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게 하루키 책을 두 권이나 선물 받았다. 기분이 좋아서 내 책장의 하루키 섹션도 모처럼 재정비했다. 그중 손에 잡히는 한 권을 뽑아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보았다. 그러다 뻘하게 터지는 한 문장을 만났다.
프린스턴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걸프 워 뭔지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하기에 ‘오오, 그리운 반전 집회’라고 생각해서 자세히 봤더니, 다름 아니라 프로 워(전쟁 지지) 데모였다. 남의 나라 일이니까 이러쿵저러쿵할 처지도 아니었지만 옛날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 그 후에 럿거스라는 주립대학(이곳은 좀 더 서민적인 대학이다)의 학생과 이야기해보았더니, "그건 프린스턴이기 때문이에요, 무라카미 씨. 우리 학교는 반전 집회를 제대로 한 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이윽고 슬픈 외국어』
난 왜 이런 어이없는 개그가 웃기지?ㅋㅋㅋ 전공투 세대인 하루키는 당연히 ‘대학생 + 집회 = 반전’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이 문장을 읽으니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2003년 이라크 파병 반대 시위 때, 어떤 어르신이 우리에게 “군대도 안 갔다 온 철부지들이 뭘 안다고!” 했었다. 히밤 난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국방색 덜 빠진 예비역이었는데… 지금 같았으면 “어르신, 저는 군대 갔다 왔지 말입니다?”라고 뻔뻔하게 받아쳤을 것이다. 그때 아무 말 못 하는 바람에 그 어르신께 반전 집회에 대한 잘못된 인식만 심어준 것 같아서 아쉽다.
그나저나 평화주의자 아인슈타인이 20년 넘게 봉직한 프린스턴에서도 전쟁 지지 시위가 있다니, 이것도 신기하다(물론 아인슈타인은 대학이 아니라 고등연구소에 있었다만, 뭐 거기가 거기다).
역시 하루키 에세이는 각 잡고 읽으면 손해다. 정리 중인 책장 앞이나 여행지의 기차 안,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서점에서 슬쩍 간 보듯 읽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진지함과 병맛의 경계선 위로 인생의 통찰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읽다가 무방비 상태로 빵 터지고, 이어서 또 생각하게 된다. 그게 이 양반의 방식이다.