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하는 아저씨

<윤고은의 EBS 북카페> 출연 후기

by 배대웅

1월 15일 아침, 집을 나서는 내게 아내가 당부한 것은 두 가지였다.


“절대 말 빨리 하지 마”

“쓸데없는 개그 욕심도 부리지 말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마치 이런 광경이었다. 초등학생이 학예회 첫 무대 앞두고 엄마한테 “긴장하지 말고, 딴짓하지 말고, 손 흔들지 말고, 박자 놓치지 말고” 같은 말을 열두 번쯤 듣고, “응, 엄마”라고 대답하는.


아내는 나를 너무 잘 안다. 나는 원래 말이 빠른 편이다. 그리고 말이 빠른 사람이 대체로 그렇듯, “이 드립을 지금 치면 완전 웃기겠는데?”라는 충동이 불현듯 스칠 때가 있다. 문제는 그 결과물이 지나고 보면 대체로 폭망으로 귀결된다는 것. 아내는 그것까지 다 내다보고 나를 단도리친 것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이 두 문장이 계속 맴돌았다. 말 빨리하지 말 것, 개그 욕심부리지 말 것. 아마 평소라면 대충 흘려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무게가 달랐다. “하긴, 오늘은 공중파 생방송이지.”


물론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긴 하다. 그래도 오늘 저녁 등짝 스매싱을 안 쳐맞으려면 꼭 달성해야 하는 미션이었다. 그렇게 다짐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서울역이었다.


GTX가 준 문화충격


일산이면 당연히 3호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카오맵이 엉뚱한 길을 알려준다. “GTX-A 탑승”


GTX-A? 그게 뭔데?


서울에서 20년을 살았다. 예전에는 강남에서 광화문까지 눈감고도 다녔다. 그런데 요즘은 서울이 너무 낯설고 어렵다. 이제는 카카오맵 없이는 순식간에 난민이 되어버린다. 서울은 계속 바뀌었는데, 나는 업데이트가 안 됐다.


GTX를 타 보니 이건 완전 신세계였다. 열차도 깔끔하고 상당히 편리했다. 무엇보다 킨텍스까지 17분. 진짜로 날아갔다. “17분”이라는 숫자가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 일산이 갑자기 서울 옆동네가 됐다.


펭수의 고향에 도착하다


EBS에 도착했다. 역시 펭수의 고향답게 건물 외벽부터 내부까지 펭수로 도배돼 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거의 1시간 가까이 일찍 도착했다. 1층 카페에서 밀크티를 한 잔 마시면서 기다렸다. 그러면서 준비해 온 답변을 다시 점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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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60117_143922972.jpg 이곳이 펭수의 나라입니까


담당 작가님이 미리 질문지를 주셨었다. 질문이 무려 21개였다. 1시간 동안 이걸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에 작가님이 덧붙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이건 예시일 뿐이고, 실제 방송에서는 다르게 갈 수도 있어요.”


…그럼 이 종이는 대체 왜 준 거죠?


하지만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이 종이뿐이었다. 나는 그걸 붙잡고, 한 시간 뒤 시험인 학생처럼 답을 외웠다. 추가 질문을 예상해 여러 방향에서 시뮬레이션도 해보았다.


그 와중에 핸드폰이 계속 울렸다. 브런치 작가님들의 카톡과 댓글이 속속 도착했다. 힘내라는 응원의 메시지가 오기 시작하니, 신기하게 진짜 힘이 났다.


물론 “방송 중에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져 버리면 어쩌지?” 하는 공포도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에이 그래도 내가 이 책 쓰려고 고민하고 머리 쥐어뜯은 세월이 얼만데… 어떻게든 되겠지.”


그림을 그리라고요?


12시 40분 담당 작가님과 조우했고, 스튜디오로 올라갔다. 공간이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놀랐다. 제작진분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기다렸다가, 1부가 끝나자 라디오 부스로 들어갔다. 진행자 윤고은 DJ님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 “청취자분들께 드릴 책에, 북카페 에디션이라고 해서 그림을 그려야 해요.”


저기 지금 뭐라고… 그림이요?!


나는 고등학교 이후로 그림을 그려본 적이 거의 없다. 반면 우리 집에는 그림을 매일 그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딸이다. 그 딸이 내 그림을 보면 늘 이렇게 말한다. “아빠 그림 진짜 못 그려.” 이 말은 ‘평가’라기보다 ‘사실 확인’에 가깝다. 그런데 지금 생방송 직전에 그림을 그리라니. 그림의 주제는 또 마음대로라니. “아무거나 그리면 된다”라고 하시는데… 그 아무거나가 제일 어렵다.


오프닝 직전까지 두뇌를 풀가동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한 문장을 떠올렸다. 책에 인용한 호머 애드킨스의 말. “기초과학이란 공중에 화살을 쏘고, 그것이 떨어진 자리에 과녁을 그려 넣는 일이다.” 그래 이거다. 화살과 과녁이라면, 그나마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생방송, 생각보다 괜찮았다


방송이 시작됐다. 긴장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전국에 나가는 생방송이라는 사실을 계속 의식하면 압박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그쪽으로는 신경을 안 쓰기로 했다. 수백만 청취자보다는 눈앞의 윤고은 님과 1대 1로 대화한다고 생각했다. 괜히 멀리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내 말만 흔들릴 것 같았다.


윤고은 님의 반응을 잡아내고 대화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만드는 것. 그게 결국 청취자의 반응을 좋게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게 가능했다. 윤고은 님이 정말 편하게 진행해 주셨기 때문이다.


음악이 나가는 동안에도 윤고은 님은 내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는 말을 여러 번 하셨다. 그 말이 립서비스로 들리지는 않았다. 실제로 윤고은 님 책에는 페이지마다 색색의 테이프가 엄청 많이 붙어 있었다. 책을 인용할 때도 그 내용이 디테일했다.


사실 처음에 진행자가 소설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걱정했었다. 과학책에 얼마나 관심이 있을까 싶어서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윤고은 님은 이 책을 내고 만난 독자 중 가장 깊이 있는 독자였다. 담당 작가님도 내 책 구성이 특이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방송 결정도 작가님 픽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편안한 기분으로 방송에 녹아들 수 있었다.


문자의 80%는 지인들


방송 중간에 아내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원래 이 방송 찐 애청자인데 갑자기 아는 사람이 나와서 너무 놀랐다고 했다. 아내도 하라는 업무는 안 하고 문자를 보냈다. 브런치 작가님들도 응원 문자를 많이 보내주셨다. 그러니까 이날 소개된 문자의 80%는 거의 지인들이었다.


방송에서도 브런치에서 글쓰기를 한다고 얘기했다. 윤고은 님은 브런치를 전혀 모르는지 “그게 뭐지?” 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꿋꿋이 말했다. 이날만큼은 브런치가 내 소속팀이었다.


개그 본능은 참았지만


방송 분위기에 익숙해지니 드립 욕망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아내의 미션이 떠올라 꾹 참았다. DJ님이 청취자들을 ‘카페인’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카페人’이라는 의미겠지. 나는 순간 “카페인이라니 다들 커피 좋아하시나 봅니다”라고 한 마디하고 싶었다. 하지만 별로 안 웃길 것 같아서 넣어뒀다. 다행이다.


대신 짙은의 <첫눈>을 소개할 때는 결국 덕후 본능이 튀어나왔다. “짙은 성용욱 씨 꼭 한번 뵙고 싶습니다” 이건 이날 방송에서 한 말 중에 가장 잘했다고 생각한다. 방송에서 그 이름을 한번 불러본 것만으로, 이미 본전은 뽑았다.


마지막에 결국 빨라진 말


1시간 방송이 정말 빨리 지나갔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인이 제작진과 윤고은 님의 분위기에서 감지됐다. 덩달아 나도 마음이 급해졌다. “아, 아직 할 말이 많은데?”


결국 나도 모르게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내가 그렇게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도 시간 내에 예정했던 KIST 이야기까지는 무사히 마무리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내가 한 말은 이거였다. “제가 말이 너무 빨랐죠? 시간이 없는 눈치가 보여서 저도 모르게…”


그런데 다들 좋았다고 했다. 윤고은 님은 “말씀은 거의 2배속이었는데, 일목요연해서 이해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어요”라고 했다. 역시 착하신 분이다. 제작진도 다 웃으셨다. 게시판에 벌써 끝이냐, 2부 해달라는 요청도 올라왔다고 했다. 나로서는 그 모든 반응이 그저 고마웠다.


포크와 계란후라이라니


끝나고 청취자에게 드릴 책에 그림을 그렸다. 생방송보다 이 일에 더 신경을 집중했다. 내 인생 최대의 작품이었다. 화살과 과녁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 그걸 본 윤고은 님이 한마디 하셨다. “화살과 과녁이 아니라 포크랑 계란후라이 같은데요?”


…그러니까 제가 그림 못 그린다고 했잖습니까.


나는 준비해 간 『빈틈의 온기』를 꺼내 윤고은 님께 사인을 받았다. 역시 인기 작가라 이런 걸 많이 해본 티가 났다. 글씨체가 너무 귀여웠다. 나도 사인을 저렇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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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작가는 사인부터 다르다. 나도 이렇게 하고 싶다.


방송에 나간다니까 정말 많은 분이 축하해 주셨다. 함께 방송을 들어주시고, 문자까지 보내주신 모든 브런치 작가님들께 감사드린다. 정 떨어지는 브런치이지만, 브런치 작가님들은 참 좋다.


몇몇 작가님들의 방송 후기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백수광부 작가님이 남겨주신 후기는 결정적이었다. 따님과 같이 방송을 보다가, 따님이 나를 보고 “말 잘하는 아저씨”라고 했단다. 그 얘기 듣고 빵 터져서 이 후기 제목을 그걸로 정했다. 다만 따님이 그렇게 말하고 끝까지 안 보고 도망간 건 안 자랑이다.


인생 첫 생방송의 마무리


다음날 아침, 등원 준비를 하는 딸에게 유튜브 보이는 라디오 영상을 보여줬다. “이거 봐. 아빠야.” 딸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지켜보더니 화면 속 아빠를 쓰담쓰담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와아… 아빠 멋있다~” 이 말 한마디에 다 보상받았다. 일산까지 가서 한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떠들다 온 보람이 있었다. 방송에서 내가 한 말이 얼마나 괜찮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도 딸한테는 ‘멋있는 아빠’로 남았으니 그걸로 됐다.


생각해 보면 그날 내가 끝까지 멘탈이 안 흔들렸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스튜디오에는 나 혼자 앉아 있었지만, 실제로는 혼자가 아니었다. 같이 들어주시고, 방송 중에 문자 보내주시고, 끝나고 나서 자기 일처럼 축하해 주신 브런치 작가님들이 있었다. 덕분에 생방송에 출연했다기보다는,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남았다.


응원해 주신 모든 분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오늘도 각자 자리에서 쓰고 있을 우리의 글이, 언젠가 또 이렇게 뜻밖의 장면으로 이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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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못 들으신 분들은 이 영상으로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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