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나 개취로 뽑아본
어떤 문장은 읽는 순간 끝난다.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고, 반박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저 “헐…”하는,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한 느낌만 남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는 그런 문장이 많다. 그렇다고 내가 하루키스트(Harukist)는 아니다. 전집을 읽은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싫어하는 작품도 꽤 있다. 특히 오컬트 세계관이 강한 소설들은 읽을 시도조차 안 한다. 양 사나이가 어떻고 리틀 피플이 저떻고… 극현실주의자인 나로서는 이런 표정만 짓게 된다.
대신 나는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는 하루키를 좋아한다. 에세이와 리얼리즘 계열 소설에서 그는 누구보다 번뜩이고 스타일리시한 문장을 쓴다. 그래서 그의 세계를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의 문장에는 자주 무너지게 된다(형 나 죽어).
이 글은 그런 문장들에 대한 기록이다. 내가 읽은 ‘절반도 안 되는 하루키’ 속에서 건져 올린,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던 문장들. 10위부터 1위까지 엑기스만 뽑았다. 하루키 전집을 읽지 않아도 된다. 이 문장들만 읽어도 충분하다.
요컨대 사랑을 한다는 건 그런 거야, 다무라 카프카 군. 숨이 멎을 만큼 황홀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네 몫이고, 깊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것도 네 몫이지. 넌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그것을 견뎌야만 해.
- 『해변의 카프카』
사랑은 늘 좋은 것만 가져다주는 줄 알았다. 설레고, 행복하고, 영화처럼 반짝이는 것들. 그런데 이 문장은 말한다. 그 반짝임만큼의 어둠도 ‘전부 네 몫’이라고.
살아보니 알겠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규정에 가깝다. 사랑이라는 계약서의 약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행복은 공유하나, 고통은 알아서 해결함.”
이걸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마음부터 내주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 알아도 똑같이 했을 거다.
나이를 먹는 것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나이를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누구나 나이는 먹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 『먼 북소리』
나이는 누구나 먹는다. 이건 핑계가 안 된다. 문제는 그 시간 동안 뭘 했느냐다. 하루키는 이걸 서른일곱에 깨닫고 짐 싸서 유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3년간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 댄스 댄스』를 써냈다. 참 얄미울 정도로 간지난다.
그런데 나는 그 나이에 뭘 했지? 기억이 잘 안 나는 걸 보니,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서늘해진다. 지금 이 순간도 "어쩔 수 없지"라는 마법의 주문을 외우며, 하루키가 두려워한 '헛된 세월'의 마일리지를 쌓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러나 야쿠르트를 응원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자질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패배에 대한 관대함이다. 지는 것은 싫지만 그런 일을 일일이 마음에 깊이 묻어두고 있다가는 도저히 오래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체념이다.
-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이건 문장이 아니라 인류애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매일 지고 깨지는 우리네 인생을 보듬는 정신승리 매뉴얼이다. 하루키는 일본 프로야구의 동네북이었던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응원하며 '패배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맷집'부터 키워야 했다.
암흑기 LG 트윈스 팬이었던 나도 이 문장을 읽고 전율했다. "아, 내 성격이 좋아서 참은 게 아니었구나. 죽기 싫어서 내 몸이 생존 본능으로 '관대함'이라는 마취제를 놓은 거였구나." 지고, 또 지고, 내일도 질 것 같은 팀을 응원하려면 도를 닦아야 한다. 일일이 빡치다가는 제 명에 못 살 테니까. 하루키는 그 구차한 생존 전략을 '관대함'이라는 우아한 단어로 포장해 준 거다.
그런데 사람이 참 간사하다. 2023년과 2025년에 통합 우승을 하고 나니 이 문장도 흘러간 유행가처럼 시큰둥해진다. 하루키 형 미안해요. 난 이제 패배에 관대할 필요가 없어져 버렸거든.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단 한 가지입니다.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자,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쓰고, 사랑의 이야기를 쓰고, 사람을 울리고 두려움에 떨게 하고 웃게 만들어 개개인의 영혼이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함을 명확히 밝혀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입니다.
- 『잡문집』
2009년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폭격했을 때 하루키의 예루살렘상 수상이 결정됐다. 세상은 그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한쪽은 정의의 이름으로 보이콧을 종용했고, 다른 한쪽은 예술의 순수성을 이유로 수상을 권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든든한 '내 편'이 생기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루키는 어느 쪽의 깃발도 들지 않은 채 홀로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이스라엘 대통령과 고위 관료들 앞에서 담담히 수상 연설을 했다. “높고 단단한 벽과 그에 부딪혀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언제나 알의 편에 서겠다.”
나는 이 일화에서 하루키라는 작가의 ‘진짜 품격'을 본다. 그는 투사가 되어 박수받는 쉬운 길도, 침묵 뒤에 숨는 편안한 길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양쪽에서 돌 맞을 각오를 하고, 오직 작가라는 단독자로서 그 자리에 가서 할 말을 했다.
세상은 늘 우리에게 "너는 누구 편이냐"라고 묻는다. 내 편을 만들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시대다. 그러나 하루키는 증명한다. 네 편 내 편의 얄팍한 도식을 넘어, 인간 영혼의 존엄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하면서 위대한 일인지. 나도 언젠가 내 글이 누군가에게 '벽'이 아닌 '알'의 온기를 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는 문장이다.
너를 보고 있으면 때때로 먼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어. 그 별은 무척 밝게 보이지. 하지만 그 빛은 몇만 년이나 이전에 보내진 빛이거든. 그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천체의 빛인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 빛은 어떤 때에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실적으로 보이지.
-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밤하늘에 보이는 별빛의 상당수는 과거의 유령이다. 별은 이미 수만 년 전에 폭발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쏘아 올린 빛은 우주를 유랑하다 이제야 내 망막에 도착한다.
지나간 사랑도 이 별빛을 닮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옛 연인의 미소나 말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건, 지금 그 사람의 진심 때문이 아니다.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그 시절, 그가 쏘아 올린 다정한 빛이 수만 광년을 돌아 이제야 내 마음의 궤도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빛이 너무 사실적이라 착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혹시 아직도 나를…?" 하지만 정신 차려야 한다. 그 빛을 발하던 행성은 이미 차갑게 식었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확률이 99%다.
하루키는 이 문장을 통해 "지나간 사랑은 다시 찾지 말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경고를 우주적인 낭만으로 승화했다. 지금 내 눈앞에 반짝이는 그 눈빛에 속지 말자. 그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잔상일 뿐이니까. 굳이 그 별의 시체를 확인하러 나서겠다면 말릴 수는 없지만, 그러다 우주 미아가 될 수도 있다.
"그런 건 예술가가 할 만한 짓이 아니다. 그래서야 공장이나 마찬가지 아니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요. 분명 예술가가 할 만한 짓은 아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왜 소설가가 예술가가 아니어서는 안 되는가. 대체 누가 언제 그런 것을 정했는가. 아무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으로 소설을 쓰면 됩니다. 우선 ‘딱히 예술가가 아니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집니다.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글을 쓰다 보면, 괜히 잘 써 보이려는 마음이 덕지덕지 붙는다. 영감이 오지 않는다며 괴로워하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고상한 척 문장을 매만진다. 하지만 하루키는 단호하게 말한다. "예술가 아니면 좀 어때?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내 맘대로 하는 자유인인데."
나는 좋은 글이 필력이 아니라 쓰는 상태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그 최고의 상태란 바로 '자유로움'이다. 남들이 정한 가치나 있어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내가 좋아하는 것에만 지독하게 집중할 때 문장은 생명력을 얻는다.
거창한 이름표를 떼어내면 글쓰기는 비로소 즐거워진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쓰는 것. 이 단순하고도 강력한 자유야말로 모든 창작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건 브런치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라이킷이나 구독자 같은 숫자에 영혼을 팔기보다 마음 편한 자유인이 되기로 할 때, 진짜 내 목소리가 담긴 문장이 터져 나온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 『노르웨이의 숲』
하루키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정서의 핵심은 ‘상실 이후에 남는 감정’이 아닐까. 이 문장은 그 감정의 가장 깊은 층위를 짚어낸다.
우리는 흔히 슬픔이 시간이 지나면 치유된다고 믿는다. 혹은 어떤 진리나 태도가 그것을 극복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루키는 그 모든 기대를 거부한다. 슬픔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바닥이 보일 때까지 그저 '다 슬퍼해야만' 하는 것.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그 고통의 과정을 통해 뭔가를 배운다 해도, 다음에 들이닥칠 새로운 슬픔 앞에서는 아무런 방패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매번 첫 슬픔인 양 무방비로 무너져야만 한다.
이 냉정할 정도로 정직한 인식이야말로 하루키까였던 내가 하루키빠가 된 이유다. 『노르웨이의 숲』의 수많은 아름다운 문장 중에서도 이 문장은 유독 오래 남는다. 그것이 위로를 가장한 거짓을 한 줄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내 삶에도 기쁨과 즐거움, 분노와 고통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걷어내면, 가장 밑바닥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허무가 가라앉아 있다. 이 문장은 그 감정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은 채, 서늘할 정도로 정확한 언어로 끌어올린다. 삶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마주하는 이 암울한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도 그렇게 상실과 더불어 살아간다.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을 함께하고 있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두 개의 위성이 그리는 궤도가 우연히 겹칠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고 어쩌면 마음을 풀어 합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잠깐의 일이고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 속에 있게 되는 거예요.
- 『스푸트니크의 연인』
1987년작 『노르웨이의 숲』과 1999년작 『스푸트니크의 연인』 사이에는 1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다. 두 작품 모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말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의 결은 꽤 달라져 있다. 『노르웨이의 숲』의 문장이 지극히 개인적인 '지상의 슬픔'이었다면, 12년 뒤의 하루키는 그것을 '우주적 비극'으로 확장한다. 이제 인간은 숲속을 헤매는 방랑자가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암흑 속에서 각자의 궤도를 도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가 된 것이다.
팬으로서 이 세밀한 변화를 지켜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문장의 밀도는 더 촘촘해졌고, 비유는 한층 더 차갑고 단단해졌다. 누군가와 마음을 합치는 기적 같은 순간조차 '우연히 궤도가 겹친 짧은 찰나'일뿐이라는 통찰은 참으로 하루키답다. 하지만 이 문장이 서글프기보다 오히려 근사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느끼는 고독이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절대적 규격임을 이토록 매력적인 비유로 긍정해주기 때문이다.
잠깐의 마주침 뒤에 각자의 어둠으로 돌아가야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여행 중이다. 비록 차가운 금속 덩어리일지언정, 서로의 궤도가 교차하던 그 반짝이는 순간을 기억하며, 다시 고독해질 용기를 얻는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혼자지만, 한때 누군가의 궤도 안에서 뜨겁게 조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차가운 우주를 항해할 명분은 충분하니까.
나는 그 무렵에 외운 예문을 지금도 몇 가지 기억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서머셋 몸의 ‘어느 면도사에게나 철학은 있다’고 하는 말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 앞뒤 문장이 상당히 긴데, 그건 잊어버렸다. 요컨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매일 계속하다 보면, 거기에서 자연히 철학이 생겨난다고 하는 취지의 문장이다. 여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어떤 립스틱에도 철학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고교 시절에 서머셋 몸의 이 문장을 읽고, ‘으음, 인생이란 그런 거로구나’하고 상당히 순진하게 감동했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술집을 경영하면서도, ‘어떤 온더록에도 철학은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8년간 매일 온더록을 만들었다.
-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아마도 내 글을 즐겨 읽는 약 3명(…)의 독자라면, 이 문장을 1위로 예상했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이 문장을 수없이 인용하며 나의 글쓰기를 지탱해왔다. 하지만 하루키의 본령은 소설이기에 눈물을 머금고 2위에 이 문장을 모셔야 했다.
그럼에도 글쓰기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문장을 고르라면, 나는 여전히 이걸 택한다. “어느 면도사에게나 철학은 있다.”
글쓰기는 재능보다 반복에 가까운 일이다. 하루아침에 나아지는 법이 없고, 뚜렷한 성취의 순간도 좀처럼 오지 않는다. 같은 문장을 고치고, 같은 생각을 다시 쓰고, 별 차이 없어 보이는 작업을 끝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 반복 속에서 미세한 차이가 쌓인다. 문장의 호흡이 조금씩 달라지고, 단어를 고르는 기준이 약간씩 정교해진다. 그 변화는 너무 작아서 스스로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을 통과하고 나면 분명한 방향을 갖는다. 그 방향이야말로 한 사람이 글을 쓰며 만들어내는 고유한 철학이다.
면도사의 면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매일 같은 동작을 반복하지만, 그 안에는 결코 같지 않은 차이가 스며든다. 그 차이를 끝내 만들어내는 것이 기술이라면, 그 차이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태도가 철학이다.
나는 이 점에서 글쓰기가 정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쏟아부은 시간과 반복은 사라지지 않고 결국 문장에 남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일을 반복한다. 언젠가 내 문장에도 누군가가 알아볼 수 있는 철학이 깃들기를 바라면서.
스물두 살의 봄, 스미레는 난생처음 사랑에 빠졌다. 광활한 평원을 가로지르며 돌진하는 회오리바람처럼 격렬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지나가는 땅 위의 형태가 있는 모든 사물들을 남김없이 짓밟고, 모조리 하늘로 휘감아 올리며 아무 목적도 없이 산산조각 내고 철저하게 두들겨 부수었다. 그리고 고삐를 추호도 늦추지 않고 바다를 가로질러 앙코르와트를 무자비하게 무너뜨리고, 가련한 한 무리의 호랑이들과 함께 인도의 숲을 뜨거운 열로 태워버렸으며, 페르시아 사막의 모래폭풍이 되어 어느 곳엔가 있는 이국적인 성곽 도시를 모래 속에 통째로 묻어버렸다. 그것은 멋지고 기념비적인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는 스미레보다 열일곱 살 연상으로, 결혼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덧붙인다면 여성이었다.
- 『스푸트니크의 연인』
글의 성패는 첫 문장에서 결정된다는 금언을 떠올릴 때, 이 도입부는 완벽을 넘어 경이롭다. 어느 나른한 오후, 무방비 상태로 책을 펼쳤던 나는 이 문장을 마주한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다. 남은 하루의 일상을 송두리째 마비시킬 만큼, 이 문장의 에너지는 무자비했다.
하루키는 사랑이라는 지극히 보편적인 감정을 '광활한 평원을 돌진하는 회오리바람'으로 시각화하며 시작한다. 앙코르와트를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사막을 집어삼키는 이 파괴적인 묘사는, 사랑이 달콤한 속삭임이 아니라 한 인간의 세계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기념비적 재난'임을 선언한다. 이어서 단락의 마지막, 열일곱 살 연상의 유부녀라는 비극적 설정을 덧붙인다. 그리하여 그 폭풍의 방향이 어디로 향할지, 그 끝에 기다리는 고독이 얼마나 깊을지를 단 한 단락으로 압축해낸다.
이것이 하루키 작가주의의 정점이다. 사랑, 상실, 허무라는 인류 보편의 소재를 다루면서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스타일리시한 필치를 통해 오직 '하루키만의 영역'으로 끌어온다. 누구나 아는 감정을 누구도 생각지 못한 언어로 길어 올리는 것. 그 보편과 특수의 절묘한 결합 앞에서,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하루키라는 중력권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사랑은 아름답기에 위험한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세계를 산산조각 낼만큼 압도적이기에 위대한 것임을 이 문장은 증명한다. 이 압도적인 첫 문장을 통과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스미레와 함께 각자의 고독한 궤도를 도는 위성이 될 준비를 마치게 된다. 내가 만난 하루키의 수많은 문장 중에서 단연코 가장 치명적이고도 아름다운 1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