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니 마음대로 말을 만들어?”
지금껏 글을 쓰며 들은 피드백 가운데 가장 강렬했던 한마디다. 20년 전, 어떻게든 석사학위 논문을 써보려고 애쓰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긴장 관계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관련 책과 논문을 뒤지다가 한 단어에 눈이 멈췄다. ‘정책 레짐(policy regime)’이라는 말이었다. 정치사회학에서 정책 레짐은 특정 정책을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제도적 구조를 가리킨다. 관료 조직, 기업 네트워크, 지식 담론, 전문가 집단 같은 것들이 결합해 정책의 방향을 형성한다는 개념이다.
나는 이걸 찾았을 때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에 빙의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압축하는 단어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개념을 중심에 두고 단숨에 논문 초고를 써 내려갔다. 분량은 30페이지가 조금 넘었다. 내 인생 최대의 역작이 탄생하려는 순간이었다. 며칠 뒤 그걸 들고 의기양양하게 교수님에게 갔다.
하지만 인생이 늘 그렇듯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논문 리뷰는 두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했다. 정확히는 첫 페이지의 제목에서부터 막혔다. 교수님은 내가 제목에 쓴 ‘신자유주의 정책 레짐’이라는 단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거야?”
나는 열심히 설명했다. 민주화 이후 형성된 관료 체계와 기업 이해관계, 지식 담론 등이 결합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재생산하는 구조라고. 그러나 교수님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렇게 정의하면 정책 레짐이 아닌 게 어디 있어?”
한마디로, 사회 전체가 정책 레짐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어벙벙하게 핵심 개념을 잡으면 논문은 사소한 반론에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취지의 지적이었다.
나는 정치학의 대가가 쓴 책에도 등장하는 개념이라고 반론했다. 교수님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말했다. “그 사람은 석학이니까 그렇게 쓸 수 있어. 근데 너는 지금 석사 논문을 쓰는 학생이잖아.” 그리고 이어진 말이 바로 그 문장이었다. “왜 니 마음대로 말을 만들어? 학문적 보편성도 없는 말을 왜 멋대로 만들어내냐고. 그게 그대로 인정될 줄 알았어?”
그날 내가 들고 간 30여 페이지의 초고는 단 한 줄도 검토받지 못했다. 논문은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다.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이런 지적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건 남의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글이네”, “기본적인 논리 자체가 틀려먹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 “연구 페이퍼인지 대자보인지 헷갈린다”라는 식의 비수 같은 말들을 꾸준히 들어왔다.
그때마다 죽고 싶을 만큼 창피했고 허탈했다. 며칠 밤낮을 꼬박 새운 노력이 삽질로 치부되는 듯한 수치심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변명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내 노력이 어느 정도였든 글이 부족한 건 냉정한 사실이었으니까.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것. 누구도 알아주지도 않을 그 지루한 지적과 퇴고의 무한 루프를 거친 뒤에야 나는 겨우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얻은 진정한 소득은 학위가 아니었다. 내 글이 좋아질 수만 있다면, 그 과정에서 상처 입는 것이 자존심이든 노동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깨달음이었다. 지적을 받으면 다시 쓰고, 설득력이 없으면 신념도 내려놓고, 필요하다면 글 전체를 갈아엎는 것. 나는 그 시절에 글을 살리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이런 태도는 사실 특별한 것도 아니다. 글을 오래 써온 사람들은 거의 같은 이야기를 한다. 초고는 대개 과장되고 군더더기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글은 고쳐 쓰는 과정에서 비로소 형태를 갖춘다. 트루먼 카포티가 “나는 연필보다 가위를 더 믿는다”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좋은 글은 더 많이 쓰는 능력보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능력에서 만들어진다. 결국 글쓰기에서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작가의 자존심이다. 처음 쓴 문장에 대한 애착, 내가 옳을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것들이다. 그런 것들을 붙들고 있는 한 글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종종 “작가는 자기 글에 대해 부모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모의 마음은 내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맹목적인 애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식에게 좋은 일이라면 피로도 개의치 않고 체면조차 기꺼이 내려놓는 태도다. 그것은 작가(나)를 지키려는 마음이 아니라, 어떻게든 글(자식)을 살려내려는 의지다.
말할 필요도 없이 글쓰기는 고된 일이다. 초고를 짜내는 에너지도 엄청나지만, 다 쓴 글을 타자의 시선으로 다시 읽으며 해체하는 과정에는 더 큰 고통이 따른다. 아무리 선의라 해도 내 글에 누군가 이러쿵저러쿵 지적하는 일이 기분 좋을 리가 없다. 자존심은 상하고 방어본능이 꿈틀댄다.
그럼에도 이 모든 걸 견뎌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바로 좋은 글에 대한 욕심이다. 내 글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만 있다면, 작가는 자신의 에고(Ego) 정도는 얼마든지 깎아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