 정착시킨 나라가 독일입니다. 1887년 제국물리기술연구소, 1911년 카이저빌헬름협회가 만들어지면서 과학자들은 연구만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됩니다. 이때부터 과학은 개인의 재능이 아니라, 국가가 설계한 시스템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시스템이 어디까지 폭주할 수 있느냐를 보여주는 사례가 로스앨러모스연구소와 맨해튼 계획입니다. 맨해튼 계획 하면 사람들은 원자폭탄만 떠올리는데, 저는 오히려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원자폭탄은 전쟁을 끝내는 무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재편하는 힘이었고, 미국이 세계 패권을 거머쥐는 결정적 계기였거든요. 그리고 원자력이라는 새로운 에너지는 전후 거대한 산업생산력을 뒷받침했죠. 또 하나 중요한 건, 맨해튼 계획에 투입됐던 시설과 사람이 전쟁이 끝나고 흩어져 버린 게 아니라는 점이에요. 그 인프라가 국립연구소로 전환되면서, 이후에도 미국의 혁신 시스템을 계속 굴리는 기반이 됩니다. 즉, 전쟁은 끝났는데 과학-국가 시스템은 살아남아서 계속 성장한 거죠.

NASA의 아폴로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달착륙은 인류사의 상징적인 이벤트지만, 사실 그 프로젝트의 진짜 효과는 ‘달’이 아니라 ‘지구’에서 터졌어요. 우주선을 만들려고 국가가 돈을 쏟아붓고, 연구소와 기업이 한 덩어리로 움직이다 보니, 그 과정에서 개발된 기술들이 민간 산업으로 퍼집니다. 집적회로나 LED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고요. 지금의 일상 기술이 그때 상용화된 게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건 단순합니다. 과학의 힘은 과학 자체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과학이 국가와 결합할 때 인류사적 규모의 혁신이 가능해집니다. 연구소는 그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이었고요.


5. 독일 카이저빌헬름협회 초대회장 아돌프 하르나크의 경영 원칙이 너무 멋있었어요. “국가의 지원은 받지만, 운영에는 간섭받지 않겠다.” 이 하르나크 원칙이 현재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의 경영철학도 그리고 그걸 받아들인 독일 정부도 너무 멋있던데요. 이에 대한 보충 설명 부탁드립니다.


맞아요. 하르나크 원칙은 지금 봐도 놀랍죠. 어떻게 보면 독일 같은 선진국이 대단한 이유이기도 한 것 같아요. 핵심은 간단합니다. "국가는 돈을 대되, 연구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 원칙이 카이저빌헬름협회에서 시작돼서, 지금의 막스플랑크협회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두 가지예요. 첫째, 왜 하르나크가 이런 원칙을 내세웠느냐. 둘째, 왜 제국주의 독일 정부가 그걸 받아들였느냐.

먼저 하르나크는 과학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과학은 자연현상의 본질을 밝히는 학문이지만, 현실에서는 국가의 경쟁력을 키울 수도 있다, 이게 기본 전제입니다. 하르나크는 이 점을 내세워서 국가의 재정 지원을 적극적으로 끌어옵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도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국가와 관료가 과학을 직접 다루면? 그 순간 과학은 망한다.” 왜냐하면 과학을 제일 모르는 문외한들이 연구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 셈이니까요.

여기서 독일 정부가 왜 이걸 받아들였냐가 핵심인데, 저는 두 가지 이유가 겹쳤다고 생각해요.

첫째, 독일의 이상주의적 학문 전통이에요. 독일은 오래전부터 ‘학문은 진리 탐구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라는 관념이 강했습니다. 대학도 그런 전통 위에서 운영됐고요. 오늘날 독립적 연구능력을 갖춘 연구자에게 수여하는 박사학위 제도, 연구와 교육을 혼합하는 연구중심대학의 기원도 바로 이 독일적 전통에 있죠. 그러니까 국가가 과학을 이용하더라도, 과학을 너무 노골적으로 ‘쓸모’만으로 재단하는 건 오히려 독일 전통의 엘리트 문화와 충돌하는 면이 있었어요.

둘째, 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제국주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국가는 조급해지는데, 사실 조급한 국가는 과학을 못 씁니다. “내년에 뭐가 나오냐” “올해 당장 뭘 뽑아내라” 이런 식으로 과학을 닦달하면, 진짜 중요한 발견은 되려 사라져요. 독일은 그걸 알았던 겁니다. ‘다른 나라를 과학으로 이기려면, 과학자에게 권한을 줘야 한다’라는 역설이죠.

이러한 하르나크 원칙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1917년에 카이저빌헬름협회 산하 물리학연구소 소장 후보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추천됩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으로 과학의 지각변동을 일으킨, 아주 핫한 과학자였죠. 그런데 이걸 승인해야 하는 독일 재무장관이 이랬어요. “상대성이론이 독일 산업에 뭐가 도움이 되는데?” 이 질문은 사실 관료 입장에선 자연스러운 거죠. 그런데 상대성이론은 원래 그런 종류의 연구가 아니잖아요. 어떤 제품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니라, 자연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을 바꾸는 이론입니다. 당장 산업에 쓸 수 있을 리가 없죠.

그런데 독일 정부는 결국 승인합니다. 왜냐하면 원칙이 있었거든요. “우리가 돈은 대지만, 어떤 연구를 할지는 과학자가 정한다.” 여기서 하르나크 원칙의 진짜 힘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이 원칙은 단지 과학자를 자유롭게 해 줬다는 수준이 아니에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과학자를 정치적 압력과 단기성과의 강박으로부터 지켜주는 방탄복과 같았어요. 덕분에 아인슈타인처럼 몇 세대를 앞서 나가는 과학자가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축적이 결국 독일 과학의 경쟁력이 됩니다.

그래서 이 원칙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국가가 과학을 이용하려면, 먼저 과학을 믿어야 한다.” 돈을 줬다는 이유로 통제하려 들면 과학은 도망가지만, 믿고 맡기면 과학은 시간이 지나 국가를 움직이는 힘이 됩니다.


6. 최초의 국가 연구소가 설립되었던 시기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전기 싸움이 시작되었잖아요. 미국에 에디슨이 있었다면 영국에는 맥스웰, 그리고 독일에는 지멘스가 있었지요. 지멘스는 가전제품회사로도 이름이 익숙하실 텐데요. 영국, 미국과의 전기패권 전쟁에서 독일의 지멘스가 전기산업을 지원하는 국가 연구소를 만들자고 주장하면서 거액의 자금과 땅까지 기부를 하는 것을 보면서 진정한 경영자의 마인드를 볼 수 있었어요. 국가의 위신을 높이고 민족 간의 경제적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애국심이라고 해야 할까요? 되게 멋있게 느껴졌는데요. 이 애국심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지멘스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거예요. 일단 가전회사로 유명하지요. 축구 좋아하시는 분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실 겁니다. 전성기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에 ‘siemens’가 떡 하니 박혀 있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기업 이름이 아니라, 그 기업을 만든 사람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었느냐예요. 창업자인 베르너 폰 지멘스는 동시에 세 가지 정체성을 가졌던 사람이었어요. 물리학자, 발명가, 사업가. 그러니까 기술이 뭔지 알고, 그 기술을 제품으로 바꾸는 법도 알고, 그걸 산업으로 키우는 감각까지 갖춘 사람이었던 거죠.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기업가 이미지는 “돈 되는 것만 한다”잖아요. 그런데 지멘스는 그런 졸부가 아니었어요. 영국과 미국이 전기로 패권을 잡아가던 시기에, 그는 기업이 혼자 잘 되는 것보다 더 큰 판을 보려고 했습니다. 바로 국가 전체의 전기산업 생태계를 키워야 한다는 판단이죠. 그래서 지멘스가 한 말은 굉장히 거창합니다. “독일이 전기 패권 경쟁에서 이기려면, 국가 차원의 연구소가 필요하다.” 그래서 본인이 돈도 내고, 땅도 내고 그랬죠. 그저 후원의 수준이 아니라, 연구소 설립 과정 자체를 주도한 겁니다.

이걸 단순히 애국심으로만 보면 평범한 미담에만 머무를 텐데요. 저는 지멘스의 행동이 감정이 아니라 전략이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전기는 개인 발명가의 능력만으로 이길 수 있는 산업이 아니거든요. 전기는 산업 전체를 갈아엎는 기술이라서, 표준, 측정, 안전, 송전망 같은 인프라가 동시에 필요합니다. 즉, 기업 하나가 아무리 잘해도 국가 단위의 시스템이 없으면 영국·미국과 경쟁이 안 돼요. 지멘스는 그걸 너무 잘 알았던 거죠.

그렇다면 질문에서 말한 ‘애국심의 원천’은 어디냐면요. 저는 지멘스 개인의 인품 탓도 있지만, 더 크게는 19세기 독일 사회가 공유한 열망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한 뒤에, “강한 국가를 만들자”라는 민족의식이 커지면서 근대화에 착수합니다. 그것을 정치가와 군인뿐만 아니라 지식인과 엘리트도 공유했어요. 대학을 개혁하고, 학문을 국가 건설의 기반으로 삼고, 과학기술을 산업 경쟁력으로 연결하려는 흐름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지멘스의 기부는 단지 좋은 마음이 아니라, 그 시대 독일 지식인들의 신념을 대표하는 행동입니다. 국가의 위신을 높이고, 민족 간 경제적 투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에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그 투자는 개인에게 맡길 게 아니라, 연구소와 같은 제도로 운영해야 한다. 이러한 비전이 20세기 연구소 시스템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7. 과학은 정말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독일의 프리츠 하버가 인공 질소비료 대량생산법을 발견해서 인류의 식량난을 해결하고 세계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데 기여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가스를 만들었잖아요. 본인은 그것이 전쟁을 단축해서 수백만 명의 학살을 막았으니 오히려 인도주의적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을 보면서 과학은 정말 양날의 검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과학사에서 이런 사례가 또 있을까요?


프리츠 하버라는 이름을 잘 모르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위대한 과학자라고 하면 아이작 뉴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찰스 다윈,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같은 이름들이 유명하고, 하버는 그보다는 인지도가 떨어지죠. 그런데 ‘인류 삶의 질 향상’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하버의 업적은 그들보다 결코 떨어지지 않아요. 인공 질소비료를 대량 생산해서 20세기까지 인류를 괴롭히던 식량 부족, 기아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거든요. 경제학의 아버지 중 하나인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에 나오는 유명한 법칙이 있잖아요.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이른바 맬서스 트랩이죠. 맬서스는 이 법칙에 따라서 인류가 생존하려면 저소득층의 인구를 인위적으로 줄여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맬서스가 냉혈한이어서라기보다는, 당시의 식량 생산량이 실제로 매우 부족해서 그런 결론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근데 이 트랩을 하버가 과학기술의 힘으로 깨버린 거예요. 그러니 위대한 과학자가 맞죠. 하지만 그 기술을 독가스라는 대량살상무기를 만드는 데도 썼기 때문에, 질문하신 것처럼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발 더 들어가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과학이 양날의 검이 되는 건 어떤 과학자가 악해서가 아니라, 과학이 작동하는 구조 때문입니다. 과학의 역사는 사실 전쟁의 역사와 분리해서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 연구소가 있었고요. 왜냐하면 국가 연구소라는 제도 자체가 애초에 부국강병을 목표로 도입됐기 때문이에요. 거기서 한 단계만 더 나아가면 전쟁이죠. 국가가 연구소에 돈을 대는 순간, 연구소는 “우리가 하고 싶은 연구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특히 세계대전 같은 총력전 시대에는 더더욱요.

하버는 그래서 상징적입니다. 그가 만든 건 ‘질소비료’라는 문명을 지탱하는 인프라였고, 동시에 ‘화학무기’라는 파괴의 기술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하버가 그걸 악행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본인은 오히려 “전쟁을 빨리 끝내서 더 많은 생명을 구한다”는 식으로 정당화했습니다. 여기서 과학의 첫 번째 아이러니가 나옵니다. 파괴의 언어가 인도주의로 번역될 수 있다.

이런 사례는 과학사에서 자주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로켓 기술을 생각해 보면요. 그 시작은 전쟁 무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런던을 폭격한 독일군의 V-2가 대표적이죠. 그런데 전쟁이 끝나면 그 기술이 사람을 싣고 달로 갑니다. V-2 기술을 개발한 베르너 폰 브라운이 미국에 투항해서 NASA를 이끌게 되거든요. 그렇게 나온 기술이 아폴로 11호를 달로 데려간 새턴 5 로켓이죠. 그러니까 같은 기술이 “도시를 폭격하던 힘”에서 “우주를 탐사하는 힘”으로 바뀌는 겁니다. 이게 두 번째 아이러니예요. 파괴 기술이 곧바로 진보의 엔진이 된다.

또 하나, 원자력도 꼽을 수 있지요. 원자폭탄은 인류가 스스로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발명인데요. 동시에 원자력은 전후 1950년대 세계자본주의의 폭발적 성장을 뒷받침하는 에너지가 됩니다. 여기서 세 번째 아이러니가 나옵니다. 문명을 떠받치는 에너지가, 문명을 끝장낼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이런 아이러니의 공통된 배경에는 “전쟁이 과학을 동원하고 이용했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전쟁은 과학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는 조건이 되기도 했습니다. 총력전은 국가가 돈과 사람과 시설을 한 곳에 몰아주는 상황이기 때문에, 연구의 규모와 조직, 기술 수준이 급격히 확장되거든요. 우리가 오늘 떠올리는 거대한 현대 연구소의 모습도 사실은 이 세계대전 시기에 함께 형성됩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과학은 전쟁 동원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수혜자이기도 했다. 이건 과학이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 근대 국가 시스템 속에서 필연적으로 아이러니를 만들어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8. 이 책을 통해서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에 눈이 멀어 얼마나 바보 같고 비이성적이었는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어요. 유대인을 모든 국가직에서 배제하게 되면서 천재적인 과학자들이 미국을 선택했지요. 대표적으로 아인슈타인이 있을 텐데요. 재미있는 일화가 소개되었더라구요. 미국을 방문한 아인슈타인이 찰리 채플린을 만나서 이렇게 얘기하죠.

“당신은 참 위대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당신을 이해하니까요.”

그랬더니 채플린이

“박사님이 더 위대해요. 아무도 박사님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모두가 박사님을 존경하잖아요.”

너무 재미있으면서도 공감이 되는 대화였어요. 과학에서 최전성기를 달리던 독일 과학이 몰락하고, 패권이 독일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흥미진진한 과정을 다시 얘기해 주세요.


이 질문이 재미있는 이유가요. 과학 패권이라는 게 논문 숫자나 연구비 규모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 때로는 정치가 얼마나 멍청한 선택을 했는가로 결정되기도 한다는 거예요.

지금은 미국이 세계 과학의 중심이지만,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상황이 완전히 달랐어요. 그때 과학의 수도는 미국이 아니라 독일, 특히 베를린이었습니다. 요즘은 과학 논문이 영어로 출판되지만, 그때는 독일어로 나왔어요.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특수상대성이론 논문도 독일어로 독일 과학 저널에 실렸지요. 실제로 20세기 과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람들 이름을 쭉 말해보면… 빌헬름 뢴트겐, 막스 플랑크, 막스 보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거의 독일이 ‘지구대표팀’을 갖고 있던 시절입니다.

반대로 미국은 변방에 가까웠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이걸 잘 보여주는 장면이 나와요. 젊은 오펜하이머가 독일 괴팅겐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가려고 할 때, 하이젠베르크가 이러거든요. “미국은 양자역학이 대접 못 받는 곳 아니냐?” 그러니까 그 당시 독일 과학자 눈에는 미국이 그 정도였던 겁니다. “야 거기 가서 연구가 되겠냐” 이런 느낌이죠.

그런데 이 판을 완전히 뒤집은 사건이 바로 나치의 집권입니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모든 공적 영역에서 배제하기 시작하면서, 독일은 자기 손으로 ‘과학 지구대표팀’을 해체해 버렸어요. 그 결과 천재들이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향합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존 폰 노이만, 한스 베테, 에드워드 텔러, 레오 실라르드 같은 사람들이요. 엔리코 페르미는 본인이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아내가 유대인이어서 결국 떠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더 좋은 직장을 찾아 나선 게 아니었어요. 쫓겨나듯 떠났고, 나라를 잃었다는 감정도 있었고, 어떤 의미에선 복수심도 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복수심이 바로 맨해튼 계획에서 폭발하게 되죠. 유대인 과학자들이 맨해튼 계획을 성공시키는 핵심 자원이 되거든요. 아인슈타인과 실라르드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계획을 착수시켰고, 오펜하이머가 계획을 총괄했고, 그 밑에서 베테, 폰 노이만, 텔러, 페르미 같은 사람들이 폭탄을 개발했죠.

여기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드러납니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내쫓아서 독일을 순수하게 만들겠다고 했는데, 그 결과 미국이 인재를 대거 흡수했고, 그들이 바로 독일에 패배를 안겨준 겁니다. 이건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죠. 인재가 국력을 얼마나 좌우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예요.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은 군사적으로 승리했을 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패권국이 됩니다. 그 상징적인 공간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같은 곳이죠. 아인슈타인, 폰 노이만 같은 망명자들이 모여서, 미국의 과학을 세계 최정상으로 끌어올리는 거점이 됐죠.

그래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과학 패권의 이동은, 미국이 원래 잘해서라기보다, 독일이 스스로 너무 큰 실수를 했고, 미국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1940년대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유효한 교훈입니다. 과학기술 경쟁에서 승패를 가르는 건, 돈도 중요하지만, 결국 뛰어난 인재를 어디가 받아들이고, 어디는 밀어내는가입니다.


9. 저는 가끔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그 어려운 양자역학의 출발점을 제시한 막스 플랑크가 음악 할까? 물리 할까? 고민했다고 하죠. 만약 그가 음악을 선택했다면 음악의 판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더라구요. 하나 잘하기도 힘든데 과학자들은 둘 이상의 분야에서 뛰어남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화가이면서 과학자였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음악이 없었다면 물리학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작가님 주변에는 과학자들이 많을 것 같은데. 과학자들을 보면 정말 그런 천재성이 보이나요?


막스 플랑크가 물리학을 선택하는 과정과 그 결과는 과학사에서도 참 흥미로운 장면입니다. 말씀해 주신 것처럼 플랑크가 젊었을 때 음악을 할지 물리학을 할지 고민했어요. 플랑크는 이 문제로 진로 상담까지 받았어요. 뮌헨대학의 저명한 물리학자 필립 폰 욜리에게 가서 물었더니, 욜리가 진지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물리학은 이제 발견할 거 다 발견했다. 뭘 더 새로 할 게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엄청난 자만심으로 들리죠. 그런데 당시엔 그게 진지한 상식이었습니다. 뉴턴 역학, 맥스웰 전자기학으로 자연현상의 대부분이 설명된다고 믿었고, 이로써 물리학이 사실상 완성되었다는 합의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플랑크는 그 조언을 듣고도 물리학을 택합니다. 그리고 십수 년 뒤인 1900년에 “물리학은 끝났다”라는 말을 정면으로 뒤집는 발견을 해버리죠. 그게 바로 양자 가설, 오늘날 양자역학의 출발점입니다. 300년 넘게 이어지던 고전물리학이 미시세계 앞에서 무너지는 최초의 균열이 플랑크로부터 시작된 겁니다.

이렇게 물리학에 혁명을 가져온 플랑크가 천재형 과학자는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엄청나게 성실하고, 이론적 엄밀함을 극한으로 추구하는 노력파에 가까웠지요. 그리고 그는 혁명과는 거리가 먼 보수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귀족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어서 민주주의마저 무식한 평민들이 권력을 갖는 한심한 체제라고 여겼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고전물리학을 무너뜨리려고 한 게 아니라, 오히려 지키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논리와 관측값이 계속 어긋나니까, 그걸 끝까지 밀어붙이다 보니 '양자'라는 고전물리학과는 배치되는 결론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의도가 혁명적이었던 게 아니라, 사고방식이 정직했던 겁니다.

여기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면, “과학자들은 정말 천재성이 보이냐”인데요. 제가 연구소에서 만난 과학자들을 보면, 물론 어떤 분들은 정말 기본 사양이 다릅니다. 이해하는 속도, 문제를 바라보는 각도, 해법을 찾아내는 직관 같은 게요. 그런데 그보다 더 자주 느끼는 건, 천재성보다도 집요함과 지구력이에요. 남들이 포기하는 지점에서 계속 붙잡고 있는 능력, 그리고 정확함에 대한 강박 같은 것들이요.

결정적으로, 현대과학에서는 한 명의 천재가 세상을 뒤집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연구 주제도, 분야도, 장비도, 데이터도, 다 너무 커졌거든요. 그래서 중요한 건 천재 여부가 아닙니다. 이제 과학의 성공은 다양한 사람들과 협력해서 성과를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있어요.

제가 『연구소의 승리』에서 연구소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도 그거예요. 과학사는 영웅 서사로 쓰이기 쉬운데, 실제 혁신은 집단의 노력과 제도의 지원 위에서 만들어집니다. 연구소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대가 만든 발명품이라고 볼 수 있죠.


10. 이제 일본과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일본은 1917년 최초의 국가 연구소 이화학연구소를 설립했어요. 이곳에서 일본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노벨물리학상이 나왔는데요. 뛰어난 성과를 위해서는 협력도 필요하지만 때론 적당한 긴장 관계, 경쟁, 질투가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유카와 히데키 그리고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어떤 관계였나요?


과학에서 협력이 중요한 건 분명하지만, 또 그것만으로 굴러가지는 않죠. 실제로는 그 안에 적당한 긴장과 경쟁이 섞입니다. 일본의 유카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 관계가 딱 그런 사례입니다.

일단 두 사람은 일본 과학에서 상징성이 엄청나게 큽니다. 유카와 히데키는 1949년에 일본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죠. 이 시점이 중요해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사회 전체가 실의에 빠져 있던 시기였거든요. 그때 ‘일본의 과학이 세계 수준에 올랐다’라는 사실이 국민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1965년 두 번째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이건 또 다른 의미가 있어요. 첫 번째가 “기적 같은 한 번”이었다면, 두 번째는 “이 나라 과학이 이제 단단한 기반 위로 올라섰다”라는 의미가 되거든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둘이 학창 시절부터 친구였다는 점이에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계속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일종의 ‘평생의 비교 대상’이었던 셈이죠. 연구자로서도 둘 다 이화학연구소의 니시나 요시오 연구실로 들어갑니다. 니시나는 코펜하겐 이론물리연구소의 닐스 보어 밑에서 최신의 양자역학을 배우고 온 사람이에요. 그런데 단순히 이론뿐만 아니라, 연구소 운영 방식 자체를 들고 옵니다. 자유롭게 토론하고, 서로 막 부딪치고, 계급장 떼고 논쟁하는 분위기요. 그 환경에서 유카와와 도모나가는 양자역학의 정수를 스펀지처럼 흡수하면서 급성장합니다. 그 당시 일본 과학은 “우리가 서양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단계를 넘어, “우리도 이제 유럽, 미국과 동등한 파트너다”라는 자신감으로 넘어가는 시기였고요.

여기서 둘 사이에 긴장감이 생깁니다. 유카와가 먼저 노벨상을 받잖아요. 그러면 도모나가는 어떤 감정이었겠어요. 순수하게 축하만 하기에는, 마음 한구석에 자존심이 무너지죠. ‘나만 뒤처졌나?’하는 자괴감이 생깁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면이 굉장히 인간적이라고 생각해요. 친구가 큰 성공을 거두면, 축하도 하지만 부럽고 질투심이 드는 건 인지상정이니까요. 그리고 이건 과학이 성장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완전히 혼자 뛰는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동료가 가장 강력한 자극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죠. 결국 도모나가도 엄청나게 노력해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라이벌 서사가 아니라, 협력과 경쟁이 동시에 작동하는 과학 생태계의 축소판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메시지는 따로 있어요. 유카와와 도모나가가 노벨상까지 받은 건 개인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랄 수 있는 ‘축적의 시간’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867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꾸준히 유학생을 보내 서양 과학을 배워왔죠. 그 축적이 쌓여서 20세기에는 굳이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일본 안에서 세계 최전선의 지식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실제로 이화학연구소에는 보어, 디랙, 하이젠베르크 같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자주 드나들며 강의와 연구를 진행했었고요.

그러니까 결론은 이겁니다. 유카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일본에도 천재가 있었다는 증거라기보다, 일본이 천재가 나올 수 있는 제도와 축적을 만들었다는 증거입니다. 그 점에서 이화학연구소의 설립은 결정적이었죠.


11.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를 겪고 전쟁을 치르고 난 후 드디어 1960년대 연구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미국의 도움으로 원자력연구소와 과학기술연구소를 만들고 선진국에 비해서는 비교적 늦은 시기로 보이지만 그래도 짧은 시간 안에 바짝 추격하긴 했네요. 그 당시에는 대통령보다 과학자에게 많은 급여를 지급하며 연구원을 우대했다면서요?


『연구소의 승리』에서는 주로 유럽과 미국의 연구소들을 다뤘는데요. 그런데 이런 선진국들의 폼나는 이야기와 달리, 한국은 좀 절박합니다. 한국에서 연구소 설립은 과학기술의 역사라기보다, 한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기록에 더 가까워요. 지금은 한국이 반도체, IT, 조선, 자동차 같은 산업 강국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런데 1960년대의 한국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 남짓한 농업국가였고, 수출이라고 해봐야 원자재나 가발 같은 경공업 제품이 전부였어요. 이러한 후진적인 구조로는 성장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사회 전체에 깔려 있었습니다. 결국 답은 하나였습니다. 제조업을 키워서 수출로 먹고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러려면 기술이 있어야죠. 그 기술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 기술을 만들어낼 연구소가 있어야죠. 하지만 당시 한국에는 연구소도 없었고, 그 연구소를 어떻게 만드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건 시기가 늦은 것도 아니고 아예 출발선 자체가 없었던 셈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기회가 하나 생깁니다. 외교적 계기인데요. 베트남전에 파병한 한국에 대해 미국이 감사의 뜻으로 “무엇을 도와줄까”라고 묻고,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기술 연구소가 필요하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미국의 지원과 자문을 받아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만들게 됩니다. 당시 한국이 참고한 모델은 기업과 계약을 맺고 기술을 개발하는 응용 중심 연구소였어요. 지금 당장 산업을 일으켜야 하는 한국 입장에서는 그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핵심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죠. 연구소는 간판만 세운다고 돌아가지 않습니다. 문제는 당시 국내에 이공계 인력풀이 매우 부족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초대 소장 최형섭은 해외로 눈을 돌립니다. 한국전쟁 이후 유학을 떠나 미국과 유럽에 자리 잡고 있던 한국인 과학자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돌아와 달라고 설득합니다.

여기서 제가 굉장히 인상 깊었던 지점이 있어요. 그 시절 귀국을 설득하면서 최형섭 소장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입니다. “우리 KIST는 과학자들이 좋아하는 사치스러운 기초연구는 못 한다. 그러니 노벨상 받고 싶은 사람은 오지 마라. 우리는 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이게 당시의 절박함을 보여주는 말이죠. 과학의 목표가 개인의 영예가 아니라, 국가의 생존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질문하신 “대통령보다 연봉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 절박함의 압축판입니다. 당시 KIST 연구원들의 급여는 서울대 교수의 3배 수준이었고, 너무 파격적이다 보니 “왜 저 사람들만 특혜를 주냐”는 민원이 쏟아졌다고 해요. 그런데 정부는 거기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인재를 모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라고 밀어붙인 거죠. 실제로는 대통령보다 많이 받는 연구자도 있었다고 하고요. 그래도 그 돈이 국내에서는 엄청난 파격이었지만, 정작 해외에서 잘 나가던 과학자들이 받던 처우에 비하면 30%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까 ‘엄청 많이 준 것’과 ‘여전히 가난한 나라’가 동시에 공존했던 겁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장면이 한국 연구소 역사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나라가 기술로 살아남겠다고 결심한 순간,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람에게 투자한 것입니다. 그리고 KIST는 실제로 성과를 내면서,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출발점이 됩니다.


12. 이 책에 대해서 “어른들보다 고등학생들이 많이 읽으면 좋겠다”라는 뜻을 자주 보이셨고 실제로 브런치에서 고등학생을 위한 책 증정 이벤트도 하셨잖아요. 이렇게 고등학생 독자들을 애정하시는 이유가 궁금해요.


제가 고등학생 독자들을 아끼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앞으로 한국이 먹고살 길이 과학기술 말고는 사실상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과학기술로 산업화에 성공했고, 선진국까지 올라왔죠. 그런데 앞으로가 더 어렵습니다. 저성장, 인구절벽, 감염병, 기후위기, 기술패권 같은 것들은 역사상 처음 겪는 난제들이에요. 이건 정치나 정책만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결국 마지막에 답을 만들어내는 건 과학기술이고, 그 중심에 연구소와 과학자가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과학기술도 결국 사람이 만들어낸다는 점이에요. 돈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에 승부를 가르는 요소는 역시 그 일을 할 인재가 충분하냐는 것이죠. 과학기술도 결국 규모의 경제가 작용하는 분야라, 인재가 많을수록 뛰어난 성과가 나올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런데 연구현장의 상황은 반대로 가고 있어요. 우선 인구 자체가 줄어들고 있고, 거기서 이공계를 택하는 사람의 비율도 과거보다 더 적어지고 있거든요. 이제는 최소한의 공백을 채우려고 해외에서 사람을 모셔 와야 하는 상황입니다.

저는 이걸 단순히 “학생들의 이공계 기피가 문제다”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개인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거든요. 지금 의대 선호가 강한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의대는 들어가는 즉시 안정적인 고소득 경로가 선명한 반면, 과학기술은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과학기술을 해서 “교수나 연구원이 되면 되잖아”라고 생각하는데, 그 자리는 전체 중에서 극히 일부만 갈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계약직·비정규직·프로젝트 기반의 불안정한 경로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나라를 위해 과학기술을 택하라고 하는 건 공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책을 쓰면서 과학기술의 매력을 독자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일단 이 책은 과학을 출세하거나 성공하는 방법으로 보여주지 않아요. 오히려 한 사람이 평생을 걸고 몰입할 만한 가치가 있고, 실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로 그립니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보면, 어떤 연구는 전쟁을 끝내기도 하고, 어떤 연구는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도 하고, 어떤 연구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뒤집기도 합니다. 그럴 때 과학자는 인류의 진보를 앞당기고 역사에 흔적을 남기는 직업이 되는 거죠. 저는 그 위대한 일이 ‘천재 한 사람의 위업’이 아니라, 연구소라는 무대와 동료와의 협력 속에서 현실이 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읽은 어느 고등학생이 “나도 언젠가 저 무대에 서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긴다면, 이 책은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과학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직업’은 아닐 거예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속적인 성공 이상의 보람과 만족을 주는 직업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뛰어난 과학자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적 탐구 자체를 좋아하고, “왜 그렇지?”라는 질문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분들은 돈을 벌었을 때보다 난제를 풀었을 때 훨씬 큰 만족을 느낍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학자인 김빛내리 연구단장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과학자는 하고 싶은 취미를 평생 하고, 월급까지 받는 아주 사치스러운 직업” 그러니까 과학자는 어떤 의미에서 ‘덕업일치’예요.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일이 즐겁고, 지식의 확장이 곧 삶의 성취로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과학만큼 매력적인 진로도 없습니다. 그렇게 과학으로 덕업일치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더 멀리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13. 아쉽지만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작가님은 본인을 고스트라이터라고 표현하시던데요. 이제 다른 사람의 이름이 아닌 배대웅이라는 이름으로 두 권의 책이 줄간 되었고, 지금 두 권의 책을 더 집필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주 2~3회씩 배대웅이라는 실명으로 브런치를 통해 작가님만의 색깔이 뚜렷한 글을 발행하고 계시잖아요. 지금 진행되는 두 권의 책은 어떤 책인지 궁금한데요. 여기에서 살짝 공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쓰고 있는 책은 두 권인데,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첫 번째는 글쓰기 코칭 책입니다. 제가 주로 쓰는 비문학 글, 그러니까 교양서나 칼럼 같은 글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쓸 수 있는지 다뤄요. 저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현타가 왔던 시기가 있었고, 그 돌파구를 ‘글쓰기를 통한 자아실현’에서 찾았습니다. 아마 비슷한 고민을 하는 직장인들이 많을 거예요. 저는 브런치로 입문해서 실제로 출간까지 이어졌으니까, 하나의 모델로 삼을 만한 경로를 밟아왔다고 생각해요. 그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단순한 문장 기술만이 아니라, 글을 쓰는 태도와 철학, 겸업 작가로서 시간관리, 독서와 사유의 방법까지 ‘글쓰기의 전체 시스템’을 보여줄 생각입니다.

두 번째는 청소년 과학 교양서입니다. 첫 책이었던 『최소한의 과학 공부』가 성인 교양서였다면, 그 내용을 좀 더 쉬운 언어로 끌어내린 버전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오늘 이 자리에 고등학생 분들도 있는데, 그런 독자들에게 “과학이 어렵기 이전에, 먼저 재미있다”는 느낌을 주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청중 질문


1. ‘기초과학 투자와 자율성 보장’과 혹시 모를 ‘연구 주체의 도덕적 해이’ 사이 균형을 찾을 수 있는 현실적 방안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연구나 평가 실무 절차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문제는 ‘연구자를 계속 의심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는 답이 없다고 생각해요. 연구는 원래 불확실하고, 전수검사처럼 관리하면 연구가 증빙 서류로 변해버리거든요.

그래서 현실적인 해법은 하나입니다. 자율성은 확실히 보장하되, 표적 감사로 불량을 잡고, 걸리면 크게 불이익을 주는 방식이에요. 이걸 쉽게 비유하면 KTX 무임승차 단속이랑 비슷합니다. 모든 승객을 매 순간 100% 검표할 수는 없죠. 대신 랜덤으로, 또는 의심 징후가 있는 경우에 집중해서 검표합니다. 그리고 적발되면 ‘이번만 주의’가 아니라 꽤 큰 페널티가 가해지잖아요. 그게 억제력입니다.

연구도 마찬가지예요. 평소에는 연구자가 연구에 몰입하도록 믿고 맡기되, 부정·부실 징후가 보이면 감사와 제재는 아주 확실하게. 저는 그 조합이 자율성과 도덕적 해이를 동시에 다루는 가장 현실적인 균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2. 트럼프 정부 기조인 기술 민족주의 및 자국 우선주의가 연구소 간 협력 기류에 영향을 주진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네, 영향을 줬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기술 민족주의가 강해지면 연구소 간 협력은 보통 세 군데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인재 이동(비자·체류 등), 해외 파트너가 낀 공동과제의 추진, 외국의 영향에 대한 규제·감시 강화 같은 것들이죠.

실제 사례로 보면, 트럼프 2기 들어 비자 취소·심사 강화가 눈에 띄게 늘었다는 보도들이 있었고, 이건 국제 공동연구에 참여하는 연구자들의 이동성을 직접 흔듭니다. 또 대학·연구기관과 해외 자금의 연계를 더 엄격하게 관리하도록 압박하는 흐름도 있었고요. 실제로 NIH의 국제공동 연구과제에 제동을 거는 조치도 보도됐습니다. 이런 것들이 합쳐지면, 협력은 느려지고 조심스러워지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뀝니다.

여담으로 하나 덧붙이면, 이런 분위기가 강해질 때마다 과학자들은 “그럼 숨 쉴 공간을 어디서 찾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서 독일의 막스플랑크협회가 하버드대학 사람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가 망명 캠퍼스 역할을 해줄게”라는 이야기도 했었고요.


3.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과학의 변화를 개인의 사상이나 철학보다는 연구소라는 구조와 제도의 변화로 설명하셨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20세기 전환기에서 질서와 예측의 세계관이 흔들리고 협력과 불확실성의 시대가 열렸다는 맥락에서 문학 작품까지 언급하신 부분이 인상 깊었는데요. 집필 과정에서 과학을 단독 주제로 보기보다는 정치·사회·제도와의 상호작용 구조에 초점을 두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또한 철학적 배경을 의도적으로 절제하신 부분이 있다면 그 판단의 기준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구조 중심의 서사를 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과학을 ‘인류의 진보를 이끄는 지식’으로도 보지만, 동시에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제도로도 봅니다. 과학은 현실과 무관하게 발전하는 게 아니라, 연구소라는 조직 안에서, 국가의 재정과 산업의 수요, 전쟁과 국제정세 같은 조건과 얽히면서 방향이 바뀌거든요. 그래서 20세기의 과학 변화를 설명할 때 개인의 천재성만으로는 부족하고, 연구소와 시스템의 변화를 함께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제 개인적인 배경도 큽니다. 저는 사회학을 공부했고, 과학을 과학사·과학철학·과학기술사회학 같은 관점으로 ‘관계와 구조’ 속에서 읽는 방식에 익숙합니다. 그리고 이 접근이 특히 비전공자에게 강점이 있어요. 수학과 이론을 다 따라가지 못해도, 과학이 어떤 시대적 문제를 만나고 어떤 제도를 통해 성장했는지를 알면 큰 흐름이 잡히니까요.

철학적 배경을 일부러 뺀 건 아닙니다. 다만 철학을 정면으로 다루면 책이 너무 추상화되기 쉬워서, 저는 철학을 설명하기보다 그 맥락을 정리하는 수준으로 절제했습니다.

결국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은 한 가지였거든요. 과학의 힘은 천재 개인의 번뜩임뿐만이 아니라, 그 천재를 가능하게 만든 구조의 승리이기도 하다는 것.


4. 이 책에서는 연구소와 제도를 중심으로 과학이 산업과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주셨는데요,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학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 책임과 윤리의 문제도 함께 커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이후 작업에서는 과학의 성취 자체가 아니라, 그 성취를 만들어낸 과학자와 연구 공동체가 어떤 윤리적 선택의 순간들을 마주했는지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도 써보실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말씀하신 ‘윤리적 선택의 순간’은 정말 중요한 주제이긴 한데요. 솔직히 제가 다루기에는 너무 큰 주제 같아요. 과학의 성취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철학, 사회, 윤리를 정교하게 엮어서 인류에게 성찰의 메시지까지 줘야 하는데… 저는 그런 거대한 심판을 내릴 급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질문 주제와 비슷한 책이 이미 하나 있습니다. 일본의 이론물리학자 마스카와 도시히데의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라는 책인데요. 이분은 노벨상을 받을 정도의 석학이면서 사회참여에도 적극적이었고, 특히 한국에 많은 애정을 보였습니다. 이 정도 내공은 되어야 과학과 윤리를 제대로 엮을 수 있겠다 싶어요. 그래서 이 주제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그 책을 꼭 한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신 아직 어디에도 말한 적 없는 다음 과학 책 아이디어가 하나 있는데요. 『연구소의 승리』의 프리퀄 같은 겁니다. 요즘 우리는 과학을 자연과학으로만 떠올리지만, 원래는 문과·이과가 이렇게 갈라지기 이전 시대가 있었어요. 시기적으로 보면 대략 17~18세기인데요. 그 문·이과 융합의 장에서 계몽주의도 나오고, 근대적 진보의 사고방식도 만들어졌거든요. 그래서 왕립학회, 루나 소사이어티, 백과전서파 같은 지식인 네트워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교류했고, 그 과학적 사고가 지식과 산업, 정치와 사회를 어떻게 혁신했는지를 추적해보고 싶습니다.

다만 이게 진짜로 책이 될 수 있을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걸 내줄 출판사가 있을지도 모르겠구요. 아직은 그냥 저 혼자만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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